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38화 (38/741)

38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도진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96.7점. 김도진, 합격이다. 축하한다.'

합격 통보.

도진은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 무림학교라는 숭무고의 합격을 확정지었다.

관문 시험에서의 평가와 본 시험에서의 평가를 종합하여 96.7점.

숭무고의 입학 시험은 평가를 통하여 획득한 점수를 합산, 절대 평가로 기준 이상의 점수를 획득하면 합격인데 거기서 96.7점을 받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을 확정지은 것이다.

배틀로얄이 끝나고 휴식을 취한 뒤 3일째에 금화도를 나와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게 될 때까지는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익숙한 풍경, 집이 가까워 오자 새삼 그것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었다.

'숭무고.'

속으로 그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전생에서는 현실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이름이다.

사고가 나기 전, 아직 무공을 붙잡고 있었을 때에조차 숭무고는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우주 건너편에 어떤 행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과도 비슷했던 감각.

바로 그곳에,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첫 걸음으로 목표했던 그곳에 정말로 합격을 확정지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러나 결코 나쁘지 않은 감각이 몸속을 내달린다.

입꼬리가 조금은 올라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 앞에 설 때까지도 입꼬리는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오전 11시 43분.

집은 비어 있었다.

어머니는 출근, 아버지는 오늘도 당직으로 집에 들어오지 않으신 모양이다.

동생들은 개학했으니 당연히 아직 학교일 터.

그렇게 비어 있음에도 휑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이곳이 그래도 가족과 함께 사는 집이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는 번듯하고 더 큰 집으로 가야겠지만.

도진은 짐을 정리하고 찬물로 샤워를 한 뒤 방에 대자로 누웠다.

대자로 누워 생각했다.

'소담이도 정한이도 여력이 남아 있었어.'

떠오르는 건 배틀로얄의 마지막 순간이다.

아무런 방해도 없이 치러진 일대일대일.

서로가 서로의 틈을 노리며 쉼없이 부딪쳤다.

치열하기 그지없는 싸움…… 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도진은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소담과 정한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삼할까진 아니어도 비장의 수만큼은 숨겨두었음을 무공을 부딪치는 도진은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도진이 가장 먼저 뒤쳐졌다.

그 다음 멈춘 건 소담이었다.

그 어떤 공격에도 뿌리내린 거목 같은 우정한이 뚫리지 않았기에.

소담은 2등이 되었고 우정한이 배틀로얄의 최후 승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입학생들의 순위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 순위는 3월 말에 진행되는 '비무'에서 결정된다.

비무. 입학 시험의 꽃이자 축제의 화룡점정.

그리고 입학이 확정된 학생들의 첫 번째 순위를 결정하는 토너먼트 형식의 일대일 대결이다.

여기서의 우승자가 바로 도진의 목표이기도 한 수석이 된다.

관문 시험에서 학생들이 모든 걸 보여주지 않는 건 본 시험뿐 아니라 이 비무까지도 대비하기 위해서다.

'소담이는 비무를 대비해서 비장의 수를 숨겼어.'

관문 시험에서 20초의 벽을 넘을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던 것처럼, 소담은 우정한의 방어를 뚫을 한 수가 있었음에도 결국 내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우정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찬찬히 되새겨보면 우정한은 이번에도 그 신묘한 방어 이외에 다른 수를 보여주지 않았다.

마치 깊은 우물처럼,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소림'이란 이름이 가지는 깊이를 연상케 한다.

정말로 그 벽이 높음을 실감한다.

이래서야 자만이 생길 수가 없다.

오히려 내가 오른 곳이 아직 낮은 곳임을, 아직 아득히 높은 곳을 향해야 함을 자각한다.

그러나 수석을 차지하고 싶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목표는 그 이상으로 분명하다.

수석을 차지한다.

다만, 여기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 도진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전생에서 수석은 소담이였어.'

우승이 확정되어 있다 여겨졌던 이번 년도의 시험에서 소담은 그 확정된 후보였던 우정한을 꺾고 수석을 차지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비무의 내용은 알지 못한다. 도진이 아는 것은 오직 결과뿐.

그리고 그 결과가 도진을 주춤하게 만드는 것이다.

전생과 마찬가지의 흐름이라면 수석은 소담이다.

한데 거기에 도진이 끼어들어 그것을 '빼앗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회귀라는 기적을 통하여 과거로 돌아온 도진이다.

본래의 흐름을 뒤트는 건 소담이 본래 누렸어야 할 것들을 빼앗는 행위가 아닌가.

생각이 이어지고 넓어지고 깊어질수록 망설임 또한 커져만 갔다.

그런 도진의 생각을 위지혁은 정확하게 짚어냈다.

-너무 이른 고민이구나.

-예?

-너무 이른 고민이라고 했느니라.

-…….

-그렇지 않느냐. 지금의 네가 수석을 차지할 거라 확신할 수 있느냐?

아니었다.

해야만 한다가 아니라 한다.

그런 생각으로 임하고 있는 도진이었으나 그것은 결코 확정된 미래가 아니었다.

-네가 설령 수석을 차지한다 해도 그것이 과연 반칙이나 요즘 말로 해서 치트, 버그로 치부할 일인지도 나는 의문이구나.

그 말에 거짓은 없었다. 정말로 위지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순수하게 실력으로 겨뤄 순위를 정하는 비무.

거기서 도진은 오롯이 자신의 실력으로 수석을 쟁취하려 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그 어떤 '반칙'도 없지 않은가.

다만 도진은 그렇게 생각하기 힘들었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미묘한 부분 또한 위지혁은 헤아릴 수 있었다.

그래서 말했다.

-정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다른 것들로 갚아주면 되지 않느냐.

-다른 것들로요?

-그래. 이를테면 그 아이는 1년 뒤에 좋지 않은 끝을 맞이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가 그것을 막아주면 되지 않느냐.

-아…….

-그 아이에게 있어 수석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의미가 있다면 모르겠다만 그렇지 않다면 이것이 너의 목표도 이루고 그 아이에게도 더 큰 득이 되는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만.

-…그렇네요. 감사합니다, 스승님.

도진은 짙어지던 망설임이란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그래, 비무는 정정당당한 대련을 통하여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나 또한 당당하게 우승을 노릴 자격을 갖추었다.

이제와서 '본래의 흐름에 끼어든 이물질'이라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 또한 이 세계를 살아가는 한 명의 무림인이니까.

도진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소담에게 마음의 빚이 남는다면 앞으로 함께 하면서 그것을 갚아주면 될 일이다.

소담과도 좋은 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하고 싶었다.

가능하면 곁에 있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고민 하나가 해결되자 다른 것들도 차례차례 떠오른다.

그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이은지였다.

'같은 조가 되지 않았어.'

여력이 된다면, 상황이 된다면 도와주고 싶었는데 같은 조가 되지 않았다.

만약 전생과 같은 흐름이라면 이은지는 시험에서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위약금을 물고 빚을 진 채 연예계마저 잠시 떠나게 될 터.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나.'

과거로 돌아오고 정말로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지만 사실은 두 달도 되지 않았다.

아직 도진은 이렇다 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인연이 닿지 않았다면 별 수 없지.'

미래에 찬란하게 성공할 것을 알기에 가슴 아프도록 안타깝지는 않았다.

그저 혹시라도, 마치 운명처럼 인연이 닿는다면 힘을 보태줄 수는 있을 터.

그렇게 생각했다.

도진은 생각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이 시간에도 소담과 우정한은 무공을 연마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보다 뒤쳐지는 도진이 놀고 있을 순 없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몇 배는 밀도 높은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렇게 도진의 시간이 층층이 쌓여 나갔다.

* * * *

오후가 되어 동생들이 돌아왔다.

유진이와 호진이는 땀과 열기로 김이 나는 듯한 도진에게 망설임없이 안겨들었다.

"형아!"

"오빠!"

"나 땀나니까 붙지 마, 얘들아."

"싫어!"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반항을 하며 안겨드는 동생들을 도진은 못 이기는 척 안아 주었다.

이렇게나 어리광이 많던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또 선망의 눈으로 도진을 바라봐주던 동생들이었다.

"오빠! 시험 붙었어?"

그래서 이번엔 결코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 붙었어."

"와아!"

"진짜야, 형?!"

"그래. 진짜야."

"와아아아!!"

언제까지고, 점점 더 자라 세상을 알게 되어서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싶었다.

샤워를 하고, 함께 밥을 차려 먹고 운동을 하며 웃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러다 동생들이 잠이 들면 청소 등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팔이 부들부들 떨림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넘어서는 한 번의 팔굽혀펴기를 기어코 해낼 때보다 어렵고 힘들며 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부모님을 대신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고 싶었다.

그렇게 설거지와 청소를 다 하고 11시가 넘는 시간이 되어 도진은 어머니를 맞이했다.

"다녀오셨어요, 어머니."

"응, 도진아. 오늘 온 거니?"

"네."

길면 일주일 뒤에 올 수도 있다고 말했는데 도진은 두 배는 빠르게 돌아왔다.

"밥은 먹었고? 배고프진 않아?"

"네. 유진이랑 호진이랑 먹었어요."

혹여 시험에서 떨어지진 않았을까.

무언가 잘못되진 않았을까.

그런 걱정을, 서정원은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처럼 아들을 대해 주었다.

그런 서정원에게, 어머니에게 도진은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저 합격했어요."

"응?"

"어머니의 아들 김도진이, 숭무고에, 합격했어요. 아주 깔끔하게, 고득점으로요."

"아……."

서정원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나 이내 환하게 웃으며 아들을 안아 주었다.

"장하다, 우리 아들."

등을 자상하게 두드려준다.

그저 순수하게 아들의 일을 기뻐해 준다.

"고생했어. 정말 잘했어, 우리 아들."

"……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았다.

뭔가 드라마틱하게, 멋있게, 어쨌든 정말로 대단하게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등을 두드려주는 이 손길이 그 모든 걸 날려 버렸다.

우정한의 주먹도, 소담의 매서운 칼날도 머리를 멍하게 만들지 못했는데.

이상하게 이 손길에 그렇게 되어 버린다.

그저, 부끄럽게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게 도진이 할 수 있는 최대였다.

"아버지께 전화는 드렸니?"

서정원이 도진을 놓아주며 물었다.

그 물음에 도진은 아, 하고 입을 벌렸다.

"오늘도 못 들어오시나 보네요."

"응. 그러니까 전화드리도록 해."

"네."

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찾았다. 그러는 동안 자책했다.

'먼저 전화를 드렸어야 했는데.'

전혀 생각지 못했다.

과거, 도진은 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할 일이 없다시피 했으니까.

사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일 자체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됐다고, 자식으로서 먼저 다가가고 무엇이든 이야기를 해 드리는 것만으로도 아버지는 기뻐하신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늦지 않았다.

그것을 아는 채로, 늦지 않은 시기로 돌아왔으니까.

전화를 들어 단축번호 1번을 꾸욱 눌렀다.

신호가 몇 번 가기도 전에 연결되었다.

-그래, 도진아.

"아버지. 저 숭무고에 합격했어요."

-응?

반응이 어머니와 완전히 똑같다. 거기에 미소지으며 도진은 말했다.

"저, 숭무고에 합격했어요. 이제 남은 건 수석을 차지하는 것 뿐인데…… 내기, 제가 이길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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