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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26화 (26/741)
  • 26화

    관(官)과 무림(武林)은 서로 불가침이다.

    무협지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자 설정이다.

    이는 사실 현실성이 없는, 독자의 이해를 바탕으로 적용되는 허구의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허구는 아니었는데, 실제로 이 현대 사회의 무림에도 어느 정도는 적용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땅 위에 존재하지만 사회와 무림은 별개의 세계였다.

    같은 세계였다면 굳이 '무림'이라 구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림과 무림인, 그리고 무공이 가지는 여러가지 특성은 무림을 같은 땅 위에 존재함에도 다른 세계로 구분지었고 그에 따라 다른 법(法)을 적용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자치 기관의 성격을 띠는 무림인들의 집합체 무림맹(武林盟)이었고 별도로 적용되는 무림 특별법이다.

    무림의 세계에서는 일반 법에 앞서 무림특별법이 먼저 적용된다.

    그리고 죄를 짓는 등의 일이 생기면 관, 나라보다 무림맹이 먼저 나서서 일을 처리하는 게 보통이었다.

    사안이 심각하면 나라가 나서지만 그게 아니라면 무림맹이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 배경에 따라 김도진이 도슬구를 때려눕힌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도슬구가 먼저 시비를 걸었고 심지어 먼저 공격했다.

    여기에 대응하여 도진이 손을 썼기에 도슬구의 안면이 피떡이 된 건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무림인 사이에 시비가 붙었고 가해자가 참교육을 당했을 뿐인 무림의 일이다.

    그리고 단파중학교 학생들에 대한 숭무고의 처분.

    "입학 시험을 치러야 할 학생들이 분란을 일으키고 단체로 다른 학생을 희롱, 협박하려 들었으니 시험 자격을 박탈하겠습니다. 이의 있으십니까?"

    눈앞의 거인, 철탑거권(鐵塔巨拳) 석호필의 말에 인솔 교사 소정우는 그저 아니오, 하고 대답했다.

    집행부의 권한으로 처리할 일이 아니었기에 류대현이 보안 담당이었던 교사에게 연락을 했는데 그것이 바로 숭무고의 교사 중 한 명이면서 동시에 권법의 고수로 이름난 석호필이었던 것이다.

    외공(外功)의 고수이기도 한 석호필의 우람하고 단단한 팔뚝은 존재만으로도 공격이 될 만큼 위협적이었다.

    류대현의 앞에서도 깨갱한 학생들이 석호필과 감히 눈을 마주치거나 토를 달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어차피 합격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저 시험에 응시한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왔던 단파중 학생들은 자격 박탈과 퇴거 처분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주동자였던 도슬구는 말할 것도 없이 같은 처분이었다.

    이쪽은 정말로 합격할 마음을 먹고 왔으니(가능할지 여부는 둘째치고) 나중에 깨어나면 두 배로 속이 쓰릴 예정이다.

    뭐, 자업자득이지만.

    괜히 소담이 압도적인 미모에도 불구하고 불편을 겪지 않았던 게 아니다.

    지금껏 쌓아온 것들을 증명해야 하는, 앞으로의 인생을 결정할 만큼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트러블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알아서 학생들이 자제했고 그러지 못할 경우엔 인솔자가 자제시켰다.

    한데 단파중학교의 경우 인솔 교사가 학생들을 휘어잡을 만큼의 카리스마도, 능력도, 권한도 없는 상황에서 학생들 또한 무개념이라 이런 참사가 터지고 말았다.

    단파문은 명성에 똥칠을 한 것이다.

    본래 이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인솔자 파견에 신경을 써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부분에서 단파문이 세력에 비해 저평가 받는 이유를 엿볼 수 있었다.

    어쨌든, 눈앞이 깜깜해졌던 사건이 어떻게든 봉합이 되고 소정우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도슬구를 챙겨 떠나려 했을 때였다.

    "잠시만요."

    "네?"

    도진의 목소리에 소정우가 몸을 돌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슬그머니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위자료를 좀 받아야겠는데요."

    '…뭐라고?'

    한 발 앞으로 나선 도진의 말을 순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맞아요. 위자료를 받아야겠어요."

    심지어 소담마저 도진의 옆에 서며 거드니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억지로 날아가려는 정신을 붙들고 물었다.

    일을 마무리지으려던 석호필은 물론이요 류대현과 한유아의 시선까지 도진에게 집중되었다.

    특히 한유아의 시선이 재미난 장난을 지켜보는 개구쟁이 같이 반짝였다.

    도진은 그런 시선들에 전혀 주눅들지 않고 말했다.

    "쟤들 때문에 우리가 밥을 못 먹게 됐잖아요."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앉아 있던 테이블을 가리켰다.

    테이블에는 도진과 소담이 채 절반도 먹지 못한 백반 두 상이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저놈이 소란을 일으킨 탓에 흙먼지가 튀고 침도 튀어서 못 먹게 됐으니 밥값에다 플러스 알파를 좀 받아야겠는데요."

    "……."

    소정우의 말문이 턱, 막혔다.

    무언가 반박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반박하기가 힘들었다.

    반박을 하고 싶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정우는 굳이 말을 길게 하는 대신 지갑을 꺼내려 했다.

    사건이 길어져봐야 실시간으로 손해가 커질 뿐이다.

    한데 또 그걸 도진이 막았다.

    "아뇨, 선생님이 주실 필요는 없어요. 저놈이 잘못한 건데 선생님이 지갑을 왜 꺼내요. 경비 처리도 안해 줄 텐데."

    "……."

    소정우는 거기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걸 인정했다는 이야기가 학교에 퍼지면 정말로 짤릴 테니까.

    도진은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웃으며 다가와선 도슬구의 품에서 지갑을 찾아 돈을 꺼냈다.

    "음, 이거면 될까?"

    "응, 그걸로 용서해 주지 뭐."

    능청스럽게 5만 원권 두 장을 꺼낸 뒤 소담과 결정을 내리더니 지갑을 다시 도슬구의 품에 넣어 주었다.

    "이거면 될 거 같네요."

    그렇게, 위자료까지 주고 난 뒤에야 단파중의 학생들은 바글바글하게 몰려든 학생들, 기자들의 시선에서 도망치듯 퇴장할 수 있었다.

    "그럼 나도 이만 돌아가 보마."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수고하세요, 선생님."

    류대현과 한유아의 인사를 받으며 석호필도 쿨하게 떠나갔다.

    석호필을 보낸 한유아가 씨익 웃으며 류대현에게 말했다.

    "완전 부부사기단이네. 그치?"

    "부부사기단인진 모르겠지만 무림출도녀가 순진한 애가 아니란 건 알 거 같네."

    그 상황에서 위자료를 달라는 도진의 배짱과 뻔뻔함도 그랬지만 거기에 대번에 동조한 소담 또한 보통은 아니었다.

    다만, 그런 배짱과 뻔뻔함을 가졌으면서 위자료(?)가 고작 5만원씩이란 게 또 웃기는 부분이다.

    '입학하면 정말로 재밌어지겠어.'

    * * * *

    포장마차를 나온 도진은 5만 원권 한 장을 소담에게 건넸다.

    "자, 네 몫."

    "오예! 공돈 생겼네."

    "에이, 공돈은 아니지. 정당한 노동의 대가지."

    "그런가?"

    "그럼."

    한바탕 한 뒤임에도 도진과 소담 사이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겨우 그 정도 사건을 담아두고 가라앉을 두 사람이 아니었다.

    "음, 맛있었는데 좀 아쉽다."

    "그러게."

    사건보다는 오히려 다 먹지 못한 백반이 더 기억에 남았다.

    "뭐, 그래도 이 정도가 운동하기 전에 먹을 양으론 적당한 거 같아."

    "그것도 그러네."

    어느새 9시가 가까운 시간. 슬슬 다섯 개의 관문에 도전해야 할 시간이었다.

    오늘 다 해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두어 개는 해둘 예정.

    격렬히 움직여야 하니 적당히 배를 비워두는 게 좋았다.

    "어디부터 갈까?"

    "장애물 달리기가 제일 가깝네. 거기부터 가보자."

    "그래."

    소담이 갖고 있던 책자를 통해 시험장들을 확인하니 두 사람이 있는 곳에선 장애물 달리기 시험장이 가장 가까웠다.

    임시로 마련된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움직이면 8분만에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교내 버스는 응시자용과 관람객용이 구분되어 있었기에 편안히 자리에 앉아 시험장까지 갈 수 있었다.

    시험장은 '제 2 체육관'이란 팻말이 붙은 곳이었다.

    이름은 그렇게나 심플한데 규모는 결코 심플하지 않았다.

    원형의 체육관은 올림픽 경기장이나 야구장에 비교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을 만큼 거대하고 넓었기 때문이다.

    내부엔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관람객들이 꽤 많이 앉아 있었는데, 가운데의 그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운 시험장을 구경중이었다.

    실제로 야구를 할 수 있는 그 넓은 공간의 바닥이 모조리 푹신한 매트로 채워져 있었다.

    그 매트 위에 장엄하다고 해야 할 규모의 '장애물'들이 설치되었다.

    출발점인 높은 단상을 지나 첫 번째로 자리한 장애물은 쇠로 만든 높은 장대들이다.

    한 발로도 서기 힘들 만큼 폭이 좁은 장대들이 띄엄띄엄 배치되어 있었는데 심지어 그것들이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까지 했다.

    이 장대를 최소 일곱 번은 밟고 넘어가는 게 규칙이었다.

    그렇게 장대 구역을 지나 30미터쯤 달리면 두 번째 함정인 '공중 그네'가 나온다.

    급경사의 오르막길을 뛰어넘는 순간 땅이 사라진다. 대신 그 자리를 흔들거리는, 역시 폭이 좁은 공중 그네들이 띄엄띄엄 채워주고 있다.

    이 그네를 최소 다섯 번은 밟고 지나가야 한다.

    마지막 공중 그네에서부터 5미터 너머에, 그것도 90도나 꺾인 곳에 다음 길이 있었다.

    더더욱 압권인 건 그 길이 역시나 허공에서 좌우로 흔들리는, 사람 한 명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크기의 원형 통로라는 것이다.

    즉 시험자는 공중 그네를 박차고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면서 정확히 흔들리는 원형 통로를 통과해야 했다.

    그 원형 통로를 지나 3미터나 되는 허공에서 착지하여야만 비로소 땅을 밟을 수 있다.

    거기서부터 발이 퍽퍽 빠지는 갯벌 같은 직선 코스를 30미터 달려 폭 5미터의 구덩이를 뛰어넘으면 골인이다.

    여기까지 300미터를 60초 안에 통과하면 합격.

    그야말로 무림인을 대상으로 하는, 그것도 어중이떠중이는 시도조차 못할 장애물 달리기였다.

    내공을 운용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만들어진 이 장애물 달리기가 바로 숭무고의 '관문 시험' 중 하나였다.

    "갈까?"

    "응."

    웬만한 무림중학교 학생들도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킬 난이도였으나 도진과 소담은 평안한 얼굴로 시험관에게 다가가 응시자용 통행증을 제시했다.

    이 통행증이 응시자의 신분증이기도 했던 것이다.

    "대기자가 없어서 바로 시작할 수 있는데, 하겠나?"

    깐깐한 인상의 시험관이 날카로운 눈동자로 물었다. 마치 첫 번째로 시험을 볼 용기가 있느냐고 묻는 듯했다.

    그러나 그 날카로운 시선 또한 도진과 소담을 긴장케 하지는 못했다.

    "네. 제가 먼저 할게요. 괜찮지?"

    "응. 레이디 퍼스트."

    도진의 양보에 소담이 예쁘게 웃으며 시험장으로 향했다.

    도진은 바로 근처의 대기석에 앉아 소담을 지켜보았다.

    "오! 무림출도녀다!"

    "무림출도녀? 헐, 겁나 예쁘네."

    자리를 채우고 있던 관람객들, 그리고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드넓은 시험장 안. 드디어 첫 번째 응시자가, 그것도 시선을 확 잡아끄는 아름다운 소담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보여줘, 소담아.'

    도진은 알고 있다. 소담이 '진무'를 익히고 있다는 것을.

    처음 만난 순간 소담이 도진이 진무를 익혔음을 알아보았듯 도진도 소담이 진무를 익혔음을 알아본 것이다.

    하기야 그러지 않고서야 현대에 부활한 소림의 속가 제자인 우정한을 이길 순 없었을 터.

    전생엔 소담의 그런 무위를 볼 수 없었다.

    도진은 그때 더 이상 무림인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새로운 생을 살고 있는 지금 동경했던 소담의 무위를 같은 공간에서,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띠. 띠. 띠.

    준비하라는 뜻의 노란 불이 소리와 함께 세 번 번쩍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펑!

    붉은빛과 함께 시작의 신호탄이 피어올랐다.

    소담의 신형이 날개가 펼쳐진 것처럼 화려하게 쏘아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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