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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31화 (31/741)
  • 31화

    세상을 살면서 겪게 되는 일들 중 일부는, 혹은 다수는 그 원인을 모르는 채 넘어가게 된다.

    도진에게 있어 그렇게 원인을 모른 채 받아들여야 했던 일들 중 하나는 바로 문월고 합격이었다.

    문월중의 낙제생.

    뒤에서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무공에서 뒤쳐지던 도진이 놀랍게도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지원했던 문월고등학교에 합격해 버렸던 것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공부는 상위권이었으나 무림학교에 있어서 그것은 평가의 30%밖에 되지 않는 항목이었다.

    중요한 건 무공. 한데 그 무공에서 철저하게 부족했던 도진이 합격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집안의 환경을 외면하고 선택을 미루기 위해 도피처로 선택했던 고등반 진학에 성공한 도진은 그러나, 더 큰 지옥을 맛봐야만 했다.

    고등반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영역이었다.

    실력의 격차는 더 아득해졌고 다 아는 얼굴들이었기에 왕따 신세도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나 철중권을 전수했던 스승이 교사로 있었던 강치환은 더욱 기세등등해져 무리의 중심이 되었고 도진을 지독히도 괴롭혔었다.

    도진은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런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우정한에게 시선이 갔던 것은.

    모두가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혼자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것이 그 유명한 소림 속가 제자이자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후기지수로 인정 받은 중학생이라 해도 마음이 쓰이고 마는 것이다.

    그 도진의 시선에 우정한이 고개를 들었고 둘의 눈이 마주쳤다.

    -음. 불제자로구나.

    -크게 될 녀석이군요.

    도진의 눈을 통해 본 위지혁과 장호는 그렇게 우정한을 평가했다.

    위지혁은 우정한을 그저 불제자라 간단히 말했으나 그것은 어떻게 보면 극찬이었다.

    자격이 없는 무승을 위지혁은 땡중이라 불렀으니 말이다.

    불제자라고 천마 위지혁이 인정할 정도였으니 장호의 말대로 우정한은 크게 될 재목이었다.

    도진은 두 사람만큼의 안목은 없었으나 우정한이 '좋은 사람'이란 것만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그 창 너머로 보이는 우정한의 심성은 지극히 맑고 깨끗했다.

    그래서 호감이 갔고, 소담과 시선을 주고받은 뒤 다가간 것이었다.

    "안녕. 밥 같이 먹지 않을래?"

    자연스럽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평안한 분위기로 식사를 하던 우정한은 두 사람을 보며 미소 지었다.

    "시주분들께서 괜찮으시다면 얼마든지요."

    그것은 무협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도진도 소담도 그것을 어색해하지 않았다.

    이는 '전통 있는 무림 문파'가 형식이나 예법을 특히 중시하는 데 기인했다.

    특히 그것이 소림사 정도 되면 더 이상 없을 정도로 엄격하다.

    사석이라면 몰라도 공적인 자리에서 문파의 제자들은 정해진 형식이나 예법을 철저히 지켜야 했는데, 그 때문에 우정한은 그런 말투를 취한 것이다.

    "고마워."

    여상스럽게 대답하며 도진은 소담과 함께 테이블에 앉았다.

    "속가 제자는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알고 있는데 샐러드만 먹으면 배고프지 않아?"

    소담의 물음에 우정한은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무래도 정순한 육체와 심성을 위해서는 화기(火氣)를 다스릴 필요가 있으니까요. 더욱, 저는 아직 미숙하기에 화기를 가까이하기엔 이릅니다."

    "헤에, 그렇구나. 그래도 그 근육 유지하려면 고기 먹어줘야 될 것 같은데."

    "그건 편견이야, 소담아. 소를 봐. 풀만 먹고도 근육 빵빵이잖아."

    "와, 듣고보니 그렇네."

    "아, 정한이 니가 소라는 건 아니야. 오해하지 말아 줘."

    "하하. 오해하지 않습니다."

    대화를 나누다보니 우정한이 더욱 마음에 드는 도진이었다.

    특별한 무언가는 없었지만 그래서 더욱 여상스런 대화 속에서 우정한이 좋은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전생에서도 우정한에 대한 평가는 이상적인 소림의 무승(武僧)이었다.

    "음, 정한아. 우리 한 팀 하지 않을래?"

    "팀이라면, 연합을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응. 난 니가 마음에 드는데 넌 어때?"

    도진의 돌직구에 우정한은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미소지었다.

    "저도 좋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우정한 또한 혼자보단 함께 하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경계당하는 게 씁쓸했던 차였다.

    그런 상황에서 도진과 소담이 먼저 다가와 손을 건네니 절로 마음이 넉넉해지는 듯했다.

    무림인이라 해도 아직 중학생.

    이 나이 또래의 아이들은 먼저 손을 건네면 대부분은 그 손을 잡아주기 마련이다.

    그렇게 이번 관문 시험부터 시작하여 경계 대상 1순위부터 3순위까지가 연합을 하게 되었다.

    '귀찮게 됐어.'

    오대용은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한 손이 열 손을 막지 못한다는 유명한 격언은 진리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그것도 한 손과 열 손의 격차가 크지 않을 때의 이야기다.

    그런 까다로운 한 손이 셋으로 늘었으니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 골치가 아파왔다.

    '이렇게 되면…….'

    슬쩍 시선을 주변으로 돌렸다.

    같은 생각을 한 학생들끼리 시선이 마주하며 은근한 신호가 오고갔다.

    연합끼리의 연합.

    그것이 암묵적으로 합의되는 순간이었다.

    그 은근한 기류를 도진은 읽어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도진 또한 생각이 있었고 소담과 우정한이 함께 한다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장호에게 특훈도 받았고.

    -상대에 대해 잘 알고 있을수록 승률은 올라간다.

    -네, 장호 스승님.

    그리고 장호의 조언에 따라 연합의 면면을 살피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시선이 간 것은 역시 노골적으로 도진을 적대하던 키 큰 남학생이다.

    무공을 익힌 아이들은 워낙 발육이 좋다보니 벌써부터 키가 180이 넘은 학생이었다.

    이제 서바이벌을 앞두었다곤 보기 힘든 명품으로 꽉 채워진 복장이 특징이다.

    '아니, 오히려 저게 버릴 옷일지도 모르지.'

    숭무고에 지원한 학생들은 대부분이 좋은 집안을 배경으로 두고 있다.

    그리고 저렇게 무공이 특출나지 않은데 무리의 리더가 될 정도면 특히나 집안이 좋아야 할 테니 그렇게 추측한 도진이었다.

    열일곱 명.

    주변의 연합 중에선 가장 규모가 크고 평균적인 실력도 나쁘지 않다.

    그 연합의 얼굴들을 도진은 잘 봐 두었다.

    '저쪽은…… 저 셋이 중심인가.'

    이어서 두 번째로 큰 연합은 세 명을 중심으로 모인 듯했다.

    세 명의 실력이 유독 뛰어나고 구성원들의 실력 또한 높은 그룹이어서 첫 번째 그룹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 같았다.

    더욱 눈여겨 볼 것은, 그 세 명이 첫 번째 그룹의 리더로 보이는 남학생과도 연결점이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어쩌면 첫 번째 그룹과 두 번째 그룹은 보기엔 나뉘어 있지만 동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도진이었다.

    그 다음 연합에서는 곱상하게 생긴 남학생 한 명이 눈에 띄었다.

    길게 기른 머리와 평균보다 작은 키, 그리고 여리여리한 몸이 여장을 하면 잘 어울릴 것처럼 보이는 미소년이다.

    역시 같은 학교 출신의 학생들 사이에 강제로 끼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구도인데 묘하게 느껴지는 여유가 숨겨둔 한 수가 있는 것처럼 보여 신경이 쓰였다.

    저런 캐릭터가 방심하고 있을 때 일을 벌이곤 한다.

    그리고 다음 연합에서 도진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어?'

    -왜 그러냐, 제자야.

    도진의 꽤 놀란 기색이자 위지혁이 물었다.

    거기에 도진이 어느 여학생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답했다.

    -이은지입니다.

    -이은지? 응? 걔?

    -예. 스승님이 생각하시는 그 아이 맞습니다.

    이은지.

    전생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연예인 중 한 명으로 꼽히던 사람이었다.

    아이돌 가수로 데뷔했으나 방출당하고 몇 년의 공백이 있은 후 솔로로 재데뷔, 조금씩 인지도를 쌓아가다 어느 순간 포텐이 터져 압도적인 인기를 얻었다.

    꾸준히 롱런하며 연기에도 입문했고 노래로는 음원 깡패, 연기로는 흥행보증수표라 불리며 리빙 레전드였다.

    그렇게 노력으로 이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스토리를 좋아하는 도진이었기에 나이가 같았던 이은지에 관해 상당한 관심이 있었고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은지가 소속되었던 아이돌 그룹은 '엘리트 무림 소녀들' 컨셉이었다.

    그 컨셉을 위해 계약서에 숭무고 입학을 조건으로 했다.

    데뷔하고 1년. 이렇다 할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었지만 숭무고에 입학한다면 단번에 화젯거리가 되어 반등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절실했던 이은지를 포함한 네 명의 동갑내기 소녀들은 관문 시험을 합격하고 본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지금 도진이 보고 있는 소심해 보이는, 젖살이 남아 있는 소녀의 주위에 있는 기가 세 보이는 세 명의 소녀까지가 한 팀이다.

    훤칠한 키에 돋보이는 몸매, 기가 세 보이지만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세 사람 사이에 있는 이은지는 고양이 사이에 낀 작은 강아지 같다.

    그 이은지는 숭무고 입학에 유일하게 실패했다.

    네 사람이 포함된 연합에서 이은지를 희생양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은지는 본 시험에서 탈락했고 숭무고 입학에 실패했다.

    이후 위약금을 물고 몇 년이나 고생을 하면서도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재데뷔했다는 이야기다.

    '지금이니까 털어 놓을 수 있는 이야기인데, 정말로, 정말로 많이 힘들었어요. 누군가가 도와줬으면 싶었어요. 손을 내밀어 줬으면, 등을 받쳐줬으면, 비를 피할 수 있는 우산을 씌워줬으면 정말로 좋겠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었어요.'

    그 절절했던 이야기를 도진은 기억하고 있었다.

    -도와주고 싶은 거냐?

    -음, 그럴 상황이 된다면요.

    도진은 이은지 같은 사람이 좋았다.

    남녀 관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경에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성공하는 사람들과 그 이야기가 좋다는 말이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도와주자고 마음먹었다.

    혹여 개입해서 운명이 뒤틀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크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이은지 같은 사람은 결국 성공하게 되어 있다. 도진의 도움으로 인해 그것이 앞당겨질지언정 고꾸라지는 일은 없는 것이다.

    -그래, 민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인재를 가까이 둘 수 있다면 큰 힘이 되는 법이지. 좋은 생각이다.

    그렇게 서바이벌에서 마주하게 될 학생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작은 소요가 일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집행부의 한유아와 류대현이 들어온 것이었다.

    '음?'

    생각지 못했던 두 사람의 등장에 의아했던 도진이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집행부 소속이니 행사를 돕기 위해 나타날 수도 있겠다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나타난 두 사람에게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안녕하세요!"

    거하게 환대받는 두 사람은 선배다운 여유를 보여주었다.

    한데 도진이 보기에는 어째 폭룡, 류대현이 아파보였다.

    무림인이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폭룡님! 팬입니다!"

    "폭룡님!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진이 정확하게 본 것이었다.

    류대현은 연신 들려오는 '폭룡'이란 소리에 정신을 파괴하기 위한 진법에 갇힌 것처럼 속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아이 중2병…….'

    웬만해서야 '폭룡님'이라는 소리를 입에 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아직 중2병을 완치하지 못한 중학생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들은 오히려 그 '폭룡'이라는 별호가 너무 멋있다며, 눈을 반짝이기까지 하며 그것을 연호하는 것이다.

    옆의 한유아는 아예 바닥을 구르며 성대하게 웃고 있는 듯했다.

    실제로 그러지는 않았지만 눈을 통해 느껴지는 건 딱 그랬다.

    그것이 더 류대현을 부들거리게 만들었다.

    "안녕하세요, 누나."

    "어, 대용아."

    그렇게 모여든 학생들 중 오대용의 인사에 한유아가 웃으며 답했다.

    오대용은 그 인사를 주고 받은 것이 자랑스러웠던지 어깨를 넓게 펼쳤다.

    "집행부 일로 오신 건가요?"

    "응. 우리가 말단이니까 열심히 움직여야 되거든."

    장난스레 대답하는 한유아.

    그리고 몇 마디 더 나누고서는 자연스럽게 무리에서 벗어나 한곳으로 향했다.

    의도적으로 외면받고 있던 테이블, 다름 아닌 도진이 있는 테이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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