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더 이상 체력적 우위는 없다.
오히려 포위를 당해 불리한 상황에서 주정아가 효율적으로 용병술(用兵術), 그러니까 학생들을 움직여 두 사람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주정아의 기습에 실패하고 오히려 도진 연합이 분단된 상황.
기세가 꺾여 있던 학생들도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하고 있으니 안에서는 돌파구를 찾기가 어려워 보였다.
때문에 바깥에서, 도진이 길을 열어줘야 하는데 오대용이 그것을 철저하게 항전하며 차단한다.
'이런 캐릭터였나?'
솔직히 제멋대로 열폭하는 찌질한 캐릭터로 보았다.
심지가 굳어 보이지도 않았고.
한데 지금 맞부딪치는 주먹과 눈빛, 정직하고 꾸준하게 수련한 듯한 초식들. 그리고 실력에서 밀리고 있음에도 악착같이 달라붙는 근성이 지금껏 보여주었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팃!
시선을 정확히 읽어내고 조금 더 내공을 담아 이번엔 정직하게 직선으로 뻗은 주먹을 빗겨내는 데 성공했다.
오른 주먹을 왼팔로 빗겨내며 한 걸음 더 들어간다.
간격을 좁힘과 동시에 내딛은 발에서 발생한 힘을 온몸의 탄력을 이용해 오른손에 집중, 허리를 틀어 빗겨낸 오대용의 주먹을 더 크게 쳐내 자세를 무너뜨리며 오른손을 내질렀다.
이대로 주먹을 내지르면 치명상이 될 수 있기에 손을 펴 복부를 타격했다.
뻐억!
"……!"
오대용은 그것을 다리를 들어 정강이로 받아냈다.
상당한 타격. 그러나 리타이어에 이를 만큼의 충격은 아니었다.
균형을 잃고 뒤로 나뒹군 오대용은 그러나 지체없이 일어나 다시 덤벼들었다.
낮게 땅을 달리며 다리를 걸어온다.
도진은 그 선을 완전하게 읽어내고 오른발을 한 걸음 뒤로 물리며 왼발을 드는 것으로 깔끔히 무력화했다.
이어 들었던 왼발을 크게 뻗어 거리를 좁히면서 동시에 오른발로 낮은 위치에 있는 오대용의 옆구리를 노렸다.
회피와 동시에 이루어진 번개같은 공격.
오대용은 그것을 피할 수 없었기에 왼팔을 옆구리에 딱 붙여서 버텨냈다.
뻐억!
상당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리타이어에 이를 정도의 충격이 아니었기에 오대용은 탈락하지 않았고 다시 몸을 일으켜서 덤벼들었다.
'…….'
도진은 조금 묘한 기분이었다.
주인공이 제멋대로 오해하고선 찾아가 싸움도 못하면서 덤벼들다 흠씬 두들겨 맞는 어떤 드라마나 소설 속 장면이 오버랩 되는 듯했다.
보통 그런 데선 맞는 쪽이 등장인물인데 때리는 쪽의 역할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이것이 배틀로얄이 아니었다면 진작 승부가 났을 싸움이다.
하지만 배틀로얄이기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리타이어 조건인 '일정 이상의 피해 수치'란 누적치가 아니라 기준 이상의 수치를 뜻한다.
그러므로 방어만 잘하면 좀비마냥 덤비는 것도 가능했는데, 당연히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사람인 이상 맞으면 아프고 아픈 것을 누구나 꺼리고 두려워한다.
한데 오대용은 그것을 감내하며 악착같이 도진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나올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이런 흐름이 계속되면 결국 소담과 우정한이 먼저 지치게 된다.
도진과 오대용이 그렇듯 저쪽도 배틀로얄이기에 소담과 우정한이 바로 리타이어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버틴다 해도 결국 체력 때문에 한계가 찾아온다.
오대용을 리타이어시킬 즈음이면, 아니 그 전에 소담과 우정한의 체력이 다해 리타이어당할 것이다.
활로를 찾아야만 한다.
그래서 도진은 다시 한 번 뻗어온 주먹을 반격하지 않고 그대로 막아냈다.
뻐억!
"……?!"
갑작스런 상황에 오대용은 놀라 틈을 드러냈고, 그 틈을 이용해 도진은 뒤로 부웅 날아가 버렸다.
손해를 감수하고 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이런!"
그것을 본 학생 몇 명이 눈을 크게 떴고 주정아가 다급히 입술을 떼려 했지만 도진이 조금 더 빨랐다.
퍼억!
"으헉!"
틈이 크게 드러나는, 그러나 기습이라 누구도 그 틈을 노릴 수 없는 날아차기로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던 학생 한 명을 날려 버렸다.
쿠당탕!
"헉!"
한 명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주위의 대형이 무너졌다.
소담과 우정한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껴두었던 체력을 불태워 포위망을 무너뜨려 나갔다.
"이쪽으로 모여!"
주정아가 목이 터져라 외치며 포위망을 수습하고 오대용이 다시 맹렬한 기세로 도진을 붙잡았지만 도진과 소담, 우정한도 잡은 기세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 처절한 싸움 끝에, 승리한 것은 도진 연합이었다.
도진은 결코 오대용에게 붙잡혀 주지 않으며 포위망을 흔들었고 소담과 우정한은 그 흔들리는 포위망의 틈을 노려 하나씩 제압해 나갔다.
차라리 단독으로 싸웠다면 이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엔 오히려 함께 싸우느라 제 역량을 다 발휘하지 못했다.
주정아가 어떻게든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앞으로 나섰으나 그것이 치명적인 패인이 되었다.
도진은 물론이요 소담과 우정한까지 손해를 감수하고 주정아 한 명을 집중 공격해 리타이어시켜 버린 것이다.
그렇게 머리를 잃은 오대용 연합은 지리멸렬하여 패배했다.
"……."
다른 학생들이 모두 리타이어하고 오대용만이 남아 도진과 마주했다.
오대용은 이 상황이 되어서도 도진에게 주먹을 뻗었지만 이미 체력도 내공도 남아 있지 않은 주먹은 도진에게 닿을 수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도진은 그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맞댔다.
그리고 말했다.
"솔직히 다시 봤어."
"……."
"너, 생각보다 근성 있는 놈이네?"
"……!"
오대용의 흐릿한 눈동자가 흔들렸다.
도진은 피식 웃으며 주먹에 힘을 주었고, 힘이 다한 오대용은 대자로 엎어져 리타이어 판정을 받았다.
그렇게, 배틀로얄의 탑 3가 정해졌다.
* * * *
본 시험 1조에는 이제 도진과 소담, 우정한만이 남았다.
도진 연합의 승리.
그러나 본 시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배틀로얄의 규칙은 한 명만 남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었으니까.
싸우고 싶지 않더라도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계속해야만 하도록 시스템도 갖춰져 있었다.
이렇게 셋만 남았을 때에 대한 협의를 도진과 소담, 우정한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체력을 회복하고선 싸울 태세를 갖췄다.
-그렇지. 무인이라면 이래야지.
위지혁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무릇 무인이라면, 무림에 산다면 결정적인 순간 무공으로 결정지어야만 하는 것이다.
세 사람은 서로에게 호승심을 느끼고 있었고 맞부딪쳐 보고 싶어 했다.
그렇기에 말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대치하게 된 것이다.
시작은 소담이었다.
탓!
특유의 바람을 탄 선녀 같은 보법으로 우정한에게 쇄도하며 특수재질의 목검을 내뻗었다.
날은 세워져 있지 않지만 아주 단단해 제대로 맞으면 대번에 리타이어당할 수도 있는 공격.
거기에 우정한은 깊이 뿌리내린 거목(巨木)처럼 대응했다.
자리를 거의 옮기지 않았다.
그러나 온몸의 근육과 뼈, 그리고 내공이 부드럽게 흐르며 소담의 공격을 받아내고 또 흘려냈다.
보통 권각술을 익힌 학생들이 착용하는 손보호대 등을 신청하지 않았던 게 자만이 아니었음이 증명되고 있었다.
-호오,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의 편린이나마 깃들어 있구나.
위지혁은 우정한의 모습에 그렇게 말했다.
금강부동신법.
소림칠십이절예(少林七十二絶藝) 중 하나. 흔히 정중동(靜中動), 동중정(動中靜)이라 표현되는 바로 그 무공이다.
뿌리깊은 고목처럼 움직이지 않는 듯 보이나 그 안에서 깊은 묘리의 움직임으로 상대의 공격을 바닥 모를 우물처럼 흩어 버리는 극상승무공.
지금 우정한의 수준을 거기에 감히 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신비만큼은 어느 정도 체득한 모양이었다.
팍!
소담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선 갑자기 방향을 도진에게로 틀어 버렸다.
쉭!
뭉툭한 검끝이 바람을 가르며 도진에게 날아든다.
그것은 일직선으로 보였으나 결코 일직선이 아니었다.
도진이 그 검끝에서 시작되는 선을 이어보려 했으나 여러 갈래로 분산되고 끊어졌다.
공격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언제든지 상대의 대응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도진은 투로를 읽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안전하게 거리를 벌렸다.
쉭!
수리처럼 급격히 검끝을 꺾어 도진을 낚아채려는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도진이 반격했다.
아슬아슬한 회피라는 건 반격의 기회였기에 진각을 밟는 순간 도진은 이미 소담의 가녀린 몸을 사정거리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주먹을 뻗는 순간 마치 신기루처럼 소담은 멀어져 버렸다.
대신 어느새 우정한이 다가와 주먹을 뻗고 있었다.
'이런!'
기세가 고요했기에 빠르게 눈치채지 못했다.
한데 주먹을 뻗는 순간 마치 조용히 다가오는 해일처럼 거대한 기세를 담은 경력이 밀려오는 것이다.
마치 선(線)이 아닌 면(面)이 덮쳐오는 것만 같았다.
쾅!
도진은 천마기를 일으켜 거세게 대지를 박차 주먹에 깃든 경력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동시에 급격하게 방향을 꺾어 더욱 폭발적인 힘으로 우정한에게 돌진하며 주먹을 내뻗었다.
쿠웅!
육중한 충돌음이 깔린다.
우정한이 소담의 것과 달리 도진의 힘을 완벽하게 해소하지 못했기에 나는 소리였다.
'얕아.'
그러나 도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나름 최선을 다한 일격이었음에도 물주머니를 친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공이 깊고 중후하다.
거기에 육체는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움이 배어 있다.
천년 거목의 중후함과 갈대의 부드러움을 동시에 가진 것만 같다.
쉭!
소담은 제멋대로인 바람 같았다.
온몸을 스치는데 주먹을 쥐어도 결코 잡을 수 없다.
방향을 예측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점과 점을 잇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격을 읽지 못하고 임기응변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지켜보는 사람들에겐 세 사람이 대등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쉼없이 부딪치고 있는 도진은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제일 부족하구나.'
-어떠냐, 제자야.
-천재들의 벽은 높네요.
쓰게 웃었다.
도진이 위지혁과 장호에게 무공을 사사받은 지 한 달여밖에 되지 않았다.
심상세계에서의 시간을 감안해도 채 일 년에 미치지 못한다.
그렇게 보면 천재 중의 천재인 소담과 우정한이 어릴 적부터 쌓아온 경지와 맞먹길 바라는 건 욕심이다.
천재성을 타고 났음에도 게으름 부리지 않고 험난한 산을 피땀 흘려 오르고 또 올랐다.
도진이 매일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매진했던 것처럼 두 사람 또한 노력했을 것이다.
그 경지를 금세 따라잡길 바라는 게 욕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도진은 욕심을 내고 싶었다.
따라잡고, 이내는 넘어서고 싶었다.
무공이 좋아졌으니까.
좋아하는 것을 믿고, 더 많은 것을 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사는 생(生)의 미래를 바꿔 보고 싶었다.
-그래서, 스스로의 재능 없음에 절망했느냐?
-아뇨. 두근거리네요.
그래, 두근거린다.
간질간질한, 이 즐거움을 소리쳐 외치고 싶을 만큼.
깎아지른 절벽의 높음에 절망하는 게 아니라 망설임없이 도전한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오르기 위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멈추지 않고 위를 향할 수 있는 의지 뿐이다.
도진은 포효하는 천마기의 목줄을 완전히 놓아 버렸다.
그리고 결판이 났다.
* * * *
1조 본 시험 순위.
1등. 우정한.
2등. 서소담.
3등. 김도진.
4등. 주정아.
5등. 오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