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땅을 박찬 소담이 빠르고 날카롭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깃털처럼 가볍게 첫 번째 장애물을 향해 나아간다.
-제법이구나. 신법과 내공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그것은 위지혁의 평가대로 신법과 내공이 조화를 이루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저 내공을 돌려 육체를 강화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초식에 접목하여 의지대로 운용할 수 있는 경지.
소담은 그 경지를 밟고 있었다.
순식간에 수십 미터의 거리를 좁혀 장대 구간에 도달한다.
그리 빠르지는 않지만 폭이 좁고 띄엄띄엄 위치한 장대들은 말 그대로 랜덤으로, 멈추지 않고 자리를 바꾸기에 아차하는 순간 균형을 잃고 추락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추락하면 탈락이었다.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지긴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닌 이곳 숭무고의 관문 시험에서 한 번의 실패는 추후 평가에서 낙방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만큼 치명적이다.
때문에 망설일 법도 한데 소담은 거침없이,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나아갔다.
타앗!
와아-!!
소담이 그림처럼 허공을 나는 순간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함성이 허공에 채 흩어지기도 전에.
타타탓.
소담은 선녀가 물 위를 밟듯 가볍게, 그리고 정확히 일곱 번 장대를 밟아 첫 번째 구역을 통과해 버렸다.
"……."
와아아아아-!!
잠시의 침묵이 지나가고 몇 배나 더 큰 함성이 길게 이어졌다.
관람객들은 바로 이런 장면을 보길 원해 표를 끊고 숭무고 입학 시험을 보러 온 것이었다.
그리고 소담은 그런 관객들의 기대 이상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 나는 듯 달리는 소담은 그토록 빠르면서도 기세가 거세지 않고 부드럽다.
마주한 바람이 소담을 때리는 대신 마치 부드럽게 스치고 심지어 등을 미는 것처럼 보인다.
선녀가 바람을 타고 나는 듯하다.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경신법(輕身法)이었다.
가파른 급경사는 평지와 다름이 없었고 허공에서 흔들거리는 공중 그네 또한 장애물로써 기능하지 못했다.
소담이 나풀거리듯 날아 공중 그네를 딛는 순간 그것은 시험자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선녀를 날려 보내기 위한 발판처럼 소담을 원하는 곳으로 날려 주었으니까.
소담의 발이 닿는 순간 공중 그네는 힘을 받아 날뛰는 대신 도움닫기를 도와주는 발판이 되었다.
그 발판을 다섯 번 밟아 소담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원형 통로 안으로 진입했다.
마치 그래야만 했던 것처럼, 의지를 가진 것처럼 원형 통로가 소담을 받아냈다.
철저하게 계산된 곡선이었던 것이다.
몇 초도 되지 않아 원형 통로를 주파한 소담이 가볍게 갯벌 코스에 내려섰다.
3미터나 되는 높이에서 뛰어내렸음에도 진흙이 튀지 않았다.
기세를 줄이지 않고 고속으로 갯벌 코스를 주파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옅은 족적이 남을 뿐 진흙은 전혀 튀지 않았다.
오직 마지막, 5미터짜리 구덩이를 뛰어넘기 위해 도움닫기를 할 때에만 약간의 진흙이 튀었다.
삐이이이이-!
도움닫기를 한 소담이 도착하자 커다란 소리와 함께 전광판에 기록이 표시되었다.
[22:39]
"이, 이십이 초?!"
"대박!"
와아아아아아!!
직선 달리기도 아니고 무려 300미터 장애물 달리기를 22초 대에 끊었음이 공표되자 관객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바람을 탄 선녀같던 그 미모와 경신법이 빠져들 만큼 아름다웠는데 기록까지 엄청났으니 함성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헤에, 예상은 했는데 진짜 보통이 아니네."
관객석과 좀 떨어진 특별 구역 내.
재학생들을 위해 마련된 공간에서 웃으며 말하는 건 다름 아닌 한유아였다.
포장마차 거리에 이어서 두 사람을 구경하기 위해 류대현과 함께 이곳에 왔던 것이다.
한유아의 말에 류대현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법과 보법이 특기인 거 같네. 1학년 중에선 쟤를 따라잡을 애가 드물겠어."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 빠름을 정확히 제어했다.
그렇게 완벽히 제어되는 쾌속은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힘이 된다.
"22초 39. 역대 5위. 이번 시험에서 넘을 애는 안 나오겠어."
한유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대기석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 시선의 끝에는 소담과 교차하여 시험장으로 향하는 도진이 있었다.
"야, 폭룡."
"아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알았어, 알았어. 대현아. 우리 내기 할래?"
"…너랑은 내기 안하기로 다짐했어."
"어휴, 쪼잔하기는."
"너랑 내기해서 이긴 놈이 있긴 하냐?"
류대현의 말대로였다.
예언을 한다고까지 알려진 한유아다.
직감부터 정보까지 모든 면에서 특출난 한유아와 내기를 해 이긴 사람은 여지껏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 한 사람도 '논외'로 여겨질 정도니 사실상 한유아의 내기 전적은 무패였다.
"나는 김도진이 20초 끊는다에 소원권 걸게."
"…뭐?"
"김도진이 장애물 달리기 20초에 끊는다에 소원권 건다고."
"…진심?"
"응. 진심."
장애물 달리기 20초대.
그것은 8년째 유지되고 있는 최고 기록의 영역이었다.
20초 68.
그 기록을 낸 사람은 현재 무림에서 가장 빠른 사람을 꼽는 데 다섯 손가락 밖으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한유아는 도진이 바로 그 마의 20초에 진입할 거라는 데 판돈을 건 것이다.
류대현은 고민했다.
김도진도 보통은 아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20초는 심하게 오바이자 에바였다.
이 정도면 걸어봄직하다.
"오케이. 그럼 나는 김도진이 20초는 안 된다에 소원권 걸게. 콜?"
한유아는 사람을 홀릴 듯한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콜, 하고 말했다.
그렇게 내기가 성립되는 동안 도진은 출발선 앞에 서 있었다.
'나 어땠어?'
'응, 예쁘고 멋있었어.'
'너도 보여줄 거지?'
'응. 보여 줄게.'
멋지게 시험의 스타트를 끊은 소담과 나눈 대화였다.
소담을 지나쳐 출발선 앞에 선 도진은 남다른 감회에 젖어 있었다.
말 그대로 기적에 힘입어 19년이란 시간을 거슬러 이 자리에 섰다.
숭무고 입학 시험.
과거엔 쳐다볼 수조차 없던, TV에서나 볼 수 있던 머나먼 다른 세상.
바로 그 세상에 두 발로 서 있었다.
기회는 기적이 주었지만 이 자리에 서 있는 건 자신의 힘이다.
-어떠냐?
-나쁘지 않네요. 아니, 너무 좋습니다.
두근-!
심장이 크게 뛴다.
그 심장 고동을 따라 몸속을 돌고 있던 천마기 또한 흥분하여 거세게 혈도를 내달렸다.
그 흉포한 기세가 지금은 기분 좋게 느껴졌다.
천마기와 마찬가지로 이 두근거리는 감정을 흉포하게 쏟아내고 싶어졌다.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다.
고개를 들어 코스를 눈에 담았다.
무흔잠영으로 단련된 '시선(視線)'이 코스에 그려졌다.
된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한 번 달려보려무나.
-예.
띠. 띠. 띠.
노란 불이 세 번 번쩍이는 동안 도진은 천마기의 고삐를 풀어 버렸다.
그리고.
펑!
억누르고 있던 감정의 고삐 또한 놓아 버렸다.
콰아아앙!
삐이이이이-!
[19:98]
신기록이었다.
* * * *
피곤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김서우는 눈을 떴다.
익숙한 접이식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니 찬 공기가 이불 안에서 데워졌던 몸을 때렸다.
당직을 서고 오전 근무까지 한 뒤에야 잠을 잤더니 묵직한 피로가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매일 당직을 서며 풀리지 않는 피로가 쌓이는 것이다.
그나마 며칠 전 하루를 집에서 자 조금 나아지긴 했다.
'다섯 시간 정도 잤나…….'
왕년엔 이삼일 밤을 새도 괜찮았는데 나이 오십이 가까워오니 슬슬 체력이 떨어지는 게 체감된다.
삼류 무인이라지만 그래도 무림인. 매일매일 몸 관리를 해주어 버티고는 있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이렇게 무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덜컥.
당직실을 나오니 퇴근 준비를 하는 직원들이 보인다.
어느새 저녁 6시 가까운 시간이 된 것이다.
"과장님 일어나셨어요."
"아, 네."
"그럼 저희는 이만 퇴근해 보겠습니다. 서류는 정리해놨으니 확인해 주세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퇴근할 사람들은 퇴근하고 회사 건물의 반절 이상이 어둠에 잠긴다.
남는 건 야간조와 오늘도 당직을 자처한 김서우까지 십여 명이다.
빨래를 모아 회사 내의 세탁실에서 돌리고 샤워 후 옷을 갈아입었다.
처음엔 세탁기 사용법도 잘 몰라 버벅였는데 이제는 손빨래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청결에 신경쓰라는 지침에 따라 깔끔해진 모습으로 나온 김서우에게 야간조의 정 대리가 손을 흔들었다.
"아, 김 과장님. 식당 같이 가시죠."
"그러지."
야간조의 직원들과 함께 김서우는 구내식당으로 가 배식을 한가득 받았다.
입맛은 그닥 없었지만 체력을 유지하려면 끼니는 거르지 말고 든든하게 챙겨야 했다.
"요샌 그나마 덜 바빠서 살 것 같네요."
"정 대리가 하필 특훈 시즌에 이직해서 고생이 많았지."
김서우가 과장으로 있는 이 회사는 무림인들의 훈련을 서포트하는 회사였기에 입학 시험 전이 성수기였다.
입학 시험 전 가장 치열하게 훈련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말이다.
정 대리는 무림 학교 고등반을 졸업하고 이것저것 하다 관련 업계에 있던 이 회사로 이직했는데 하필 그것이 이 성수기였던 탓에 신고식을 제대로 치렀다.
"그러고보니 김 과장님 아드님도 고등반 시험 본다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응, 그렇지."
정 대리의 말에 김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고등반 입학 시험 시즌이었다.
여기에는 숭무고 또한 포함되어 있다.
'잘 쳤을까…….'
함께 가 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것이 참 미안했다.
식사를 마치고 쉬는 시간이 되었다. 저마다 시간을 때우는 중에 김서우는 TV를 켰다.
아침에 아들의 인터뷰 장면이 나왔음을 아내의 메시지를 통해 보았다.
혹여 또 아들을 TV로나마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마침 TV에서는 숭무고 입학 시험 첫날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번 숭무고 입학 시험은 첫날부터 많은 화젯거리가 나왔는데요.
-네, 그렇습니다. 소란을 일으켜 쫓겨난 모 중학교의 학생들도 있었고 말이죠.
……
-처음으로 보실 것은 벌써부터 후기지수로 불리고 있는 소림 속가 제자, 우정한 학생의 장애물 달리기 영상입니다.
재생되는 영상 안의 학생은 김서우도 몇 번이고 들었던 소림의 속가 제자인 우정한의 시험 영상이었다.
삼류 무인인 그로서는 엄두도 못 낼 장애물 코스를 느긋하게 걷는다.
걷는데, 결코 느리지 않다.
일반인이 달리는 것 못지 않은 속도였다.
'…대단하구나.'
그것은 보법(步法)이었다.
신비를 잃지 않은 진무, 소림 무공에 속하는 보법을 운용하였기에 가능한 기예.
우정한은 그렇게 느긋함을 잃지 않고, 산책하듯 여유롭게 모든 장애물을 통과해 버렸다.
그렇게 나온 기록이 43초.
일견 소림 속가 제자라기엔 너무 느린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느긋하게' 통과했기에 더욱 대단한 일이었다.
-역시 대단하군요. 저라면 줄을 부여잡고 매달려 있기 바쁠 텐데 저렇게 느긋이 지나가다니.
-그렇습니다. 보통 경지가 아니네요. 하지만 오늘의 하이라이트 영상은 따로 있습니다.
-두 개죠?
-맞습니다. 하나는 세간에 '무림출도녀'란 별명으로 유명한 학생의 영상입니다.
그러면서 재생되는 것은 다름 아닌 아들의 인터뷰 영상에 함께 있던 아가씨의 시험 영상이었다.
'이렇게나 대단한 아가씨였구나.'
삼류라도 무림인은 무림인. 그렇기에 김서우는 소담의 경지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우정한과 마찬가지로 김서우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러 있는 무인이었다.
'도진이는…….'
이쯤 되니 아들의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 궁금해졌다.
아들도 장애물 달리기를 선택했을까. 선택했으면 과연 어떻게 통과했을까.
아들은 당차게 수석으로 입학하겠다 선언하며 내기까지 제안했지만 김서우는 그 정도까진 바라지 않았다.
염치없이 그것을 기대할 수 있을 만큼의 뒷바라지를 해주지 못했다.
그저 합격할 수 있기를.
만약 떨어진다 해도 자신감을 잃지 않기를 바랐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저는 이번 숭무고 관문 시험의 백미로 이 영상을 꼽고 싶습니다.
그런 멘트와 함께 재생되는 영상에, 아들이 나오고 있었다.
"……어?"
절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당황을 추스를 시간도 주지 않고, 아들은 폭풍처럼 질주하여 코스를 완주해 버렸다.
유치하지만, 폭풍이란 말 말고는 그 질주를 달리 표현할 수가 없을 만큼 난폭하고도 맹렬했다.
우정한이 느긋했고 서소담이 부드러웠다면 도진은 폭풍 같은 기세의 맹수였다.
와아아아아아-!!
순간 볼륨 기능이 고장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오고 화면에는 19.98이라는 기록이 클로즈업되었다.
아들은, 숭무고에 신기록을 남긴 것이었다.
'제가 수석으로 입학하면 아버지는 앞으로 평일에 두 번은 당직 서지 않고 집에 들어오기.'
아들과 했던 내기가 떠오른다.
결코 질 것 같지 않았던 그 내기.
'어쩌면, 질지도 모르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데 기분이 나쁘지가 않았다.
도저히, 기분이 나빠지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