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고개를 끄덕인 오군성은 계속해서 도진을 주시했다.
결국 도진은 두 자릿수의 학생들을 리타이어 시키는 데 성공했다.
배틀로얄 시작으로부터 세 시간만에 무려 열 명. 그야말로 파죽지세.
이 또한 화제가 될 기록이었다.
그러나 이 이상은 욕심이다.
규칙상 죽음에 이를 정도로 치명적인 공격이나 장애가 남을 공격은 금지되어 있었다.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제압하기가 더 힘이 드는 게 배틀로얄이다.
그것까지 감안하여 짧은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학생들을 제압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면서도 손대중을 해야 했던 도진과 소담, 우정한 또한 슬슬 체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장기전을 준비해야 했다.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두 명에서 네 명, 이윽고 전체로.
이쯤이면 셋의 행동이 다 퍼져 나갔을 것이다.
이제 학생들이 뭉치고 또 대비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억지로 한두 명 더 잡아봐야 오히려 손해다.
이제는 그 시간과 체력으로 최대 일주일동안 진행되는 배틀로얄의 장기전을 대비하여 파밍을 해야만 했다.
"어디로 갈 것 같은가?"
"중앙 호수로 갈 것입니다."
"그래, 그거야."
서로 연락할 수 없는 건 도진 연합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 계획없이, 보이는 대로 학생들을 사냥했던 셋이 합류하기로 약속한 장소는 다름 아닌 금화도의 중앙 호수였다.
풍족한 파밍이 가능하지만 탁 트인 평지인데다 푹 꺼진 지형이다.
게다가 주위에 언덕이 많아 고스란히 위치와 행동이 노출돼 웬만해선 파밍하기 힘든 장소.
그러나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세 사람의 사냥 때문에 모든 학생들이 뭉쳐서 극도로 몸을 사리고 있다.
지친 몸을 수습하고 파밍도 해야 하는데 습격도 경계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위험도가 높은 중앙 호수로 올 리가 만무한 것이다.
예상대로 도진 연합은 중앙 호수에서 모였다.
거기서 빠르게 물자를 파밍했다.
"저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며칠을 버틸 정도가 되지."
"예. 이제부터는 어느 쪽이 먼저 무너지느냐의 싸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배틀로얄에서의 파밍은 생존을 위한 물품들을 모으는 것이다.
먹을 물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정수 키트.
아직은 추운 밤을 좀 더 따듯하게 버틸 수 있게 해주는 담요, 핫팩 등.
생각보다 다채로운 물품들이 있다.
그러나 그 안에 딱 하나 치명적으로 부족한 게 있었으니 다름 아닌 '식량'이었다.
가장 풍족한 파밍 장소라는 중앙 호수에서도 식량은 세 사람이 아껴 먹어도 사흘을 버티기가 빠듯할 정도로 적었다.
한 명이 빵 한 조각씩 먹어야 사흘을 버틸 지경이었으니 그야말로 극한 상황이다.
제아무리 무림인이라도 먹지 못하면 힘을 낼 수 없다.
내공이 경지에 이른 무림인이라면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고 애초에 지금 상황에 직면한 것은 고수가 아니라 고등반 응시생들이다.
때문에 배틀로얄은 식량 확보 전쟁이기도 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학생들이기에 가장 먼저 합류하기 전 휴전까지 하고 파밍에 집중한 것이기도 했고.
그러니까 지금 짜인 판은 이러했다.
대번에 반수로 격감해 버린 도진 연합 이외의 학생들.
그리고 초반에 기세를 잡는 데 성공했으나 모두를 적으로 돌려 버린 도진 연합.
어느 쪽이 승기를 잡느냐다.
파밍 능력은 당연히 마흔 명 가까운 학생들이 압도적일 수밖에 없다.
물자를 더 많이 소모하지만 그만큼 더 많은 물자를 모을 수 있다.
도진 연합은 그런 학생들이 물자를 모을 수 없도록 더 많이 움직이며 수를 줄여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파밍까지 해야함은 물론이다.
도진 연합의 부담이 큰 상황이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무난하게 뛰어다녀서는 더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도진 연합의 실력이 더 뛰어나다고는 하나 극소수였다.
실력의 격차가 연합이 뭉쳐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크지도 않다.
이런 상황에서 어차피 모두가 적이 될 거라면 차라리 초반에 강행군하여 뭉치기 전에 수를 줄여놓는 게 무조건 이득이었다.
당장 수가 절반으로 급감한 다른 연합들은 행동 범위부터가 제한되어 버렸다.
습격에 대비하며 파밍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를 구성할 인원부터가 반토막 났으니 말이다.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
"최소한의 휴식과 식사를 취한 뒤 게릴라를 펼치며 파밍을 병행하겠습니다. 수를 줄이면서 조금이라도 더 자원을 확보해야만 승산이 올라갑니다."
"그렇지. 나도 힘들지만 상대는 더 힘들거든. 지금 더 공격적으로 나가야만 해."
배틀로얄의 파밍은 제로섬 게임이다.
특히 식량이 한정되어 있기에 그것을 먼저 차지하면 다른 쪽은 무조건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
그렇게 식량을 차지하며 더 공격적으로 나가면 상대는 더더욱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식사와 휴식을 최소한으로 하면서 재정비하고 더욱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한다.
오군성은 도진이 그런 판단을 내리길 기대했다.
그리고 그런 판단을 내릴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지금 보고 있는 어린 사자는 이미 사냥을 할 줄 아는 맹수였으니까.
"음?"
"……!!"
하지만, 그 기대는 빗나갔다.
도진 연합은 중앙 호수의 파밍을 끝낸 뒤 수풀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고 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아껴 먹어야 하는 파밍 식량이 아니었다.
그것은…… 식탁보에 싸여 있던 치킨, 피자 등이었다.
이곳 금화도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음식.
다름 아닌 크래들 오브 블루 웨일에서 챙겨온 음식이었다.
"허, 허허……."
오군성은 예상을 벗어난 상황에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준 도진 연합의 행동에 기꺼워하는 것이었다.
"이거, 오히려 한 방 먹었군."
크래들 오브 블루 웨일에서의 식사 시간은 송출되지 않았다.
그것은 시험 전의 '사생활'이었으니까.
제아무리 송출 동의를 했다 해도 무조건적으로 모든 상황을 송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오군성은 김도진과 서소담이 식사 시간에 음식들을 챙기는 걸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예측하지 못한 게 정당화 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식량을 구하기 힘든 곳으로 가는데 풍족하게 준비된 음식들을 챙기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크루즈까지 동원하여 풍성한 식사를 제공한 게 처음이어서 그렇지 전례가 있었다면 오히려 이것은 기본적인 상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예상하지 못한 건, 다른 학생들이 그러지 못했던 건 '고정 관념' 때문이었다.
풍족하게 살아온 학생들이 품위 없게, 쪽팔리게 주섬주섬 음식을 포장한다는 건 애초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만 보아오고 그보다 더 풍족한 환경에 있던 오군성 또한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그래서 이렇게 다른 학생들과 달리 잃어버리지 않은 캐리어에 음식을 챙긴 김도진과 서소담의 행동을 예측하지 못했고 그것이 기꺼웠다.
'결국 나도 아직 탈각(脫却)은 멀었단 소리지.'
생각지 못한 곳에서 깨달음의 실마리를 얻었다.
사자의 시선이 도진에게 조금 더 흥미를 품게 되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판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 * * *
"금화도에서는 식량을 얻기가 힘들대."
"그래? 그럼 이거 좀 싸가면 좋을 거 같은데?"
"……."
소담의 말에 도진은 알뜰살뜰하게 음식들을 챙겨 백팩에 한계까지 구겨 넣었다.
소담 또한 빼지 않고 함께 했다.
우정한은 조금 당황스러웠으나 자신도 해야 할 것만 같아 소극적으로 가담했다.
몇몇은 그런 세 사람의 모습에 경멸의 시선을 보냈었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이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침착하게 습격에 대응했던 도진과 소담은 짐을 고스란히 챙겨 금화도에 도착했다.
우정한 또한 남을 도와줄 만큼 상황에 대처를 잘 했기에 짐을 잃지 않았다.
규칙대로 그 짐은 소지한 채 배틀로얄에 참가할 수 있었다.
"제대로 싸울 수 있는 건 몇 명 안 되는 거 같은데 초반에 최대한 수를 줄이는 게 좋을 거 같아. 어차피 다들 몸 추스르고 모이면 우릴 가장 먼저 노릴 테니까."
"그렇게 해 볼까?"
여기서 소담의 의견을 또 한 번 받아들여 도진은 금화도를 종횡무진 누비며 장호에게 배운 것들을 적극 활용해 보았다.
작은 돌을 던져 시선을 돌린 뒤 기습.
숨어 있다 등 뒤 노리기.
리타이어시키고 얻은 물자를 미끼로 두고 지나가던 학생이 거기에 시선이 팔리면 기습 등.
창작물에서는 너무나 간단하고 흔하게 나와 이제는 당하는 게 바보처럼 보일 정도의 수법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관찰자의 입장에서, 전지적으로 보고 있기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실제로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당하면 대부분은 속수무책이다.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지.
장호의 말대로였다.
덕분에 도진은 무려 열 명이나 되는 학생을 리타이어 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우정한이 일곱 명, 소담이 아홉 명이었으니 도진이 가장 활약한 것이다.
그렇게 수를 줄이고 슬슬 지쳐갈 때가 되자 중앙 호수로 향했다.
거기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연락할 수단도 없고 시계도 없었지만 소담과 우정한도 비슷한 때에 중앙 호수로 왔다.
"여기가 가장 파밍이 잘 되는 곳이래."
이번에 소담이 말해준 정보는 도진 또한 지나가는 말로 들었던 것이었다.
그 정보가 거짓이 아니었던지 그 귀하다는 정수 키트부터 시작해 꽤 괜찮은 물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다만 미리 들었던 대로 식량은 정말 쥐꼬리만큼이었다.
셋은 파밍을 끝내고 중앙 호수를 벗어나 적당한 곳에서 자리를 잡은 뒤 백팩에 바리바리 싸 왔던 음식들을 꺼내 먹었다.
파밍한 것들은 초코바 등 보관이 용이했지만 가져온 것들은 빨리 먹을 수록 좋았기에 이쪽을 먼저 꺼낸 것이다.
식어 있긴 했지만 충분히 열량을 확보하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공간 한계상 물은 생수 작은 것 두 통을 챙긴 게 전부였지만 정수 키트를 얻었으니 이쪽도 문제가 해결됐다.
'음…….'
상황이 이렇게 되니 도진의 머릿속에서 어떤 계산이 착착 진행되었고, 답이 나오자 소담과 우정한에게 말했다.
"우리 그냥 파밍 안해도 될 거 같은데. 뭉쳐 다니면서 계속 여포 메타 하는 건 어때?"
배틀로얄이 장기전으로 진행되는 건 어느 한 명이나 한 무리가 압도적인 우세를 바탕으로 계속 몰아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가능한 '각'이 섰다고 도진은 판단했다.
상대는 여전히 파밍과 체력 회복에 급급한 상황인데 도진과 소담, 우정한은 파밍하지 않고도 며칠을 버틸 수 있는 식량이 확보되었고 체력적으로도 실력적으로도 우위다.
압도적인 우세를 유지하면서 계속 몰아치는 게 가능하단 말이다.
심지어 그렇게 학생들을 리타이어시키면 가지고 있던 물자를 빼앗는 것마저 가능하니 사실상 파밍할 필요가 없어졌다.
소담은 도진의 제안에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결론에 이른 것이었다.
상대가 아직 만전이 아니고 파밍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뭉치지 못하는 상황.
분명한 각이었다.
"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뜻이 일치하자 망설일 것 없이 세 사람은 행동을 개시했다.
손대중을 해야 했기에 뭉쳐다니는 학생들을 압도할 수 없었던 것도 단독 행동을 할 때의 이야기였다.
셋이 함께 움직이며 조를 나눠 파밍하던 학생들을 습격하자 또 한 번 리타이어가 속출했다.
설마 파밍도 안하고 오늘만 살고 말 것처럼 또 습격할 거라곤 예상치 못했던 게 패인이었다.
"내가 미끼가 될게."
"이쪽으로 올 거 같으니까 함정 설치하자."
여기엔 또 한 번 도진이 장호에게 배운 수법들이 눈부신 효과를 발휘했다.
"대단하시군요, 시주님."
"우리 스승님이 좀 대단하시긴 해."
감탄하는 우정한에게 도진은 씨익 웃어 보였다.
그 뒤에는 함정에 걸려 두 발목이 묶인 채 대롱대롱 매달린, 리타이어 당한 학생이 있었다.
정수 키트를 미끼로 한 함정에 걸려 대번에 리타이어 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배틀로얄 시작으로부터 이제 겨우 반나절.
어느새 1조는 스무 명 정도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사상 초유의 초고속 진행. 정도수를 포함한 교사들마저 세 사람의 거침없는 사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1/3 정도는 허무하게 탈락하지 않을까 했는데 아예 절반 이상이 속수무책으로 쓸려나가 버린 것이다.
여러가지 요소가 잘 맞물리긴 했으나 그것을 가능케 한 근본적인 요소는 세 사람의 능력이었다.
이대로 세 사람의 승리가 확정될 것만 같은 상황.
그러나 거기에 하나의 변수가 있었다.
스슷-
서벅.
휴식을 취하던 세 사람의 주위를 이십여 명의 학생들이 둘러쌌다.
남아 있던 학생들이 모두 모여 세 사람을 둘러싼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오대용이 있었다.
"……."
이글거리는 오대용의 시선이 도진과 맞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