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2월 말.
여전히 춥지만 성큼 봄이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
무림인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에게 있어 이 시기는 유독 중요한 시기인데, 다름 아닌 '진짜 무림인'으로 인정받는 시작점인 무림학교 고등반 입학 시험 시즌이기 때문이다.
무림학교 고등반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은 보통 2월 하순부터 3월 초순 사이에 지원한 무림학교 고등반 입학 자격 시험을 치르게 된다.
이 시험은 그 학교가 명문일 경우 보통 그 지역의 대표 축제가 되는데, 그만큼 많은 관심을 받으며 성대하게 치러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맘때가 되면 TV에서는 명문 학교의 축제에 관한 특집 방송이 빠지지 않고 편성되었다.
-예, 올해도 어김없이 무림학교 고등반 입학 시험 시즌이 다가왔습니다. 추운 겨울 바람을 녹이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열기가 대단한데요.
-그렇습니다.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로 열기가 대단합니다. 그만큼 올해도 주목받는 후기지수들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데요. 오늘은 그 주목받는 후기지수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후기지수(後起之秀).
다음 시대를 이끌어갈 인재들을 뜻하는 말이다.
보통은 무림학교 고등반에서 주목받는 인재들 사이에서도 유독 뛰어난 몇 명으로 추려져 후기지수라 불리는데 희대의 천재 정도 되면 중등반에 있을 때부터 주목을 받기도 한다.
-기존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가장 주목받는 학생이라고 하면 역시 유지은 양이겠죠.
-그렇습니다. 중등반에 있을 때부터 역대급 검의 천재로 알려졌으며 단 한 번도 수석을 놓친 적이 없는 '검봉(劍鳳)'이죠. 3연속 수석은 이미 따놓은 당상이고 과연 얼마나 더 발전했을까가 관심일 만큼 비교 대상이 없는 후기지수입니다. 그 다음이라고 하면 역시…….
……
-이렇게 뛰어난 기존 후기지수들의 뒤를 이을, 이번에 고등반에 도전하는 후기지수들의 면면은 어떤가요?
-예. 이번 후기지수 후보로 꼽히는 학생들의 면면도 심상치 않습니다. 첫 번째는 역시 소림(小林)의 속가 제자가 되며 한국 무림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어휴. 어디 트로트 방송 하는 데 없나?"
번화가에 위치한 커다란 한식집 주방.
특집 방송을 보고 있던 찬모 중 한 명이 불만 어린 목소리로 리모컨을 누르지만 원했던 트로트 방송을 하는 채널은 나오지 않았다.
곁에 앉아 나물을 무치던 다른 찬모가 옆구리를 쿡 찌르곤 본래 보던 채널로 되돌렸다.
"벌써 시험 시즌이잖아."
거기에 다른 찬모도 한 마디 거들었다.
"냅둬. 도진 엄마가 얼마나 열심히 보고 있는데 채널을 돌리면 어떡해."
"아, 그렇지. 그러고보면 도진이도 시험 보겠네."
자리에 모여 반찬을 만들던 다섯 명 중 네 명의 시선이 한 명에게로 모여든다.
다름 아닌 도진의 어머니, 서정원이었다.
이곳은 서정원이 일하는 한식집이었던 것이다.
찬모만 다섯을 둘 정도로 장사가 잘 되는 곳. 그만큼 일이 고되지만 월급도 잘 쳐줘서 서정원은 악착같이 버티며 이곳에서 일해왔다.
"어휴. 아들이 무림학교 다닌다고 그렇게 자랑하더니."
"그러게 말야. 이번에 아주 큰일 했지."
달동네 살며 내세울 게 없는 삶. 서정원은 그래도 아들이 무림학교에 다닌다며 앞으로 크게 성공할 거라 말해왔다.
그동안은 그 자랑이 공허했다.
무림학교 중등반은 흔하디흔했으니까.
서정원은 아들을 믿어도 함께 일하는 다른 찬모들이 믿기엔 부족했으니까.
하지만 요즘 들어 그 자랑에 생기가 깃들었다.
도진이 얼마 전 있었던 큰 이슈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혼자서 수십 명을 때려잡았다면서."
"수십 명까진 아니에요. 열일곱이었대요."
"그 흉악한 살인마도 잡았다지?"
"무림학교 고등반에 있던 학생이었다네요."
찬모들의 말에 서정원은 웃으면서, 자랑스레 대답했다.
좁은 동네인만큼 소문은 TV보다도 빠르게 퍼진다.
전국적인 관심은 얻지 못해도 이 동네에서만큼은 그 파급력이 대단한 것이다.
"대단하네. 그럼 도진이도 고등반 합격은 따놓은 당상이겠네."
"숭무고에 갈 거라고 했어요."
"어머머! 숭무고? 내가 아는 그 숭무고 맞아?"
"네. 그 숭무고요."
숭무고. 명문 중의 명문 무림고.
이 동네 출신으로 숭무고에 간다는 건 학원조차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열악한 환경의 산골 학생이 서울대에 입학하는 것만큼, 혹은 그보다 더 대단한 일이다.
이제는 불가능해져 버린,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만큼이나 기적적인 일.
"진짜 대단하네. 숭무고 나오면 그 대기업 합격은 일도 아니라던데."
"그렇다고 하더라구요."
"그 정도면 여기 후기지수 소개에 나왔어야 하는 거 아냐?"
한 명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TV로 향했다. 이번에 고등반으로 진학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주목받는 인재를 추려보는 방송.
숭무고에 지원할 정도면, 그리고 동네에 소문이 파다한 도진이라면 나올 법도 한데 언급이 없다.
조금 질투가 담긴 찬모의 말에도 서정원은 표정을 찡그리지 않았다.
"이런 방송은 반쯤은 홍보잖아요. 우리 도진이는 굳이 이런 데 안나와도 금방 유명해질 거예요."
자랑스런 아들은 수석으로 합격하겠다 말했다.
굳이 이런 방송으로 띄워주지 않아도 숭무고 수석이 되면 그 어떤 것도 필요치 않은 증명이 된다.
때문에 서정원은 언짢을 이유가 없었다.
아들이 수석으로 합격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어구, 자신이 대단하네. 아들 합격하면 한턱 쏠 거지?"
누군가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택시비마저 아껴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는 서정원에게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말.
그러나 서정원은 망설임없이, 자신있고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아들이 준 용돈이 있었으니까.
* * * *
아침.
도진은 깔끔하게 샤워를 하고 벽에 걸린 교복을 손에 들었다.
흐릿한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낡고 꼬질꼬질 했던 교복은 정성스레 다려져 각이 잡혀 있었다.
어머니가 잠을 줄여 다려준 교복은 아직도 다리미의 온기가 남은 듯 따듯하게 느껴졌다.
사락.
개량 한복을 닮은 무복(武服)을 입으니 새삼 기분이 특별하다.
다시는 입을 일이 없었던 무복을 입으니 꿈과 함께 영원히 삶에서 제외되었던 무림이란 게 이제는 뗄 수 없는 삶의 한 요소가 되었음을 체감한다.
도진은 꾸욱, 주먹을 쥐며 몸 속을 도는 천마기의 강렬한 감각을 느끼며 바깥으로 나갔다.
개학 첫날.
깨우지도 않았는데 동생들은 이미 일어나 학교갈 준비를 마쳐 두었다.
고단히 잠든 어머니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 스스로 아침까지 차리는 대견한 동생들이다.
도진도 빠지지 않고 함께 아침상을 차려 먹은 뒤 집을 나왔다.
슬슬 동장군의 힘이 빠지는 시기. 도진은 한기가 한풀 꺾인 바람을 느끼며 동생들과 함께 학교로 향했다.
"히히."
"덥다. 그지?"
"응!"
동생들은 기운차게 걸으며 웃었다.
도진과 함께 아울렛에 가 샀던 패딩을 자랑하지 못해 안달난 모습들이다.
유명 메이커의 물건도 아니었다. 그러나 형이, 오빠가 사줬다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좋아하니 도진도 동생들처럼 올라가는 입꼬리를 말리지 못했다.
전생에 제대로 하지 못했던 맏이 노릇을 이제 해줄 수 있다.
"근데 오빠는 정말 그렇게 입어도 안 추워?"
몸을 돌려 묻는 유진이에게 도진은 씨익 웃어 주었다.
"오빠 무림인이야. 이 정도로 추울 리가 없잖아."
한서불침(寒暑不侵).
내공이 경지에 이르면 추위와 더위가 침범하지 못한다.
물론 도진은 아직 그 정도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혈도를 맹렬하게 달리는 천마기는 신공의 기운답게 어느 정도 비슷한 효과를 내 주었고 단련된 육체가 더해지니 영하로 떨어지지 않고서야 크게 추위를 느끼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덕분에 2월 말임에도 솜이 들어간 동복만으로도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공부 열심히 하고."
"응!"
동생들을 먼저 학교에 바래다 주고 도진도 학교로 향했다.
문월무림중학교.
지역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구색만을 갖추고 설립된, 역사와 전통조차 갖추지 못한 학교.
그렇기에 말 그대로 삼류에 불과한 학교.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가야 하는 거리에 있는 그 학교가 도진이 다니던 무림학교다.
그래도 무림중학교라고 함께 버스를 탄 학생들의 시선이 도진을 스쳐간다.
전생에서의 도진은 그 시선마저 부담스러울 정도로 비참한 신세였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당당하게 섰다.
과거와는 다르다.
움츠러들 필요도 이유도 없다.
"헉. 김도진."
"김도진이다."
"저 사람이 도진 선배야?"
버스에서 내려 학교를 향해 가는 길에 접어들자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그들 모두가 도진을 알아보았다.
학교에서 폭군으로 군림하던 치환 패거리를 혼자서 박살내 버린 그 이야기가 좁은 동네에 퍼지는 건 일도 아니었기에.
혹시나 일진 중 한 명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워했던 도진은 이미 없다.
오히려 주위의 학생들이 도진을 두려워한다.
교실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없는 듯, 죽은 듯 고개를 숙이고 존재감을 지워야 했던 전생의 도진은 죽었다.
존재만으로도 타인을 압도할 수 있는 무림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드르륵.
조용한 교실에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려퍼지고 담임이 들어왔다.
50대의 삶에 찌든 삼류 무인 출신의 선생이다.
"지원서 여기 놔둘 테니까 고등반 진학 희망자는 작성해서 교무실로 가져와라. 그리고 오전 수업은 통째로 자율 자습이다."
"오오!"
간략히 할말만 하고 환호를 들으며 담임은 나가 버렸다.
"족구 뛰자."
"오락실 갈까?"
삼삼오오 모여 족구하자며, 놀자며 헤쳐 모이는 학생들을 지나쳐 도진은 지원서를 하나 챙겼다.
이 반에서 유일하게 지원서를 챙긴 학생이었다.
스스로의 재능의 한계를 통감하고서, 혹은 고등반에 진학할 수 없다는 현실을 알게 되면서 도진을 제외한 반의 모든 학생은 진학을 포기한 것이었다.
무림학교 고등반 진학 지원서.
이름, 학교 등 간단한 정보를 기입하고 나면 1지망, 2지망, 3지망 학교를 쓰게 되어 있다.
복잡하지 않게 딱 필요한 것만 기입하면 되는 심플한 지원서다.
이토록 지원서가 심플한 건 무림학교 진학이 철저하게 실력 검증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도진은 자신 있게 지망 학교 모두를 숭무고로 채울 수 있었다.
다른 건 필요치 않다. 돈이 없어도, 오직 실력만 있으면 그 명문고에 진학할 수 있다.
도진은 일필휘지로 채운 지원서를 들고 교무실로 향했고, 담임에게 그것을 제출했다.
무인이라기엔 초라한 모습의 담임은 그 지원서를 받아들고선 으음, 하고 침음성을 내뱉었다.
1지망 : 숭무고
2지망 : 숭무고
3지망 : 숭무고
으레 그렇듯 무림학교의 진학 지원서도 1지망은 상향 지원, 2, 3지망은 안전하게 하향 지원을 하는 전략을 주로 쓴다.
그러나 도진이 내민 지원서에는 오직 숭무고만이 쓰여 있었다.
그 외엔 볼 필요도 없다는 자신감이, 힘 있는 필체와 눈앞에 선 도진에게 가득했다.
'그렇겠지.'
무협지도 아니고 은거 기인에게 무공을 사사받았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게 낱낱이 드러나 있는 일반 무공이 아니라 강력한 고유 무공이며 그 힘을 체감했다면 얼마든지 자신감을 가질 만하다.
'하지만 그래도.'
'명문 무림고'라는 이름의 문턱은 상상 이상으로 높고 견고하다.
그냥 고유 무공도 아니고 강력한 고유 무공이 기본이 되어 버리는 전혀 다른 세계.
진짜 무림의 입구.
담임, 삼류 무인이었던 오형구는 도진에게 시선을 향했다.
"정말로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 조금만 하향 지원을 해도 좋을 텐데."
시선을 마주한 도진의 눈동자는 일말의 흔들림도, 의심도 보이지 않았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좋아. 그럼 숭무고에만 원서 넣는다."
"네."
그리하여 3일 뒤.
도진은 전생에서는 그 입구에조차 가보지 못했던 숭무고등학교의 정문 앞에 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