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크래들 오브 블루 웨일.
한국에서 가장 큰 크루즈.
이렇게만 보면 평범한 사람은 엄두도 못 낼 배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수천 명을 실을 수 있는 배에 그만큼의 인원을 싣고 자주 운항하려면 결코 럭셔리 정책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오히려 평범한 가족 여행을 원하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 지출을 감당할 수 있다면 탈 수 있을 수준의 가격대가 형성이 되어 있었다.
이런 크래들 오브 블루 웨일의 주력 상품은 다름 아닌 금화도 관광이다.
그 유명한 숭무고의 본 시험, 배틀로얄의 무대가 되는 금화도를 거쳐 '일상에서 벗어난 여행과 힐링'을 모토로 한 상품을 판매한다.
그렇게 수많이 금화도를 거쳐갔던 크래들 오브 블루 웨일이 오늘 밤만큼은 다른 목적의 승객들을 싣게 됐는데, 다름 아닌 금화도에서 숭무고 입학 본 시험을 치르게 될 학생들이었다.
응시생 236명에 관련자들을 포함하면 500명 남짓한 인원을 위해 크래들 오브 블루 웨일을 동원하는 건 과해 보이지만 이 또한 숭무고의 '위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크래들 오브 블루 웨일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응시생들을 옮겨준 뒤엔 다시 인천항으로 돌아와 이번엔 '관람객'들을 실어나른다.
이 관람객들은 프리패스권에 더해 프리미엄 서비스까지 구매한 사람들이다.
프리패스권을 산 사람들은 첫날 관문 시험부터 마지막 비무까지 관람이 가능한데 여기서 본 시험인 배틀로얄은 그 특성상 영상으로만 볼 수 있다.
한데 여기서 조금 더 욕심을 내 금화도 근처에서 현장감을 느끼며, 더 선명하고 큰 화질로 보길 원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만든 게 프리미엄 서비스다.
금화도 전용 부두에 정박한 크래들 오브 블루 웨일에서 관람객들은 현장감도 느끼며 실시간으로 본 시험을 감상하는 것이다.
이쪽이 크래들 오브 블루 웨일이 이 시기에 본래 하던 일이다.
혹자는 여기서 학생들의 시험을 이렇게 관광 상품으로 만들어도 되냐는 비판을 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생긴 수익은 더 퀄리티 높은 시험을 만드는 데 쓰인다.
무엇보다 숭무고는 시험을 치는 데 따로 응시생에게 돈을 받지 않는다.
더더욱, 이런 식으로 시험을 보여줌으로써 학생들은 별도의 수고 없이 자신을 널리 어필할 수도 있었다.
관람객 중에는 무림 업계의 관련자들 또한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무림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명성을 얻거나 기업의 관심을 끌어 스폰을 받을 수도 있었고 인기를 얻으면 관련 제품의 모델이 되는 것마저 가능했다.
때문에 오히려 학생들이 이런 식의 송출을 더욱 기꺼워하며 송출 동의서에 사인을 했다.
그런 배경이 있는 크래들 오브 블루 웨일 앞에는 지금 응시생들과 본 시험을 진행하는 숭무고의 관련자들, 그리고 교사들이 모여 있었다.
다만 기자들을 포함한 외부 인원들은 보이지 않았는데 혹시나 학생들에게 시험에 관한 정보를 건네줄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배틀로얄이라는 건 공개되어 있지만 그에 관한 세부 사항은 철저하게 비밀 엄수가 요구되었다.
그 연장 선상으로 모여 있는 학생들은 모든 전자 기기 사용이 엄금 되었으며 휴대폰 등을 제출해야 했다.
도진과 소담 역시도 철저하게 검사를 받고 휴대폰까지 제출한 뒤에야 학생들 사이로 합류할 수 있었다.
"역시 숭무고네. 스케일이 보통이 아니야."
"그러게. 설마 저거 타고 갈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수군거린다.
그만큼 크래들 오브 블루 웨일의 임팩트는 대단했다.
그동안의 시험에서는 금화도까지 적당한 배를 타고 갔었다. 한데 갑자기 이런 초대형 크루즈를 타고 가게 됐으니 학생들이 들뜨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 학생들 사이로 도진과 소담이 합류하자 시선들이 모였다.
장애물 달리기에서 신기록을 세운 도진과 존재만으로도 시선을 모으는 소담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 시선들은 곧 흩어졌는데, 단상에 이번 본 시험의 총책임자인 석호필이 올라섰기 때문이다.
철탑거권이라는 별호답게 거대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석호필이 학생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개략적인 내용은 안내 책자를 통해, 그리고 알려진 정보들을 통해 숙지했으리라 생각하고 생략하겠다. 인솔자들의 지시에 따라 탑승하도록."
몇 마디 주의 사항에 이어 그렇게 필요한 말만 하고 석호필은 단상을 내려가 버렸다.
그 쿨함에 학생들이 웅성거렸지만 이어 본 시험을 진행하는 교사들 중 한 명의 날카로운 말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지금부터가 배틀로얄의 시작이다."
그것은 그만큼 학생들의 긴장을 조이는 말이었다.
금화도로 가서 정해진 위치에 배치된 뒤에야 배틀로얄의 시작이다.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아직 배에도 타기 전인 지금부터가 배틀로얄의 시작이라니.
그것이 결코 헛말이 아닐 것이기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음…….'
도진 또한 좀 더 긴장의 끈을 조였다.
'시험 내용을 잘 모르니…….'
과거로 회귀한 도진이었지만 숭무고의 시험에 관해선 크게 아는 바가 없었다.
당시 시험을 친 학교는 숭무고가 아닌 문월고였으며 숭무고 시험에 관해서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숭무고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으며 오르지 못할 나무였기에 쳐다보지도 않았었다.
하물며 세부 자료를 보기 위해선 결제가 필요했는데 굳이 결제해서 볼 생각도 없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뭐, 그만큼 정정당당하게 칠 수 있는 거지.'
이것은 기회를 쟁취하기 위한 시험이다. 그 시험 내용을 미리 알고 치는 건 아무래도 찜찜한 일이었기에 도진은 그것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인원의 체크가 끝나고 학생들부터 승선이 시작되었다.
"짐을 맡아 드리겠습니다."
"네."
첫 번째로 승선하게 된 학생 하나가 직원에게 캐리어를 맡겼다.
그 뒤로도 몇 명이나 되는 학생들 또한 짐을 직원에게 맡겼다.
그러다 깐깐한 인상의 학생 차례가 되어서 변화가 생겼다.
"짐을 맡아 드리겠습니다."
"아뇨.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
그 짧은 대화에서 학생들의 분위기가 슬쩍 바뀌었다.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둔 가방을 저렇게 쉽게 맡겨서는 안 된다.
앞서 들었던 '지금부터가 배틀로얄의 시작'이란 말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런 것 하나 하나가 채점 포인트일 수 있다.
"짐을 맡아 드리겠습니다."
"됐습니다."
"제가 들고 갈게요."
그때부터 아무도 직원에게 물건을 맡기지 않고 직접 들고 입장했다.
도진과 소담 또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둘은 자기 짐을 직원에게 맡긴다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기도 했다.
"이번 년도는 뭔가 좀 많이 다른 거 같은데."
"그러게. 이런 이야긴 못 들었는데……."
승선한 학생들은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불안해 했다.
숭무고의 관문 시험과 본 시험은 큰 틀은 같아도 매년 세부적인 내용은 달라진다.
허나 이번은 특히나 느낌이 다른 듯했다.
그렇게 불안감을 가지고 승선한 학생들이 가장 먼저 마주한 건 압도될 정도로 커다란 홀이었다.
고개를 최대한 꺾어도 보기 힘든 천장, 화려한 조명, 거대한 계단 등 별세계에 온 것만 같았다.
"와아……."
소담이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도진은 그 모습이 귀여워 슬쩍 웃었다.
"지금부터 1시간 43분 뒤 시험장인 금화도에 도착하게 된다. 그때까지 저녁 식사를 하며 편히 쉬면 된다."
인솔 교사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홀에서 식당으로 이동하여 뷔페를 즐기게 되었다.
"이건 우릴 배부르게 먹여서 방심하게 만들려는 건가?"
"조심해야겠어."
한껏 경계하는 학생들의 모습에 도진과 소담은 남몰래 웃었다.
경계하는 건 좋은데 너무 중2병스러웠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음식에 독이나 수면제를 타진 않을 테니까 많이 먹어두는 게 이득이지."
"그렇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리고 누군가의 말대로 대부분은 식사를 시작했다.
금화도에서 진행될 배틀로얄에서는 음식은커녕 식수를 구하는 것도 일이었다.
지금의 식사는 그때를 대비하여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렇게 식사가 시작되자 자연스럽게 파벌이 나뉘었다.
배틀로얄은 마지막 1인이 남을 때까지 진행되는 서바이벌이었지만 연합이 금지되지 않았다.
때문에 시험 전에 파벌을 맺는 건 당연한 일이 되어 있었다.
특히 숭무고에 입학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보통은 힘 깨나 쓰는 집안의 학생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교류하던 집안과 동맹을 맺기도 했다.
혹은, 대기업 자제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모이기도 한다.
바로 오성의 오대용 파벌처럼 말이다.
재계 서열 5위인 오성은 수많은 협력 업체를 거느리고 있었고 여러 강력한 문파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기도 했다.
그 카르텔에 속한 학생들이 뭉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리더는 오대용. 그리고 그 주위를 여러 문파와 협력 업체의 학생들이 감싸고 있는 것이다.
도진은 그렇게 모인 파벌을 보며 생각했다.
'열일곱 명. 같은 조에 배치하겠지.'
그 파벌의 면면을 도진은 알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본 시험의 운영진이 저들을 굳이 따로 갈라놓지 않을 거라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연합을 금지하지 않는 입장에서 일부러 찢어 놓을 이유가 없으니까.
오히려 저런 거대 파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리고 다른 학생들이 어떻게 상대하는지 확인할 수 있어 더욱 좋다.
그렇게 잠시 거대 파벌에 시선을 주고 있을 때 돌연 파벌의 중심으로 보이는 학생과 도진의 시선이 부딪쳤다.
아니, 저쪽에서 먼저 노려보았다.
'응?'
도진은 그 학생의 적대적인 시선에 의아해졌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이였다.
그렇기에 당연히 원수질 일도 없었다.
한데 마주한 시선은 도진을 완전히 적으로 간주하고 물어뜯기 위해 벼르고 있는 것이었다.
"뭐야. 원수진 사이야?"
곁에 있던 소담이 귓가에 속삭였다.
"아니."
"그럼 왜 저래?"
"글쎄."
도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굳이 알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적이었고 어차피 연합하여 덤벼들 경쟁자들이었으니까.
사소한 것에 골몰하지 않을 정도로 대범해진 도진이었다.
때문에 지금은 밀착한 소담의 향기와 숨결이 더욱 신경쓰였다.
"크흠. 밥이나 먹자."
"그래."
접시에 음식을 덜고 적당한 자리를 찾았다.
크고 작은 파벌들 사이에서 도진과 소담은 이질적이었다.
몇 명 정도는 파벌에 들어오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할 법도 한데 그런 것 하나 없다.
물론 두 사람은 그런 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도진은 소담이, 소담은 도진이 함께 하고 있으니 혼자도 아니었고 말이다.
또한 그랬기 때문에 문득 보게 된 한 사람이 도진은 신경쓰였다.
'우정한.'
넓은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은 소림 속가 제자, 우정한이었다.
정갈하게 가사와 장삼을 걸쳤으나 머리는 밀지 않은 차림으로 샐러드만 골라 담은 식기를 앞에 두고 있다.
고등반 입학 전부터 이미 후기지수로 꼽힐 만큼 대단한 실력과 명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그는 혼자였다.
마치 물 위의 기름처럼 이 장소에서 유리되어 있는 느낌이다.
도진은 그것이 자신이나 소담과 마찬가지로 '출신 성분'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무림중학교에도 가지 못할 운명이었던 게 우정한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정말로 인연이 있었던 것처럼 한국을 방문했던 소림사 무승(武僧)의 눈에 들어 속가 제자가 될 수 있었다.
이후 천부적인 자질을 발휘하여 이른 나이에 후기지수가 되었고 말이다.
식당 대부분을 차지한 한국 재벌이나 유명 문파의 학생들과는 접점이 없다.
심지어 배틀로얄에서는 부담이 되는 경쟁자이기까지 하다.
합의하거나 타협할 만한 친분도 없으니 연합에서 배제하는 게 이득이다.
그런 이유가 아닐까 하고 도진은 생각했다.
그래서 다가갔다.
"안녕. 밥 같이 먹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