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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34화 (34/741)

34화

극한 상황을 겪는 인간의 체력과 정신력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증발해 버린다.

적당한 속도의 러닝 머신을 몇 시간이고 달릴 수 있다 해도 100미터 전력 질주 경기 한 번에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숭무고 본 시험인 배틀로얄을 치르게 된 1조 79명의 학생들이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숭무고에 지원할 정도로 뛰어난 무공 실력을 지니고 있었고 그에 걸맞는 체력 또한 갖추었으나 육체와 정신 양쪽으로 극한의 상황에 내몰리며 완전히 고갈되어 버렸다.

그 상태로 쉬지도 못하고 짐마저 잃어 버린 채 몸만 터덜터덜 인솔자를 따라 지정된 장소에 배치된다.

그런 학생들의 모습을, 금화도에 정박한 호화 크루즈 골든 오아시스의 프라이빗 룸에서 지켜보는 남자가 있었다.

세월을 겹겹히 쌓은 듯 위엄 있는 분위기를 두르고 있는 남자는 적지 않게 나이를 먹은 듯 느껴진다.

그러나 검고 윤기 있는 머리카락, 거대한 맹수를 연상케하는 골격과 가득 들어찬 근육이 그런 인상과 부조화를 이루었다.

사자군(獅子君) 오군성.

대한민국 재계 서열 5위의 대기업을 일구어낸 시대의, 그리고 무림의 거인이 바로 이 남자였다.

상상도 못할 가격의 고급 리클라이너에 몸을 묻고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음에도 그 별호처럼 사자의 기세가 어려 있어 웬만한 사람은 긴장으로 몸이 굳어 버릴 듯하다.

그 오군성이 강렬한 정기가 어린 시선을 곁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검은 양복의 남자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앞뒤 다 자른 질문. 그러나 그런 질문을 10년 넘도록 받아 온 남자는 실수없이 그 의도를 파악하여 대답할 수 있었다.

"시작과 동시에 세 시간.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상위 열 명이 정해질 듯합니다."

"그래. 지금 가장 유력한 후보는?"

"김도진, 서소담, 우정한, 그리고 대용이입니다."

"그래?"

"예. 그리고 김도진과 서소담이 어떻게 움직이냐에 따라 판이 완전히 달라질 정도로 둘이 큰 변수입니다."

대부분이 극도로 컨디션이 떨어져 있는 가운데 두 사람만이 거의 평상시와 다름없는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물며 둘은 안 그래도 강력한 본 시험의 우승 후보였다.

검은 양복의 남자, 오정우는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분석은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오군성 또한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니까.

이것은 그저 '심심풀이 평가'다.

자신의 곁에 있는 아랫사람이 과연 그만한 자격이 있나 심심풀이로 시험해 보는 것.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서는 심심풀이지만 평가받는 입장에서는 목숨이 걸린 시험이다.

"그리고?"

오정우는 긴장으로 몸이, 머리가 굳지 않도록 신경쓰며 답을 이어 나갔다.

"변수는 대용이와 정아입니다. 대용이와 정아가 얼마나 빠르게 세력을 수습하느냐, 그리고 모을 수 있냐에 따라 판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결과에 따라 대용이가 마지막 다섯 명 안에 들 수도 있으리라 예상됩니다."

"그래, 대용이가 5위란 말이지. 제법이구만."

"……."

오군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다시 화면으로 돌렸다.

오정우는 조금은 긴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평가 기준에 모자라지 않은 수준으로 판을 읽어내고 대답해냈다.

오군성은 자비가 없는 사람이었다.

사자는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뜨려 살아남는 놈만 기른다는 잘못 알려진 상식이 그대로 적용되는 인물.

자수성가하여 오성을 일궈낸 이 거인은 타고난 승부사이며 그 별호처럼 거침이 없고 맹수 같은 성정을 지녔다.

그리고 그 자신이 그런 인물이기에 눈에 차지 않으면 심지어 혈육이라 해도 가차없이 내치는 사람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첫째 아들의 3남, 손자인 오대용이다.

본래의 성격대로라면 오군성은 자신의 혈육이 겨우 5위 따위를 다투는 걸 용납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재계 서열 5위에 결코 만족하지 않고 60이 넘는 나이임에도 정력적으로,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 오군성이다.

1등만을 바라보고 달리는 오성의 전쟁 군주.

그런 오군성이 '손자가 잘하면 5위권에 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란 말에 제법이라고 평한 건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쁘지 않은 자질을 타고나 숭무고 본 시험까지 온 오대용.

평범한 환경이었다면 충분히 천재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대용이 평가받아야 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오군성이었기에 '기대할 가치조차 없는 손자'란 낙인이 찍히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적당히 하면 칭찬을 해 준다.

객관적으로 봐서 칭찬을 해 줄 정도는 되니까.

마치 남의 아이를 대하듯 그렇게, 무성의하게 칭찬해 준다.

그리고 이런 취급을 오대용은 할아버지 오군성만이 아닌 아버지, 오주형에게도 받고 있었다.

직계인 오대용에게도 그럴진데 '방계'인 오정우는 말할 것도 없다.

악착같이 기어올라 온 이 출세를 위한 자리, 수행 비서란 직함은 실수 한 번으로 손 안의 모래알처럼 사라질 만큼 위태로웠다.

오정우는 긴장을 풀지 않으며 정면의 거대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언제 또 심심풀이로 사자 같은 회장님의 시선을 받게 될지 모르니까.

필사적으로 판을 읽고 있어야 했다.

모니터 너머에서는 배치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배틀로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모두 패드가 달린 전신 타이즈를 안에 입었는데, 다름 아닌 '피해 측정기'였다.

제아무리 배틀로얄이라지만 입학 시험에서 정말로 죽고 죽이거나 치명상을 입히도록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도입된 물건으로, 공격을 당했을 경우 그 피해를 측정하여 운영 본부로 보내도록 세팅되어 있었다.

여기서 일정 이상의 피해 수치가 기록되면 탈락이다.

배치를 포함하여 모든 준비가 끝나자 섬 전체에 거대한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드디어 배틀로얄의 시작이었다.

"자네가 김도진, 서소담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나?"

오군성이 물었다.

다행히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준비한 내용이었기에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세력이 뭉치기 전에 최대한 전장을 누비며 과감하게 인원수를 줄이겠습니다."

"좋은 방법이지."

오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도진은 섬의 10시 끄트머리, 서소담은 6시 끄트머리, 우정한이 1시 끄트머리에 배치되었다.

당연히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배치다.

셋만이 아니라 연합을 이룬 학생들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김도진과 서소담이 취할 수 있는 좋은 수단 중 하나가 각개격파였다.

"지금이 가장 약한 타이밍이거든."

지금 시대를 사는 아이들은 휴대폰 없는 삶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한데 지금 응시생들에게는 휴대폰은커녕 전자 기기 자체가 없다.

흩어진 아이들은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 게 불가능한 것이다.

때문에 본래는 섬에 오기 전 미리 모여 그에 대한 대처를 논의해야만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제대로 된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습격이 있었으니까.

사전 협의로는 한계가 있는 것이, 지형은 매년 바뀌고 그것은 시험 당일날에나 숙지할 수 있었다.

덕분에 대처 능력이 떨어지는 연합은 말 그대로 아무런 방안도 세우지 못하고 찢어져 버렸고 그나마 머리가 돌아가는 학생들이 소속되어 있는 연합도 만날 장소나 겨우 정하는 게 한계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완전히 방전이 되어 버린 '맨몸'으로 찢어져 버린 상황.

바로 지금이, 체력을 온존한 김도진과 서소담이 가장 부담없이 날뛸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김도진과 서소담, 우정한이 오정우의 대답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법 배짱이 있어."

오군성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김도진 연합이 딱 그의 취향에 맞는 선택을 했다.

세 사람은 이미 흩어지기 전에 약속을 했는지 생존을 위한 물품을 찾는 게 아니라 거침없이 금화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서소담이 바람처럼 수풀을 가로질러 터덜터덜 걷고 있던 학생을 덮쳤다.

합류하기 전 도움이 될 만한 물품을 최대한 파밍해 가려는 욕심에 사주경계를 소홀히 했던 학생은 등, 다리, 옆구리를 가격당해 허망하게 탈락해 버렸다.

-죄송합니다, 시주.

우정한도 빼지 않았다.

불자(佛子)가 아닌 무인으로서 임해야 할 시험. 그렇기에 망설임없이 지쳐있던 학생을 몰아붙여 리타이어 시켰다.

김도진이나 서소담에 비해 체력은 떨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벌써부터 후기지수라 불리는 소림 속가 제자.

거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오군성은 그 둘보다 김도진에 더 시선이 갔다.

-틱.

-뭐, 뭐야?

-매복인가?

모니터에 비치는 건 두 명의 학생이다.

서로 다른 연합이지만 지금 싸우는 건 자멸밖에 되지 않으니 각자의 연합을 찾을 때까지 협력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뒤쪽에서 부자연스런 소리가 나 경계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파악!

-으헉!!

측면의 수풀 아래 숨어 있던 도진이 번개같이 튀어 나와 한 명의 학생을 덮쳤다.

-미친!

경악한 다른 한 명이 펄쩍 뛰어 거리를 벌렸다.

"멍청하군."

오군성은 그 행동을 그렇게 평가했고 심사위원들 또한 같은 생각으로 대폭 점수를 감점했다.

백업을 해야 할 상황에서 놀라 사태 파악조차 않고 거리부터 벌리다니.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오히려 막막해질 정도로 멍청한 짓이었다.

그렇게 백업을 받지 못한, 기습을 당한 학생은 무기력하게 리타이어를 당했고 도진은 이어서 폭풍같이 거리를 벌렸던 학생까지 몰아붙여 대번에 제압했다.

둘을 리타이어 시킨 도진은 멈추지 않고 종횡무진했고, 비슷한 방식으로 무려 아홉 명을 잡는 기염을 토했다.

"과감하지만 경솔하지 않고 강하지만 돌아갈 줄 알아. 타고난 사냥꾼이로군."

도진의 실력은 분명히 뛰어나다.

그에 비해 경쟁자들은 그로기 상태. 정면에서 싸워도 충분할 텐데 도진은 그러지 않았다.

함정을 팠다.

작은 돌을 던져 시선을 끈 뒤 기습을 하거나 매복을 하기도 했다.

그것은 아주 기초적인 수법들이었지만 완전히 지치고 경험이 부족한 중학생들을 상대로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상황을 파악하고 최대의 효율을 추구했다.

둘 다 잡을 수 있다 해도 한쪽의 저항이 심하거나 상대하기 번거로운 타입이라면 미련없이 물러나 버렸다.

서소담과 우정한은 도진 이상으로 '무인답게' 상대를 압도하고 또 제압했으나 오군성은 오히려 도진을 더욱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실력 좋은 무인을 오군성은 평생 질리도록 보아 왔다.

하지만 노련한 사냥꾼은 많이 보지 못했다.

바로 그런 노련한 사냥꾼이자 맹수로 자랄 가능성이 보이는 학생이 지금 눈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저 김도진이란 아이, 금화의 아이가 탐내고 있다고 하던가?"

"예. 한유아가 관심을 갖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우리 쪽으로 데려오도록 한 번 해보지."

"알겠습니다. 계획서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금화. 그의 생전에 기필코 넘어야 할 적수.

그런 금화의 아이가 탐낸다고 하니 더욱 도진이 탐스러워 보였다.

오성의 사자.

오군성이 도진에게 욕심을 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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