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29화 (29/741)

29화

의외로 대한민국에는 무인도가 많다.

세자릿수? 아니, 무려 네자릿수에 달한다.

그런 네자릿수의 무인도 중 서해의 한 곳을 금화 그룹에서 구매하여 인위적으로 몇 배나 크게 만든 인공섬이 바로 '금화도(金華島)'였다.

인공산을 만들고 호수까지 만든 거대한 섬.

그러나 생명이 살기에 그리 적합한 환경은 아니었다.

그것은 애초에 이 섬을 만든 이유부터가 거주를 목적으로 한 게 아닌, 엄청난 자본을 투입하여 '특수한 용도의 거대한 서바이벌장'을 만드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섬은 대부분이 정글과 산지였으며 곳곳에 위치한 호수는 정수하지 않고선 식수로 쓸 수 없을 만큼 수질이 좋지 않았다.

바로 이 금화도가 숭무고의 본 시험인 '배틀로얄'의 무대였다.

평소엔 특정 수업을 위한 용도로 쓰다 입학 시즌이 되면 숭무고의 명물인 배틀로얄을 위해 대규모 작업이 진행된다.

곳곳에 파밍(Farming), 그러니까 아이템을 모을 수 있도록 적절하게 생존에 필요한 장비들을 배치하는 것부터 시험에 방해되지 않도록 정교하고도 은밀하게 카메라를 설치하는 등 할일이 많았다.

엄청난 자본과 인력이 들어가는 만큼 숭무고를 후원하는 기업들이 나서서 이것들을 부담했다.

여기서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하고 또 그런 만큼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금화였다.

한유아의 할아버지가 회장으로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

그 회장님의 총애를 받는다는 한유아는 그러나, 철저하게 그 영향력에서 분리되어 있었다.

숭무고의 학생이었으니까.

연관되어선 안 되었다.

'완전 내 처지랑 똑같단 말야.'

한유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버릇처럼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와 같이 농밀한 꿀처럼,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혹적인 미소였으나 어쩐지 쓴맛이 숨어 있는 듯한 미소였다.

그러나 한유아는 곧 그 쓴맛을 철저하게 지워냈다.

불필요한 생각을 깊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에겐 그런 걸 생각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잠시 쉴 요량으로 바깥으로 나왔다.

혼자 여유롭게 교내를 걷는 그녀에게 수많은 시선이 꿀에 붙잡힌 곤충들처럼 달라붙었으나 실제로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 유명했고 또 너무나 고귀했으니까.

후기지수이자 금화 회장의 총애를 받는 손녀딸.

그리고 압도적인 미모까지.

감히 말을 거는 것조차 일생일대의 결심이 필요한 그녀에게 다가올 용기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 심심해.'

속으로만 푸념하며 그녀는 최근 '관심 목록'에 담아두었던 김도진을 떠올렸다.

어디까지나 가벼운 관심으로 한 번 떠 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가볍게 콕, 찔렀는데 맹수의 위험한 기세가 훅 그녀를 덮친 것이었다.

두근-!

생각만 해도 그것은 심장이 뛰고 흥분될 정도로 난폭한 기세였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짜릿함.

더 흥분되는 건 그런 기세가 억지로 끌어낸 게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는 점이다.

놀라서 저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가 금세 사라져 버린 기세.

그런 기세의 주인답게 한유아를 알고 있으면서도 주저없이 손을 섞었고 당당하게, 아무렇지 않게 대했다.

심지어 자신을, 이 한유아를 당황시키기까지 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주변에서 헉,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귓등에서 필터링 되어 버렸다.

'보고 싶은데…….'

오랜만에 본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무미건조한, 그야말로 사막 같던 일상에 오아시스를 만난 듯한 반가움.

한데 그 김도진은 단 하루만에 관문 시험을 뒤집어 놓으시곤 수련으로 두문불출이었다.

'본 시험이 이제 3일 뒤인가…….'

본 시험은 관문 시험이 완료되고 이틀 뒤에 시작한다.

오늘이 관문 시험 마지막 날이니 이제 3일 남은 것이다.

그때까진 지루하겠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한유아는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폭룡아!"

"아이 씨."

서글서글한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는 건 다름 아닌 폭룡 류대현이다.

농밀하게 스며드는 아름다운 목소리만으로도 정체를 알 수 있었기에 류대현은 전혀 놀라지 않고 한유아를 맞이해 주었다.

이렇게 친구 같은 부분이 한유아는 마음에 들었다.

언제나처럼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그나마 좀 우울했던 게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그런 한유아에게, 생각지 못했던 인물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누나."

"어? 대용아."

180이 넘는 키에 탄탄한 몸.

잘생겼다고 하기엔 조금 부족하지만 척 봐도 보통 명품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는 것들을 자신감과 함께 둘러 그 부족함을 메꾸는 남자다.

큰 키와 다르게 앳된 얼굴의 남자는 오대용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숭무고 입학 시험에 지원한 응시생이자 한국 재계 서열 5위의 대기업인 오성 그룹의 3남이었다.

자질은 그녀의 기준으로 평범보다 조금 나은 정도.

거기에 오성 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나름의 실력과 내공을 갖추어 관문 시험을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천하태평이네.'

류대현은 오대용의 시험을 전혀 걱정하지 않는 얼굴에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 인생을 쉽게 살았다.

자질도 타고났으며 집안까지 좋으니 숭무고 입학마저 확정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뭐, 나름의 속사정은 있는 녀석이었지만 류대현은 그것까지 감안해도 오대용이 객관적인 시선에서 편히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 오대용은 노골적으로 한유아를 좋아하고 있다는 티를 내며 말했다.

"누나따라 숭무고에 왔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곧 후배가 될 테니까요."

"기세가 대단하네. 관문 시험 합격했다지?"

"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숭무고에 입학하면 조금 더 진지하게 저랑 만나주시지 않을래요?"

한유아의 분홍빛 입술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웃었다.

"겨우 그 정도로는 안 될 거 같은데."

"그러신가요? 아쉽네요. 그럼…… 누나의 관심 목록에 있다는 그 신기록 세운 녀석을 꺾어 버린다면 어떨까요?"

"헤에. 도진이를?"

"이름이 도진인가요. 네. 그 녀석을 배틀로얄에서 조기 탈락 시키면 누나의 관심이 저에게도 좀 비치지 않을까요?"

"오, 그건 좀 관심이 가는데?"

오대용의 눈썹이 조금 꿈틀했다.

그것은 한유아가 도진에게 관심이 있다는 게 사실임을 인정한 데 대한 언짢음의 표출이었다.

나에게 향해야 할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 있다.

'…이기겠어.'

그 언짢음이 오대용에게 한 가지 다짐을 하게 만들었다.

"…그럼 전 시험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응. 잘 가."

한유아는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렇게 오대용이 사라지자 류대현이 긴 숨을 내쉬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관심 목록에 안 넣어줄 녀석을 꼭 그렇게 상대해 줘야 돼?"

한유아는 위험한 걸 좋아한다.

그것이 어찌되었든 자극이 되고, 쉽게 대할 수 없는 것에 매력을 느낀다는 말이다.

그래야만이 이 위험한 미녀의 소유욕을 자극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오대용은 꽝이었다.

그 낭창한 심지로는 한유아를 결코 흔들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자각하지 않는 한 오대용이 한유아의 진실된 관심 한 조각이나마 쟁취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걸 꿰뚫고 있는 류대현의 말에 한유아는 조금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더 좋은 거잖아."

"그래?"

"오성은 금화의 경쟁사잖아. 저런 애가 요직을 차지할수록 우리한테 이득이잖아? 그리고 딱 이 정도 거리를 유지해야 필요할 땐 좁히고 아닐 땐 멀어질 수 있으니까. 이 정도가 제일 좋아."

"뭐, 그렇겠지."

한유아는 무림인이다.

그러나 동시에 재계의 거물이기도 했다.

스스로는 작지만 태생과 위치가 거물이 되기를 강요했다.

류대현과는 입장이 달랐으니 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쟤 김도진한테 아주 대차게 깨질 텐데 괜찮겠어?"

"그것까지 포함해서가 재미지."

"너무 무책임한 거 아냐?"

그런 류대현의 물음에 한유아는 퇴폐적이면서도 매혹적이고 또 위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글쎄. 과연 나는 누구에게 무책임한 걸까."

* * * *

스륵.

도진은 혈도를 내달리던 천마기를 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3월 중순을 향해 가는 시기.

조금은 낮이 길어져 이제 해가 지고 있는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관문 시험을 통과하고 5일째.

드디어 오늘이 본 시험 배틀로얄이 개막하는 날이었다.

한데 그런 날 저녁임에도 도진이 아직 집에 있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바로 배틀로얄이 오늘 늦은 밤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오후 8시에 출항하는 배를 타고 무인도로 이동하여 거기서부터 진행한다고 책자에서는 안내하고 있었다.

'인천항으로 가야 했지.'

도진은 살면서 항구에 가보거나 배를 타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여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7시까지 인천항으로 가기 위해 지금 출발할 계획이었다.

교복을 입을 필요는 없고 최소한의 짐은 허용한다.

그런 문구에 따라 필요하다 싶은 걸 최소한으로 챙긴 가방만을 메고 집을 나섰다.

배틀로얄은 일주일 이상의 기간을 잡고 진행되기에 집에는 미리 말을 해 두었다.

그렇게 집을 나와 우선 번화가로 나가니 함께 가기로 했던 사람, 소담이 기다리고 있었다.

흰 티셔츠에 청바지, 운동화. 거기에 빈티지한 밀리터리 자켓을 걸친 캐주얼한 복장이다.

크게 꾸미거나 특별한 것이 없는 복장임에도 그것을 걸친 게 소담이기에 마치 화보 촬영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평범한 거리의 벤치를 그렇게 화보 촬영장으로 만들어 버린 소담은 곧 도진을 발견하고선 웃으며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안녕. 많이 기다렸어?"

"아니. 금방 나왔어."

인사를 하고 난 뒤 함께 걷는 중에 소담이 도진을 살피고서 말했다.

"근데 넌 교복 입었네?"

"응. 어차피 옷 버릴 텐데 굳이 사복 입을 필욘 없을 거 같아서. 뭐, 버릴 만한 옷 몇 개는 들고 왔어."

"그것도 그렇네."

소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도진이 넌 인천항 가 본 적 있어?"

"아니. 너는?"

"나는…… 나도 없어."

"뭐 보통 사람은 별로 가 볼 일 없는 곳이니까."

"응, 그렇지."

"그래도 요새 세상이 좋아져서 이렇게 길찾기 검색만 하면 간단히 찾아갈 수 있단 말이지."

검색을 통해 목적지까지 가는 방법은 확실히 숙지해 두었다.

바로 가는 버스가 있었기에 소담과 함께 버스를 타고 인천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는 굳이 지도를 확인할 필요가 없었는데, 금화도로 가기 위해 타야 할 '크루즈'가 어떤 것인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거야?"

"저거겠지?"

그것은 그러니까, 항공모함 위에 화려한 아파트 단지와 워터 파크를 올려둔 것 같았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사람이 개미만큼이나 작게 보이는 말도 안 되는 크기의 배가 정박해 있었다.

-이 세계는 무공은 개판인데 기술은 상상을 초월한단 말이지.

-그러게 말입니다. 어떻게 섬이 움직이는지…….

"크래들 오브 블루 웨일. 금화의 계열사가 소유하고 있는 크루즈래."

"잘 모르겠지만 그냥 엄청 대단하다는 건 알 거 같아."

도진도 소담도 크루즈 같은 것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러나 저 항공모함 위에 화려한 아파트 단지와 워터 파크를 올려둔 듯한 말도 안 되는 크기의 배가 대단하다는 것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것은 한국에서 가장 큰 크루즈였으며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크기의 크루즈였다.

그런 대단한 크루즈가, 숭무고의 학생들을 시험장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진과 소담은 감탄하며 조금은 여행 기분으로 크루즈를 향해 걸었다.

그리고 교사 중 한 명이 그렇게 학생들 사이로 퍼지는 여행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듯 말했다.

"지금부터가 배틀로얄의 시작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