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18화 (18/741)
  • 18화

    심상세계.

    "이렇게 보면 도진이는 협객인데 말입니다."

    장호는 상미의 마음을 얻어낸 도진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상미가 가지고 있던 선(善)을 믿고 이내 교화해냈다.

    그리고 깊은 인연을 만들기까지 했다.

    이것은 누가 봐도 그린듯한 정파의 협객이요, 시대의 주역이 될 자의 모습이었다.

    위지혁은 그런 장호의 말에 피식 웃었다.

    "패도(覇道) 또한 도(道)이니 통하는 면이 있지 않겠나."

    거기에 도가 없다면 패도는 패도가 아니라 '패악'이라 불렸을 것이다.

    "도를 따르니 마두(魔頭), 거마(巨魔)가 아니라 천마(天魔)라 불리는 것이지."

    그리고 그런 천마가 교주로 있기에 마교(魔敎)는 종교였다.

    "자네가 있던 시절의 신교(神敎)는 뭐라고 불렸나? 여전히 마교였나?"

    "네, 그랬습니다. 마교라 불리웠고 악의 소굴이었으며 두려움의 대상이었지요."

    장호는 위지혁이 활동했던 시절보다 300년이나 뒤의 사람이었다.

    그때도 여전히 마교는 존재했으며 정파가 감히 토벌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단일 최대의 세력이었다.

    "그저 두려움의 대상이고 악의 소굴이었다면 어찌 그리도 많은 사람이 따랐으며 종교로 남을 수 있었겠나. 거기에 도가 있었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 도는 소위 말하는 사이비가 아니었다.

    "우리는 하늘의 심판을 믿지 않았어. 정말로 하늘의 심판이 있었다면 '마교'는 존재해서는 안 됐으니까."

    마교에 귀의한 자들은 하늘의 심판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다.

    세상의 불합리에, 그리고 인간 세상의 불합리에 휩쓸린 자들이었다.

    정파의 껍질을 뒤집어 쓰고, 인두겁을 쓰고 패악을 저지르는 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마(魔)가 되기로 한 자들이었다.

    "법(法)이란 건 항상 그랬지. 가진 자들을 처벌하지 못했고 피해자들을 위하지 않았어.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심판하기로 했지."

    정파의 어른을 연기하며 어린 아이를 간살한 명숙의 골통을 부쉈다.

    겨울을 나기 위한 쌀을 수탈하고 아내마저 수탈한 관리의 목을 베어 마을 입구에 매달았다.

    "악하지 않으면 베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러나 우리를 악으로 규정하고 칼을 들이민다면 이 또한 맞서길 주저하지 않았다. 무지(無智) 또한 죄이니까."

    그래서 마교는 악의 소굴이 되었다.

    "그때는 그랬지. 하지만 이 세상은 조금 달라. 배움의 길이 열려 있고 인터넷이란 게 있어서 혹세무민(惑世誣民)이 쉽지 않거든."

    "그렇지요."

    세상은 '민주주의'가 대세지만, 파고들면 여전히 철저한 계급 사회다.

    다만 하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백성들이 무지하지 않다는 거다.

    "과연 이런 세상에서 '마교'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위지혁은 그때를 기대하며, 부모를 마주한 도진을 장호와 함께 지켜보았다.

    * * * *

    김서우.

    서른 둘에 도진을 얻었던 삼남매의 가장이다.

    이제 오십이 성큼 다가온 나이임에도 젊은이 부럽지 않은 단단한 근육과 건장한 체구가 돋보이는 남자다.

    그런 김서우를, 아버지를 보고 도진은 꾸욱 주먹을 쥐어야만 했다.

    도진의 마지막 기억 속에 남은 아버지는 어두컴컴한 골방의 구부정하고 앙상한 노인이었다.

    상징 같았던 근육이 모조리 쪼그라들고 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그런 노인.

    그랬던 아버지가 지금, 멀고 먼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단단한 바위 같은 아버지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온갖 풍파에도 결코 부서지지 않는, 묵묵히 그것을 받아낸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바위 같은 아버지.

    "저녁은 먹었니?"

    "네."

    매일 당직으로 회사에 머물던 김서우가 이렇게 집에 들린 건 도진이 할 말이 있다고 연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부부는 거실에서 도진을 마주하고 앉았다.

    도진은 앉자마자 처억, 통장과 도장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니?"

    서정원의 물음에 도진은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포상금 받은 거 넣어둔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부부는 아들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부부가 입을 열기 전에 도진이 먼저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800만원을 받았어요. 거기서 400만원은 제가 미래를 위해 투자하느라 썼고 100만원은 요긴하게 쓸 생각으로 제가 가지고 있어요. 그러고 남은 300만원이에요."

    "……."

    "저는 필요한 데 다 썼으니까 이건 아버지랑 어머니가 쓰세요."

    만약 그냥 필요한 데 쓰시라고 말하며 내밀었다면 부부는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당하게 무슨 미래에 투자하느라 썼고 자기 쓸 돈도 있다고 하니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해도 터억 막히는 게 있었다.

    도진은 씨익 웃었다.

    "그냥 용돈이라 생각하세요. 아버지, 어머니께 들으셨죠? 제가 이제 고수가 될 거거든요. 그러니까 앞으로 성공은 보장되어 있고 돈도 아마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벌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이 정도는 아무 부담없이, 말 그대로 용돈이라 생각하시면 돼요."

    다다다 말하고서 도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수련하러 가볼게요."

    그렇게 아들은 신발을 신고 휑하니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많이 커 버렸네."

    "당신 닮아서 부끄럼쟁이가 됐네요."

    김서우는, 부끄러워서 바깥으로 도망가 버린 아들이 남긴 통장을 소중히 쥐었다.

    * * * *

    열두 시가 넘은 시간.

    도진은 예정에 없던 바깥 단련을 끝내고 조용히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홀로 소주를 마시고 있던 아버지의 등을 마주했다.

    "……."

    어릴 적 아버지는 영웅이었다.

    무림학교를 다녔던 아버지의 팔뚝은 너무나 단단하고 힘이 세서 도진을 번쩍 들어 주었다.

    도진만큼이나 커다란 짐도 번쩍 번쩍 들던 아버지였다.

    못하는 게 없던 아버지였고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랬던 아버지가, 하루아침에 사업이 망했다.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망해 버려서 도진네 가족은 이곳 달동네로 떠밀려 와야 했다.

    그때부터였다.

    도진이 아버지를 믿지 않게 된 것은.

    그리고 아버지를 보기도 힘들게 되었다.

    아마 그것은 자신과 유진이 때문이었을 거라 도진은 생각했다.

    '우리 왜 이렇게 됐어?'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 돼?'

    단단한 바위 같던 아버지는 바깥의 풍파에 결코 무너지거나 부서지지 않았다.

    그러나 바위 같지 않던 속을 찌르는, 유진의 말과 도진의 시선은 견디기가 힘들었기에.

    그래서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는 대신 바깥의 풍파를 견디길 택하셨던 게 아닐까.

    아파도 버티고 지킨다.

    그렇기에 아버지.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다.

    아프지만 지키기 위해 버티는 것이다.

    도진은 상미의 아버지와 달리 가정을, 삼남매를 지키기 위해 무너지고 싶어도 무너질 수 없었던 아버지의 등을 향해 다가갔다.

    "아버지. 아직 안 주무셨네요."

    여상스럽게 웃으며 먼저 말했다.

    서우는 조금은 붉어진 얼굴로 도진을 보며 마주 웃었다.

    "이게 늦게 자는 게 버릇이 돼놔서 잠이 잘 안 오네."

    당직을 매일 서다보니 이 시간엔 도무지 잠이 오지 않게 됐다.

    해가 뜰 즈음 회사 구석의 간이 침대에서 쪽잠을 자는 게 버릇이 됐다.

    잠을 쫓기 위해 온갖 생각을 하다보니 잡념이 늘어서 더더욱 잠드는 게 쉽지가 않았다.

    알콜로 뇌를 마비시키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계란 하나 해드릴까요?"

    "됐어. 이거면 충분해."

    식탁 위에는 김치와 나물 하나가 놓여 있다.

    도진은 냉장고에서 계란 세 개를 꺼냈다.

    "저도 간식 좀 먹으려구요."

    그러고선 능숙하게 계란프라이 세 개를 만들어 내놓았다.

    유진이에게 배워두길 잘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도진은 마주 앉았다.

    "저도 한 잔 해 볼까요?"

    "아직 피도 안 마른 게 무슨 술이야."

    "하하. 그럼 전 물 마실게요."

    그러면서 가져온 게 소주잔이다.

    주류 회사의 로고가 새겨진 소주잔은 술을 납품받는 식당에서 흔히 덤으로 받을 수 있는 바로 그 잔을 도진의 어머니 정원이 받아 온 것이다.

    도진은 식탁 위 소주를 들고 비어 있던 아버지의 잔에 따랐다.

    전생에는, 한 번을 이렇게 술을 따라 드린 적이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됐는데 집에 있기 싫어 기숙사를 택했다.

    집안에 부담을 준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홀로 소주를 따르는 아버지를 봤으면서도 머릿속에 남겨두지 않으려 했다.

    외면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했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그랬기에 지금, 홀로 앉아 있던 아버지에게 술을 따라 드릴 수 있는 지금은 이토록 특별했다.

    "저는 물."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며 물을 작은 잔에 따랐다.

    그걸 차오르는 어떤 것과 함께 꿀꺽 삼킨 뒤 말했다.

    "아버지. 저랑 내기 하나 하실래요?"

    "갑자기 무슨 내기?"

    "저, 숭무고에 갈 거거든요."

    "…숭무고?"

    "네. 숭무고요."

    김서우는 무림학교 중등반을 졸업한 '삼류 무인'이었다.

    고아였기에 재능은 있었으나 고등반에 진학하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래서 삼류 무인이지만 그래도 무림인이기에 숭무고가 어떤 곳인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도진은 지금 당당히, 너무나 당연하게도 거기에 갈 것이라 말했다.

    "그렇구나. 그럼 이제 우리 집안에 자랑거리 하나 생기는 건가?"

    서우는 웃으며 말했지만 속으로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숭무고는 명문인 만큼 많은 돈이 든다. 과연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걱정이 드는 것이 슬프고 자괴감이 들었으나 현실은 냉혹했다.

    그런 서우에게 도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냥 입학 말고, 수석으로 입학할 생각이에요."

    "……수석."

    "네, 수석이요. 수석으로 입학하면 전액 장학금에다 용돈까지 나온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니까 기왕 들어갈 거 수석으로 들어가려구요."

    숭무고 수석.

    그것은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명문 무림고의 수석은 다른 세상을 사는 자들을 위해 준비된 자리였다.

    그런 자리에, 서우의 아들이 앉겠다 선언했다.

    "그리고 여기서 내기. 제가 수석으로 입학하면 아버지는 앞으로 평일에 두 번은 당직 서지 않고 집에 들어오기."

    "뭐라고?"

    "그러니까 제가 수석으로 입학하면 아버지는 평일에 두 번은 당직 서지 말고 집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거죠. 주말엔 돈 더 많이 주고 생색내기도 좋으니까 그냥 하셔도 되는데 평일에 두 번은 집에 들어오는 겁니다."

    "……."

    "그리고 제가 한 번 더 수석 먹으면 평일에 세 번 집에 들어오기. 어때요.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 아닌가요?"

    허무맹랑한 내기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서우가 이길 수밖에 없는 내기.

    "제가 손해보는 건데 아버지니까 특별히 이렇게 해 드리는 겁니다. 콜?"

    "…그래, 콜이다."

    "오케이. 무르기 없깁니다? 남자 대 남자의 내기니까 보증 안 세워도 되죠?"

    "프흐흐. 그래. 남자 대 남자로 하는 내기다."

    "넵. 그럼 저는 내기를 이기기 위해서 다시 또 수련하러 갑니다."

    "안 잘 거야?"

    "자야죠. 근데 제가 고수잖아요. 잘 시간에 심법 수련하는 게 더 이득이거든요."

    너스레를 떨고서 도진은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로 돌아오면서 정신도 어려진 모양이다.

    간지럽고 부끄럽다.

    도진은 그 간지럽고 부끄러운 것을 털어내기 위해 한계까지 몸을 몰아붙였다.

    그날, 평소의 한계를 한참 넘어설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꺼내지 못했던 그 말들이 몸 속에 남아 내공처럼 질주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도진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

    그렇게, 본래는 혹독하고도 시렸던 겨울이 하나도 춥지 않게 지나가고 봄이 성큼 다가왔다.

    무림학교 고등반 입학 시험 시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