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
도진이 남매를 데려온 적이 없었던 시간.
그런 시간에 만곤이 남매를 납치하려는 순간 도진이 등장한 것은 당연히 우연이 아니었다.
도진은 이미 한 시간도 전부터 남매를 몰래 지키고 있었기에 이렇게 맞춰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한 번 손봐준 걸로 일이 깔끔하게 해결되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에 대비를 했다.
'복수를 하러 올 수도 있어.'
통제하지 않는 천마기를 일으킨 탓에 의도치 않게 공포를 심어주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깔끔하게 꼬리를 말고 사라질 거란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루종일 남매의 곁을 지키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오빠한테 전화해야 해. 알았지?'
'응!'
'호진이도.'
'응! 형!'
동생들은 도진의 당부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것만으론 결코 안심할 수 없었다.
위치 추적이 되는 키즈폰이긴 했으나 그걸 추적하는 사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확률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도진은 혼자 고민하지 않고 심상세계에서 위지혁에게 상담했고.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있겠군."
언제나처럼 일절 존재감이 없던 장호가 나타나 말했다.
"장 스승님."
"추종술, 그리고 무흔잠영(無痕潛泳)을 가르쳐 주마."
도진은 구배지례(九拜之禮)로 위지혁뿐 아니라 장호 또한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다만 지금까지 무공은 위지혁에게만 배웠는데, 장호는 '나에게 배우는 건 조금 뒤가 될 게다'라고 말했었다.
그 조금 뒤가 찾아온 것이었다.
위지혁은 장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슬슬 몇 수 배울 때가 되었지."
현실에서의 도진은 여전히 기초 공사, 땅을 다지는 중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은, 그리고 산보다 큰 빌딩을 짓더라도 결코 무너지지 않고 받쳐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공사였다.
그 단련은 현재진행형이었지만 언제까지고 육체 단련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충분한 시간부터 시작하여 모든 조건이 갖춰졌다면 모르겠지만 도진은 당장 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까.
천마기가 깃든, 한계를 거듭 넘어서고 있는 육체는 그 자체만으로도 어중이떠중이들을 압살하겠지만 앞으로 싸워야 할 '천재'들을 상대로는 부족함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장호가 나서 전수한 것이 '무흔잠영'이었다.
장호의 무공의 기초가 되는 신법(身法)으로 그 이름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어둠 속을 유영할 수 있으며 단순히 움직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연계하여 사용할 수 있는 온갖 체술(體術)을 포함한 완성형 무공이었다.
"무흔잠영의 기본은 억지로 '나'를 지우지 않고 자연 속에 동화하는 것이다."
'숨김'은 부자연스럽고 경계를 부른다.
그러므로 부자연스럽게 나를 지우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주변에 동화한다.
사람은 그늘에 숨은 그림자는 강하게 경계해도 대놓고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맹이를 신경쓰지는 않는다.
눈으로 보긴 했으나 의식에 남지 않는 것이다.
"천마군림과 일통하는 면이 있을 테니 입문이 어렵지는 않을 게다."
장호의 말대로 도진은 '동화'라는 요결을 천마군림과 연결하여 금방 체득할 수 있었다.
심상세계에서 수천 번의 시행착오를 거듭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요결이 '시선(視線)'이다."
시선. 사람의 시야를 뜻했다.
"인간은 시야에 많은 것을 의존한다. 그 시야를 속이고 사각지대에 드는 것만으로도 대상에 한해선 완벽하게 사라질 수 있게 되지."
그 말과 동시에 도진의 시야에서 장호가 사라졌다.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다만 도진은 장호가 자신의 좌측 아래로 이동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는데, 천마심공으로 인해 날카로워진 감각 덕분이었다.
그리고 감각 덕분에 오히려 더욱 경이를 느꼈다.
장호는 그저 자연스럽게, 느릿하게 움직였을 뿐인데 역시 비약적으로 증가한 도진의 안력(眼力)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이다.
기척만 감추었다면 도진은 겨우 두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장호의 존재를 전혀 인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지금은 장호가 가르침을 주기 위해 노골적으로 도진에게 기척을 흘려준 것이었다.
장호는 거기까지 생각한 도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흔잠영이 말하는 '시선'은 시야에 국한되지 않는다. 상대가 보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의 사각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존재를 감추고 상대의 치명적인 사각에 접근하여 단번에 암살하는 것이 무흔잠영이었다.
"이 무흔잠영과 함께 추종술을 익히면 상승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흔잠영과 함께 전수받은 것이 추종술이었다.
추종술(追從術).
다른 말로는 추적술이라고도 한다.
남은 흔적을 더듬어 목표를 쫓는 기술.
기본이 되는 발자국부터 시작하여 대상을 추적할 수 있는, 상상도 못할 온갖 방법이 예의 검지손가락을 통해 전수되었다.
무흔잠영은 현실에서 단계를 밟아 스스로 깨달아야 할 무공이었기에 그냥 전수했지만 추종술은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바로 영혼에 '다운로드'하는 것이라 장호가 설명해 주었다.
이 추종술을 전수 받은 덕분에 혹여 유진이와 호진이가 납치당하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바로 뒤쫓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런 일은 아예 없는 게 제일이지만.'
유비무환. 준비해 두어서 나쁠 게 없고 다다익선, 재주는 많을수록 좋다.
그렇게 추종술과 무흔잠영을 전수받은 도진은 그날 아침부터 시간을 둘로 나눠 절반은 항상 하던 육체 단련과 심공 수련을, 나머지 절반은 바깥에서 추종술과 무흔잠영의 수련에 투자했다.
대상을 정하여 머릿속에 있는 추종술의 지식을 활용, 흔적을 더듬어 찾아가는 훈련을 하며 동시에 모든 움직임에 무흔잠영의 묘리를 섞어 존재함에도 존재하지 않고 한 점의 주목도 받지 않는 것을 목표로 수련한 것이다.
동시에 이 수련을 하며 달동네 전체, 문월동을 주의깊게 살폈다.
치환을 중심으로 하는 '동적팸'의 움직임을 주시한 것이었다.
같은 동네 출신이고 좁은 동네라 대부분 어디 사는지 알고 있으니 그곳들을 위주로 조용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치환이 퇴원한 것부터 시작해 산 중턱으로 모이는 것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기실, 도진의 대비와 조사는 상당히 어설펐고 한계가 명확했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도진이 상대하는 건 '프로'가 아니었으니까.
나 잘났네 하고 거들먹거리지만 그래봐야 중학생에 불과한 일진 패거리들이다.
그 생각과 움직임, 계획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건 그 두 배 이상을 산 도진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도진은 이 양아치들의 생각과 행동 패턴에 익숙했기에 더더욱.
치환이 퇴원하고 산 중턱에 모이기 시작했을 즈음부터 은밀히 유진이와 호진이를 지켜보았고 3일도 채 되지 않아 놈들의 움직임을 확인했고.
"꺼어……."
털퍽!
지금에 이르렀다.
도진은 엎어진 만곤을 넘어 휴대폰을 든 채 유진이를 보고 웃어 주었다.
한 손을 뒤로 가린 유진의 키즈폰이 도진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유진은 급박한 중에도 가르친 대로 도진에게 전화를 걸었고 동생인 호진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오빠!"
"혀엉!"
후다닥 달려와 다리를 붙잡은 유진이와 호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어, 유진아."
그리고 유진이를 칭찬해 주었다.
주변에서 은밀히 지키고 있었기에 전화를 하지 않아도 큰일은 일어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동생을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낸 것이, 그리고 무서울 텐데도 당부를 잊지 않고 지킨 것은 몇 번을 칭찬해도 부족할 만큼 장한 일이었다.
이렇게 칭찬으로 끝나는 경험과 기억이 앞으로 유진이의 성장에 좋은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다.
"집에 가자."
"응!"
손을 잡고 동생들을 집에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놀이터에는 도진에게 옆구리를 얻어맞고 엎어졌던 만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도망치지 않은 게 아니라 정신을 잃어 도망치지 못했던 것이다.
'혈도를 짚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도진은 혈도(穴道)에 대한 지식은 있었지만 특정한 혈도를 짚어 원하는 효과를 이끌어내는 점혈법(點穴法)은 아직 구사할 수 없었다.
점혈법이란 원하는 혈도를 필요한 만큼만 내공을 주입하여 제압하는 기술인데 아직 도진은 그 정도로 내공을 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온몸을 마비시키는 마혈(痲穴)이나 잠재워 버리는 수혈(睡穴)을 짚지 못해 우악스럽게 물리적으로 기절시켰던 것이다.
천천히 다가가 엎어진 만곤을 걷어찼다.
뻐억!
"커억!"
급소를 얻어맞은 만곤이 감았던 눈을 부릅뜨며 새우처럼 몸을 말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만곤을 한 번 더 걷어찬 뒤 도진이 말했다.
"너 이름이 뭐였더라……."
얼굴이 낯설진 않은데 친분이 없다보니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만곤은 고통에 꿈틀거리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뭐 어때.'
도진은 굳이 이름을 떠올리려 하지 않고 말했다.
"애들 모여 있지? 거기로 가자."
"……."
* * * *
만곤은 겨우 잦아든 격통에 억눌린 숨을 내뱉었다.
김도진.
무림학교에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을 땐 다른 세상 놈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치환의 밥'이 되어 버린 뒤로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하물며 무림학교에서 꼴지를 다투는 수준이란 말을 치환에게 들은 뒤론 더더욱 개무시했다.
한데 지금 실제로 겪은 도진은 도저히 그런 이미지와 매치가 되질 않았다.
고통에 바닥을 기는 자신을 바라보던 도진의 눈빛은 도저히 같은 사람을 보는 눈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하다못해 곤충을 눌러 죽인다 해도 그것보다는 감정이 실려 있을 것 같은 눈빛을 마주한 순간 만곤은 머리가 새하얘지며 그저 도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앞장서서 아지트를 향해 걸으며 만곤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진은 분명히 무시무시하지만 송재익 선배를 이길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송재익 선배는 '진짜 조폭'이었으니까.
일진 무리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칼로 난도질해 묻어 버리는 흑도 소속의 무인.
그러니까 아지트에 도착하기만 하면 도진도 그렇게 난도질당해 산에 묻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진은 평안한 얼굴로 산을 올랐다.
윗동네를 지나 관리되지 않은 산책로에서 벗어나 더 들어가면 치환의 패거리가 차지한 공터가 나온다.
얼기설기 연결한 천막과 낡은 의자, 테이블 등이 놓인 그 공터에 도착하자 치환을 필두로 한 열여섯, 서른두 개의 눈동자가 만곤과 그 뒤의 도진에게로 집중되었다.
만곤은 슬쩍 주위를 둘러보고선 표정을 굳혔다.
'……없잖아?'
두려웠지만 도진을 처리하기 위해 꼭 있어야 할 송재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숨어 있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굴렸지만 치환을 포함한 모두의 눈이 떨리고 있는 걸 보고선 모든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씨발! 왜 없는 거야?'
사박.
두 눈이 흔들리는 만곤을 지나쳐 도진은 제발로 아지트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척 봐도 나 일진이요, 티가 나는 쓰레기들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치환을 마주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너희 같은 싹수 노란, 놔둬봤자 세상에 피해만 끼치는 쓰레기들은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고."
도진이 미소지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서늘하고 두려운 호선을 그리고 있어 사신의 낫이 드리운 것처럼 이 자리 모두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너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죽여 버려!!"
치환의 발악과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흉기를 꼬나쥔 패거리가 도진을 향해 덮쳐들었다.
그래봐야 똑같은 사람이고 중학생이다.
떼거리로 덤벼들면 승산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하며 덤벼드는 패거리들의 시야에서.
핏.
도진이 귀신처럼 사라져 버렸다.
현대에 그 존재조차 전해지지 않은 절대자, 사신(死神)의 무공이 재림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