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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12화 (12/741)
  • 12화

    후욱.

    목소리와 함께 피냄새가 먼저 도진에게 닿았다.

    사박.

    기척은 그 다음에야 느낄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도진은 상대가 고수라는 걸 바로 깨달았다.

    천마심공에 입문하고 2성에 오르며 천마기가 내달리는 도진의 감각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그런 도진이 조용한 숲속에서, 그것도 방금 싸움이 끝나 아직 감각이 날카로운 상황이었음에도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상대의 존재를 잡아내지 못한 것이다.

    천천히 몸을 돌린 도진의 눈에 '두 사람'이 보였고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한 명은 다름 아닌 상미였다.

    기다란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있고 드문드문 보이는 얼굴과 살갗에는 시뻘건 피칠이 되어 있다.

    한겨울 시린 밤의 숲속에 제대로 옷도 갖춰 입지 못한 채 질질 끌려온 처참한 몰골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상미를 끌고 온 것이, 한 손으로 상미의 목덜미를 붙잡고 있는 무림학교 고등반 교복을 풀어헤친 남자였다.

    치환만큼이나 커다란 키인데 비쩍 말라서 날카롭고 꺼려지는 인상이 강했다.

    그러나 언뜻 보이는 몸은 단단한 근육이 들어차 있어 그것이 일부러 만든 체형임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손에 든 단검과 체형. 속도를 중시하며 상대의 빈틈에 단검을 박아 넣는 무공을 익혔을 것이다.

    도진은 이런 특징을 가진 고등반의 무림인을 알고 있었다.

    "…송재익."

    송재익. 이 근방에서 나쁜 쪽으로 워낙 유명한 인물이었기에 도진도 몇 번 들어본 이름이었다.

    일진들 사이의 일진.

    대단한 실력과 실력보다 더 대단한 '개새끼'로 유명했다.

    그 실력이 아니었으면 벌써 뒤져서 파묻혔을 거라고 일진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았으나 그걸 면전에 대고 할 수 있는 놈은 없었다.

    그랬던 놈들은 모두 병원에 실려가거나 사라졌다고 했었다.

    그 송재익이 지금, 도진의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송재익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저걸 믿고 있었구나.'

    이곳에 도착한 순간 치환 패거리들의 당황을 도진은 놓치지 않았었다.

    무언가 계획대로 풀리지 않았기에 보였을 당황.

    그러나 그것이 무언지 알 수 없었는데 지금 알게 되었다.

    "선배를."

    털퍽.

    파파팍!

    목소리, 사람이 바닥에 엎어지는 소리, 그리고 고속으로 땅을 밟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와 함께 도진의 눈앞에 송재익이 나타났다.

    순식간에 송재익이 도진과의 거리를 좁힌 것이었다.

    "감히 이름으로 불러?"

    쉬악!

    피가 묻은 단검이 도진을 노리고 쏘아졌다.

    보는 순간 대응하면 이미 늦었을 만큼 대단한 속도.

    그러나 투로를 깨달은 도진은 미리 알고 회피할 수 있었다.

    슉!

    단검이 허공을 그었다. 그 소리가 도진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는데, 단지 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

    도진의 티셔츠 가슴팍이 잘려 있었다.

    그 잘린 티셔츠를 통해 겨울밤의 시린 바람이 파고들었다.

    시선의 끝, 가슴팍을 향해 쏘아진 투로를 미리 읽고 피했음에도 완벽하게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투로를 읽지 못했다면 티셔츠가 아닌 살이 찢어졌을 상황이었다.

    그것을 의도했던 송재익은 고개를 모로 꺾었다.

    "어쭈? 피해? 이 새끼 봐라?"

    진심으로 한 공격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겨우 중삐리따위가 자신의 공격을 피했다는 게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다.

    "건방진 새끼."

    날카로운 얼굴이 일그러지며 송재익이 다시 쇄도했다.

    이번엔 제대로 보법(步法)을 밟고 초식을 운용한 공격이었다.

    파팍!

    마치 권투의 스텝을 밟듯 송재익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경쾌하고 빠른 발걸음. 심지어 그것이 채찍처럼 휘기까지 하니 웬만한 안력과 감각으론 거리조차 가늠할 수 없다.

    편사보법(鞭蛇步法).

    송재익이 마음에 안드는 놈들을 일방적으로 난도질할 수 있도록 해준 보법이었다.

    쉭!

    스텝으로 거리를 줄였다 늘이던 송재익이 돌연 상체와 함께 오른손의 단검을 쏘아내듯 뻗었다.

    마치 권투의 잽을 연상케하는 번개 같은 일격.

    집중하고 있던 도진은 크게 물러나 그 공격을 피했다.

    송재익은 그런 도진을 뒤쫓아 기세를 줄이지 않고 달려들어 다시 한 번 단검을 뻗었다.

    이번엔 펜싱을 닮은 움직임이다.

    핏!

    그 속도를 피하지 못하고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송재익은 입을 찢어 잔혹한 웃음을 띠며 압박하듯 보법을 밟았다.

    파파팍!

    주먹이 닿을 정도로 거리를 줄여 공격을 유도한다.

    거기에 이끌려 도진이 주먹을 뻗으니 기다렸다는 듯 딱 한뼘만 물러나 주먹이 닿지 않을 거리를 확보했다.

    이어 주먹을 회수할 틈을 주지 않고 마치 뱀처럼, 기회를 노리고 있던 뱀이 튀어오르듯 비어 버린 상체로 단검을 뻗었다.

    보통 사람보다 팔이 긴 데다 단검까지 쥔 송재익은 도진보다 리치가 길었기에 바로 반격이 가능했던 것이다.

    도진은 그 칼에서 시작된 선을 읽고 크게 물러나 공격을 피했다.

    피하는 과정에서 팔뚝이 길게 베였다.

    거리를 벌린 도진을 응시하는 송재익은 여전히 입을 주욱 찢는 듯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또 피해 봐."

    파팍!

    다시 송재익이 쇄도했다.

    핏!

    정면에서 쏘아지는 단검.

    도진의 움직임을 상회하는 속도였으나 정직한 투로였기에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투로를 읽고 한 발 먼저 움직여 피해냈다.

    알고 있었다는 듯 단검을 뻗은 손목이 뱀처럼 휘어지며 도진을 뒤쫓았다.

    "큭."

    손목만 꺾인 것처럼 보이는데 단검의 궤적은 복잡한 곡선을 그리며 도진을 뒤쫓는 뱀이 되었다.

    손목만이 아닌 팔꿈치와 어깨, 상체는 물론이요 다리까지 온몸이 연계하여 움직이며 복잡한 투로를 그렸기 때문이다.

    피피핏!

    집요한 뱀의 이빨에 도진의 몸 곳곳에서 피가 튀었다.

    앞서 상대한 치환의 패거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평범한 학교에 다니는 일진이란 것들의 공격은 단순한 직선이었다.

    그나마도 점과 점을 이을 수준조차 아니어서 무시해도 될 공격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무림학교에 다니던 것들은 그래도 타점을 정확히 보고 공격했으나 역시 대부분이 초식을 따르는 정직한 공격이고 기껏해야 한 번 꺾는 정도라 읽는 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송재익은 달랐다.

    고등반에서 행패를 부릴 정도의 실력을 가진 송재익은 능숙하게 초식을 운용하며 변초까지 구사했다.

    거기에 내공이 실려 있음은 물론이고.

    구사하는 무공 자체가 쉼없이 움직이며 거리감을 흩트릴 뿐 아니라 빠른 속도를 기반으로 하여 변화를 주고 허초까지 섞으니 선을 잇기 위한 끝점을 읽기가 힘들었다.

    아까와 달리 1:1 상황이라 온전히 송재익에게만 집중할 수 있음에도 그러했다.

    '…밀리고 있어.'

    능숙하게 무공을 구사하는 고등반의 무림인.

    송재익의 경지가 지금의 자신보다 위에 있음을 도진은 인정해야만 했다.

    천마의 후계자가 되었지만 현실의 시간으로 치면 채 한 달조차 배우지 못한 도진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정신은 몰라도 육체는 아직 걸음마조차 떼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후욱, 후욱."

    도진이 거칠게 호흡을 내뱉었다.

    스텝을 밟으며 거리를 재던 송재익이 비웃으며 말했다.

    "어때. 아프지?"

    그러면서 보란듯이 현란하게 단검을 손 안에서 놀렸다.

    그 단검의 시린 빛이 도진을 흔들고 있었다.

    무림학교의 중등반과 고등반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만드는 건 성장한 육체와 더 상위의 무공만이 아니다.

    바로 '실전(實戰)'이다.

    무림학교 고등반에 합격한 학생에게는 '무기 소지 허가증'이 발급된다.

    그러니까 합법적으로 무기를 소지하고 또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에 따라 고등반부터는 실제 검이나 도, 창 등 날이 세워진 무기를 가질 수 있으며 이것으로 대련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대련은 사실상 실전이나 다름없다.

    서로가 날붙이를 들고 살을 가르며 피가 튀는 비무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요청을 넣으면 '실습'으로 흉악한 뒷골목 흑도 무림인들의 토벌에 차출되어 나갈 수도 있다.

    이렇게 실전으로 다져진 고등반은 그저 가르치는 대로 배우고 목숨의 위협을 느낄 일이 없는 중등반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무림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도진은 아직 그 '진짜 무림인'이 되지 못했다.

    팍!

    뻗어오는 단검의 투로를 읽고 한 걸음 물러선다.

    아니, 한 걸음 반을 물러섰다.

    한 걸음으로 피할 수 있는 공격을 반걸음 더 물러선 것은 공포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흉기가, 칼날이 들이밀어지는 상황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그것이 상대가 진심으로 베려는 의지를 담아 휘두른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반 걸음 더 물러나는 것으로 모든 것이 파탄난다.

    도진은 공격할 기회를 잃게 되었다.

    심지어 리치가 더 긴 송재익을 상대로 스스로 거리를 벌린 꼴이 되었다.

    이로 인해 송재익은 더욱 유리한 위치에서 일방적으로 도진을 공격할 수 있었다.

    이것이 도진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진짜 이유였다.

    그것을, 도진의 안에서 위지혁과 장호가 지켜보았다.

    "…좋지 않군요."

    "뭐, 그렇구나."

    무림인이 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무공. 그리고 무공을 익힐 수 있는 끈기, 재능 등.

    그런 것들을 사람들은 논하겠지만 사실 그것들은 2순위다.

    1순위는 바로 '폭력을 이겨낼 수 있는 심지'다.

    무림인이란 날붙이를,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는 흉기를 들고 그것을 더없이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을 구사하여 싸우는 사람이다.

    그 흉포한 폭력에 맞설 수 있는 굳은 심지가 없다면 제아무리 재능이 있고 상승의 무학을 익혔다 해도 무림인이 될 수는 없다.

    고등반에 오르면 무기 소지 허가증을 발급하고 실제 무기로 대련을 치르도록 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폭력을 이겨낼 수 있는, 날붙이를 두려워하지 않을 심지를 기르도록 하기 위하여.

    여기서 도태되면 무림인이 되지 못한다.

    고등반에 오를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활용할 수 없기 때문에.

    '무공을 배운 일반인'으로서 다른 삶을 찾아가게 된다.

    "녀석은 지금껏 진짜 무림인을 상대해 본 적이 없었으니……."

    전생에서 도진은 고등반에 올라 진검을 지급 받았으나 자신의 무기로 소화해 내지 못했다.

    심지어 낙제점을 받아 대련에 참가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고가 나 무림학교를 자퇴해야만 했다.

    이후로 무림과는 완전히 연이 끊어졌다.

    때문에 도진은 처음이었다.

    진짜로 자신을 난도질할 기세로 흉기를 휘두르는 무림인을 상대하는 건.

    심상세계에서야 몇 번이고 죽음을 체험했다지만 그것은 한없이 현실에 가깝다 해도 결국 '거짓'이다.

    그러니까 도진은 한없이 현실에 가까운 거짓이 아니라 진짜 현실을 마주하고 이겨내야만 했다.

    쉭!

    시야 가득 들어오는 시린 날붙이에 도진의 몸이 굳어 찰나의 딜레이를 만들고.

    팍!

    경직된 몸은 움직임에 파탄을 내고 더욱 커다란 동작을 만들었다.

    상체만 살짝 젖히면 될 것을 뒷걸음질쳐 버렸다.

    주먹을 뻗어도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가 벌어지고 송재익은 그 거리를 이용하여 리치 밖에서 마음껏 단검을 휘두른다.

    피핏!

    일방적인 공격을 채 다 피하지 못하고 몇 번이고 피가 튀었다.

    "이히히히히!! 죽어! 죽으라고! 버러지 새끼야!!"

    흥분한 송재익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승리를 확신하며 가학성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긴장했다.

    중삐리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그러나 단검을 피하는 움직임에서 대번에 이놈이 실전 경험이 없다는 것을, 무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읽어냈다.

    그 순간 긴장을 버렸다.

    무기를 두려워하는 놈은 무공을 배워봤자 쭉정이였으니까.

    봐라.

    그럴싸한 무공을 익혔을 놈이 무기를 두려워해 가장 기본이 되는 거리 싸움조차 하지 못하고 단검을 피하기에 급급하지 않은가.

    이대로 농락하며 몇 분만 더 포를 뜨면 알아서 엎어질 것이다.

    "허억, 허억."

    거칠어진 도진의 호흡이 송재익에게 확신을 주었다.

    저놈은 공포를 극복하지 못한다.

    훗날 경험을 쌓고 날붙이에 익숙해지면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의 가정. 적어도 이 자리에서 일어날 일은 아니었다.

    '아니, 평생 극복하지 못하게 해주마!'

    송재익의 눈이 흉악하게 번들거렸다.

    놈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커다란 흉터를 남겨주기로 했다.

    무림인으로 자라날 가능성을 완전히 지워버릴, 흉터와 함께 결코 지워지지 않을 공포를 새겨주려 마음먹었다.

    파팍!

    송재익의 스텝이 한층 화려해졌다. 그렇게 화려해진 스텝으로 도진을 현혹한 송재익의 '왼손'이 쏘아졌다.

    적사탐혈(赤蛇貪血).

    상대가 오른손에 집중할 때 기습적으로,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던 왼손으로 숨겨두었던 단검을 뽑아 찌르는 이 초식은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는 초식이다.

    쉭!

    단검이 도진의 빈틈을 파고든다.

    피하기엔 늦었다.

    간격을 빼앗긴 데다 심지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공격이다.

    속도에서 밀리는데 투로조차 예측하지 못했던 공격이 허를 찌르며 들어온다.

    패배.

    도진의 머릿속엔 그 단어가 떠올랐고 반대로 송재익은 승리를 확신했다.

    그 순간.

    콰악!

    "……!!!"

    송재익이 경악했다.

    왼손의 단검을, 도진이 맨손으로 잡아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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