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숭무고엔 집행부(執行部)라는 조직이 있다.
조금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하자면 일반 학교의 학생회에 해당하는 조직이다.
굳이 이름이 '집행부'인 건 여타 학교와 달리 숭무고에서는 학생들의 자치권이 생각보다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 규모가 규모인만큼 아무리 그래도 '학생'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일이 많다.
반대로, 그렇기에 그 생각보다 크지 않은 자치권만 해도 다른 학교 학생들은 감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
어쨌든 그런 집행부는 학교의 여러가지 행사나 정책을 주관하는 포지션에 있다고 이해하면 편하다.
그리고 이렇게 학생들의 위에 서서 '집행'하기 위해서는 그럴 만한 자격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여기서 숭무고는 무림학교이기에 그 자격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명료한 수단은 당연히 힘이다.
때문에, 집행부에는 대대로 후기지수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집행부 소속이라는 것만으로도 엘리트들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숭무고에서 인정받는다.
어디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는 '스펙'이 됨은 물론이다.
여러가지 지원 또한 추가로 나온다.
별다른 이유가 없는 한 후기지수 또한 집행부 스카웃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집행부는 항상 후기지수, 적어도 후기지수에 버금가는 인재들로 구성될 수 있었다.
지금 순찰 명목으로 교내를 거닐고 있는 후기지수 폭룡(暴龍) 류대현과 금봉 한유아 또한 그런 연유로 집행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어이, 폭룡."
"아 진짜!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한유아의 부름에 류대현은 손을 벌벌 떨며 답했다.
폭룡 류대현.
적당한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 거기에 안경까지 써 범생이로 보이지만 바로 이 남자가 '폭룡'이란 별호를 가진 숭무고 2학년의 후기지수였다.
본래 몸이 약했고 성격도 소심해 왕따를 당했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건강해지고 소심한 성격도 고치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무공을 파고들었고 재능을 찾아 이 자리에까지 오른, 어떻게 보면 교과서적인 성장을 한 인물이었다.
중요한 건, 그런 과거를 가졌기에 양아치 등을 극도로 혐오한다는 점이다.
어린 나이에 일진이니 흑도에 가입하니 하며 날뛰는 양아치들을 보면 류대현은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았고 아주 처참하게 박살을 내놓았다.
그런 역사가 류대현을 후기지수 '폭룡'으로 만들었다.
폭력을 억누르는 압도적인 폭력.
거기에 후기지수는 남자에게 룡(龍), 여자에겐 봉(鳳)의 칭호가 붙는 게 오랜 전통이었다.
그리하여 류대현은 폭룡이 되었는데, 본인은 그것을 정말로 싫어했다.
'아니 다른 거 다 놔두고 폭룡이 뭐야, 폭룡이.'
어릴 적 절로 소름이 돋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상상을 전국에 생중계당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협지도 아니고 이 별호란 게 사실 상징 비슷한 거고 실제로 류대현을 폭룡님, 하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그런 별호가 붙었다는 것 자체가 괴로웠다.
짓궂은 성격의 한유아는 그것을 잘 알면서 이렇게 류대현을 놀리는 것이었고.
"어휴, 얘가 요즘 유행하는 것도 모르네. 금봉 어서오고, 라고 대답해야지."
"…네 별호가 우마이봉이었으면 좋겠다. 그럼 아주 신나게 불러줄 텐데."
"꺄하하하하!! 우마이봉이래! 너 유머가 좀 늘었다? 꺄하하하!"
한유아는 자지러지게 웃으며 류대현의 팔뚝을 퍽퍽 때렸다.
이 말도 안 되게 예쁜 혼혈 미녀의 손은 겉보기와 달리 무슨 포크레인 같아서 강철 같은 팔뚝을 가진 류대현이었음에도 통증을 느껴야만 했다.
퍽퍽!
'그래, 이런 매운 손을 튕겨냈단 말이지…….'
류대현은 포크레인에 살이 파이지 않도록 근육에 힘을 주며 어제 한유아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자신의 '금황조(金凰爪)'를 주먹을 쥐는 것만으로 튕겨낸 신입생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내공을 쓰지 않았다.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니었고 가볍게 한 손만 썼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금봉의 장기 중 하나인 금황조를 주먹을 쥘 때의 탄력과 힘만으로 튕겨냈다는 이야기는 쉽게 믿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심지어 같은 2학년도 아니고 이제 입학 시험을 봐야 하는 중3이 말이다.
1년 간 고등반에서 배워 이제 2학년이 된 그들과 입학 시험을 보는 아직 중학생의 격차는 상상 이상으로 크다.
때문에 호기심이 생겨 이렇게 한유아의 '예언'에 따라 포장마차 거리까지 따라오게 되었다.
예언(豫言).
그것은 한유아를 대표하는 능력 중 하나다.
처음 듣는 사람은 이게 무슨 판타지도 아니고 무슨 소리냐는 반응을 하는데 실제 경험해 보면 결코 장난이 아님을 알 수 있다.
30분 전 한유아는 말했다.
"어제 그 신입생이랑 무림출도녀가 단파문 애들이랑 싸울 텐데 구경갈래?"
포장마차 거리의 어느 백반집이라고 장소까지 확정해서 예언했다.
그래서 이렇게 포장마차 거리에 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포장마차 거리의 특징은 내부가 훤히 드러난다는 거다.
때문에 '무림출도녀'로 소문한 서소담과 한유아의 금황조를 튕겨냈다는 김도진이 함께 밥을 먹는 걸 어렵지 않게 지켜볼 수 있었다.
거리가 좀 멀긴 했지만 두 사람 정도 되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파중학교의 무리가 백반집으로 들어갔고, 당장이라도 사건이 터질 듯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예언대로 된 것이다.
이것은 우연이지만 예언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초자연적인 어떤 것도 아니다.
이 예언은 철저하게 한유아의 '능력'이었다.
금화의 회장님이 아끼는 손녀딸.
그렇기에 그녀는 금화의 힘을 꽤 가져다 쓸 수 있었다.
그 힘을 한유아는 정보와 심복에 쏟았다.
믿을 수 있는 정보,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심복의 중요성을 한유아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육성한 심복과 정보 조직을 통하여 얻은 정보를 한유아는 분석하여 '미래를 아는 것'이 가능했고 이렇게 오늘도 예언을 적중시킨 것이었다.
김도진과 서소담이 백반을 파는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공교롭게도 그 포장마차는 단파문의 사람들이 즐겨 찾는 백반집에서 내놓은 포장마차였다.
오늘 시험을 치러 오는 단파중의 무리들은 아침을 늦게 먹는 편이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시험을 치기 위해 일찍 나와야 했고 맞춰서 아침을 먹어야 했기에 인솔자가 이곳 숭무고 내의 포장마차로 데려올 예정이다.
한데 오늘 인솔자는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다.
이 정도까지 정보를 모았으니 적중할 수밖에 없는 예언이 되는 것이다.
인솔자가 만만하고 아이들을 통제하지 못하니 서소담에게 꼬인 양아치들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런 중요한 날에 자제하지 못하고 평소처럼 양아치짓을 했다.
그리고.
"앉으라고!"
"음."
서소담이 자연스레 움직여 도슬구를 헛손질하게 만들고.
빠악!
이어 도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덤벼든 도슬구를 단 한 수로 날려 버리자 류대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진무네."
"응. 그것도 둘이 같이 진무였네."
진무(眞武).
그것은 정식으로 사전에 등재된 단어는 아니었으나 진짜 무림을 사는 사람들 사이에선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이었다.
세상은 흔히 무공을 일반 무공과 고유 무공 두 가지로 나눈다.
일반 무공은 무술에서 극한까지 발전하고 또 과학적인 연구와 분석까지 더해져 무공으로 승화된 것이다.
세간에서는 이 일반 무공이 흔하고 가치없는 것이란 인식이 박혀 있는데 이는 아주 크게 잘못된 것이었다.
국가를 넘어 세계 단위로 무술에 공개된 무공 자료를 더해 연구·분석하여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 일반 무공이다.
이런 것이 흔하고 가치 없을 리가 만무하다.
다만 그것이 무림학교에 보급되고 누구나 배울 수 있기에 평가절하를 당하는 것이다.
고유 무공은 그렇게 보급되지 않은 '독문무공'이다.
독자적으로 일반 무공을 더욱 발전시킨 것, 혹은 완전히 다른 길을 통해 발전한 무공이다.
이 무공들은 알려지지 않은 만큼 분석되지 않았고 약점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독문 무공은 이점을 가진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 고유 무공이 '모두 일반 무공보다 강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고유 무공엔 편차가 있다.
더 강한 무공이 있다면 오히려 일반 무공보다 못한 무공도 있다.
당장 '무림출도'에 대한 요즘 인식만 봐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고유 무공들 중 명확하게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이 바로 '진무'다.
진무. 진짜 무공.
그것은 '신비(神秘)'를 잃지 않은 격이 다른 무공이다.
쾅!
내공을 두른 도슬구가 쇄도한다.
도진은 그것을 담담히 지켜보다 한 걸음 움직였다.
"……!"
그저 옆으로 한 걸음. 그런데 그 한 걸음만으로 도슬구는 도진의 존재를 완전히 놓쳐 버렸다.
일반인도 아니고 나름 재능을 갖춘 단파문 중등반의 수석이 말이다.
심지어 한 걸음과 동시에 뻗은 주먹마저 코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인지하지 못했다.
뻐어어억!!
그렇게 도슬구를 때려눕힌 한 걸음과 한 수가 바로 진무였다.
진무는 상식 너머에 있는 무공이다.
사실 대부분의 고유 무공은 일반 무공과 다르지 않다.
무술이 극한까지 발전하여 만들어진 '초식'에 내공이 더해진 것.
그것이 무공이라 칭해진다.
그러니까 현실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무는 다르다.
진실된 의미에서 현실을 넘어선 영역에 있다.
도진의 한 걸음.
그저 아주 약간 옆으로 걸었을 뿐인데 도슬구가 완전히 존재를 놓쳤다.
대놓고 주먹을 뻗는데 눈앞에 도달할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단순히 초점을 벗어나고 기척을 감췄다는 수준의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
그렇기에 그것이야말로 진실로 무공이라 칭할 만한 기예(技藝)다.
'한유아 말대로구만.'
올해는 재밌는 신입생이 많다.
전국의 천재들 중 천재들이 모이는 숭무고라 해도 진무 사용자를 보기는 쉽지 않다.
한데 그런 진무 사용자를 이 자리에서만 둘을 보았다.
"서, 선배님!!"
"저, 저 새끼가!!"
욕심 같아선 실력을 더 보고 싶었다. 그러나 류대현은 이쯤에서 나서기로 했다.
어차피 실력을 볼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까 지금은 꼴 보기 싫은 양아치들을 쓸어 버리는 쪽을 택한 것이다.
"무슨 소란이지?"
숨기고 있던 기세를 드러내며 나섰다.
"헉! 집행부다……!"
주변에 있던 구경꾼과 학생들이 불에 데이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단번에 소란과 관심이 두 사람에게로 쏠려 버렸다.
폭룡 류대현과 금봉 한유아.
두 사람은 존재만으로도 이 정도의 파급력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에서 둘을 마주했음에도 담담한 김도진과 서소담의 모습이 류대현을 만족스럽게 했다.
'제법이야.'
가진 실력만큼이나 담대하다.
그에 비해 단파중학교의 놈들은 형편없었다.
"……."
눈깔을 뒤룩뒤룩 굴리면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집행부, 개중에서도 폭룡은 그들에게 있어 교통사고나 다름없었으니까.
막을 수 없고 당하면 최소 병원 신세다.
예쁜 사람이 자신이 예쁜 줄 알 듯 나쁜 놈도 자신이 나쁜 짓을 한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스스로가 나쁜 놈이란 걸 자각하고 있었고 폭룡은 그렇게 나쁜 놈들을 경멸하며 팔다리를 부러뜨려 놓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무림에는 무림의 법이 있다.
이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같은 땅을 딛고 있지만 무림은 다른 세계다.
그리고 이 다른 세계, 무림을 위한 법이 별도로 있다.
그 무림의 법은 이런 상황에서 폭룡이 양아치들의 팔다리를 부러뜨리는 걸 죄로 규정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단파중의 학생들은 결국 불안하게 굴리던 눈깔을 개무시하던 선생에게로 집중하는 것이다. 어떻게 좀 해달라고.
계약직으로 고용되어 밉보이면 언제든 잘려나갈 수 있는 신세라 침묵하던 인솔자 선생은 미칠 것 같았지만 직장이 걸려 있어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섰다.
"죄, 죄송합니다. 마찰이 좀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러니 그저 고개 숙이며 사죄할 수밖에.
다행스럽게도 일은 더 심화되지 않고 봉합되는 듯했다.
지랄견 같았던 학생들도 감히 폭룡 앞에선 짖지 못하고 바짝 엎드렸고 시비가 붙었던 두 학생도 일을 키우려 하지 않았다.
덕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자빠진 도슬구를 챙기려 했을 때였다.
"잠시만요."
"네?"
"위자료를 좀 받아야겠는데요."
그런 소리를 하며 도진이 한 발 나섰다.
"맞아요. 위자료를 받아야겠어요."
그리고 소담도 한 마디 거들며 도진의 곁에 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