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놀이터를 둘러보았다.
입을 헤 벌린, 본래 이곳에 있던 아이들 말고 구경꾼은 보이지 않았다.
이 달동네 구석의 놀이터를 오가는 행인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도진의 시선이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너희들은 쟤들 때문에 유진이랑 호진이를 괴롭혔던 거지?"
"네."
"잘못했어요."
아이들은 대번에 잘못했다고 말했다.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찮아. 쟤들이 유진이랑 호진이랑 놀지 말라고 말했을 테니까."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이 좁은 달동네의 아이들은 모두가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당시 유진이와 호진이 또래의 아이들은 모두 사이가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거기다 어제까지도 놀이터에서 놀던 유진이나 호진이는 특별히 괴롭힘 당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동네에 들린 치환이 즉흥적으로 시작한 일이라 봐야 할 것이다.
겁을 주고 협박했을 것이다.
도진의 동생인 유진이와 호진이랑은 놀지 말라고.
그러니까 만악의 근원은 치환이라는 것으로 이야기는 귀결된다.
"형이 저 못된 놈을 혼낼 거니까 이제 신경쓰지 않아도 돼. 알겠지?"
"네."
"좋아. 그럼 늦었으니까 집으로 가. 부모님 걱정하시겠다."
"네에!"
아이들이 우르르 흩어졌다. 중간중간 뒤돌아 도진을 보기도 했다.
그렇게 아이들이 모두 사라지자 도진이 동생들에게 말했다.
"유진이랑 호진이, 뒤돌아 서."
"왜?"
"그런 게 있어."
도진은 두 동생들이 뒤로 돌아서 눈을 감고 귀를 막게 했다.
"절대로 뒤돌거나 귀 막은 손 풀면 안 돼. 알았지?"
동생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면 오히려 귀를 제대로 막지 않았다는 뜻이니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도진의 시선이 상미에게로 향했다.
상미는 벌벌 떨고 있었다.
결코 어찌할 수 없는 악마같았던 치환을 '무림인스럽게' 날려 버린 도진의 모습에 도망조차 치지 못하고 압도당해 버린 것이었다.
도진이 성큼성큼 걸어 거리를 좁히자 상미는 뒷걸음질을 치며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짜냈다.
"자, 잘못 했어. 잘못했어요."
"잘못인 걸 알면서 왜 한 거야?"
"그게, 그게……."
식은땀마저 흘리며 억지로 말을 쥐어짜내려 하는 상미의 모습은 애처롭다.
하지만 결국 답을 내놓지 못했기에, 도진은 망설임없이 손을 휘둘렀다.
짜아아아악!!
휘두른 손에 따귀를 맞은 상미가 부웅 날아 흙바닥에 처박혔다.
입술이 터져 피가 철철 흘렀다.
"이빨을 몽땅 뽑아 버릴까 싶었는데, 아쉽네."
무언가 사정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동생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시점에서 이미 선을 넘었기에 도진은 손 쓰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상미를 지나쳐 도진은 널브러진 치환의 앞에 섰다.
꼴에 무림인이라고 기절하지 않고 정신이 있었다.
도진을 올려다보며 치환은 부들부들 떨었다.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내려다보는 도진의 시선에 담긴 흉포한 기세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가 알던 도진이 아니었다. 도진의 안에 무시무시한 악마가 깃든 것만 같았다.
그 악마가 웃었다.
"내가 말했지? 아가리를 찢어 주겠다고."
"……흑, 흐흡!"
기혈이 꼬여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치환은 그저 컥컥거리며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었다.
도진이 몸을 숙여 양손으로 치환의 양볼을 그러쥐었다.
"귀까지 주욱 찢으면 참 보기 좋을 거야. 그렇지?"
"흡! 흐읍! 자, 잘못!"
빠악!
번개처럼 내리꽂힌 주먹에 치환이 까무러쳤다.
입술이 처참하게 터지고 앞니 두 개가 부러졌다.
슥슥, 치환의 옷에 피를 닦고 주먹을 회수한 도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줌을 지리며 기절해 버린 놈을 내려다 보았다.
과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약한 벌을 주었다 생각했다.
그럼에도 여기서 그친 건 아직 도진이 생각하는 만큼의 벌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거침없이 행동하고 그것을 오롯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도진은 몸을 돌렸다.
자리를 정리하고 귀를 막고 있던 두 동생의 손을 양손으로 잡았다.
"자, 이제 집에 가자."
"형!"
"오빠!"
두 동생의 눈이 신뢰와 동경으로 반짝인다.
도진은 미소지으며 동생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고, 샤워하라고 욕실로 들여보냈다.
약 15분 뒤 나온 뽀송뽀송해진 동생들의 모습에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샤워를 하고 나온 동생들은 어제 가르쳐준 것을 잊지 않았는지 깔끔한 모습이었다.
"잘 씻었네. 착하다."
"헤헤."
그리고 도진까지 씻고 나서 잠시 뒤.
띵- 동-
"어? 뭐야?"
"어머니가 주신 선물."
"와! 치킨이다!"
"와아아아아!!"
동생들이 씻으러 들어간 사이 주문했던 깜짝 선물, 치킨이 도착했다.
두 손을 번쩍 들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머니가 이걸 보지 못하신다는 게 안타까워졌다.
밥상을 펴고 치킨 박스를 열었다.
치킨무는 뜯어 국물을 절반 버리고 놔 주었으며 함께 온 콜라도 한 컵씩 따라 주었다.
다리 하나씩을 아이들 손에 쥐어주고 도진은 가슴살을 하나 들었다.
"자, 먹자."
"응!"
아이들은 몇 번 먹지 못했던 치킨을 정말 행복하게 먹었다.
먹느라 정신이 없으면서도 오빠도 먹어, 형은? 하고 도진을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무림인은 원래 이런 거 많이 먹으면 안 돼. 몸에 안 좋거든."
"정말?"
다른 무림인은 그렇지만 도진은 아니다.
맹수와 같은 천마기는 몸에 들어온 탁기를 남김없이 분쇄해 버리니까.
"우리도 몸에 안 좋아?"
"아니. 너희는 괜찮아. 그러니까 너희가 많이 먹어야 돼."
"응, 알았어!"
두마리 치킨이었기에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드릴 것을 따로 옮겨담고도 동생들이 배불리 먹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동생들을 먹이고 뒷정리를 했다.
뒷정리하면서 도진은 또 하나를 알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매일 집안일에 소홀하지 않으셨다는 거다.
그렇게 힘들게 일하면서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집안인을 했다.
설거지거리가 쌓여 있지 않고 묵은 때도 보이지 않는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 나이에 돌아왔기에 보이는 것들이었다.
"그럼 티비 보고 있어. 형은 수련할 테니까."
"응!"
동생들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인이 연예인 못지 않게 어린이들의 동경이 되는 세상.
그렇기에 동생들은 오빠를, 형을 그리도 반짝이는 눈으로 보았었다.
과거엔 그 기대에 보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엔 꼭 보답하고 싶었다.
도진은 방으로 돌아가 다시 버피를 시작했다.
위지혁은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도진은 몸과 정신이 보내는 거짓 신호에 결코 귀기울이지 않았으니까.
* * * *
"다녀오셨어요, 어머니."
"그래, 도진아."
오늘도 서정원은 늦게 귀가했다.
무림학교에 입학하면서 기숙사로 가 얼굴을 보기 힘들었던 아들이 돌아왔으니까.
힘들지만 택시비를 아껴 가능한 한 용돈을 주고 싶었다.
남편은 오늘도 당직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사업 실패를 자책하며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 같아 걱정되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차마 말리지 못했다.
"치킨 덜어놨어요. 드시고 주무세요."
"왜. 너 먹지 않고."
"저는 무림인이잖아요. 기름진 거 많이 먹으면 안 좋아요. 그래서 맛있는 부분만 몇 개 골라 먹었어요."
아들은 그러고서는 자러 들어가 버렸다.
서정원은 아들이 문득 어른스러워졌다고 느꼈다.
아이들은 눈 떼면 금방 큰다던 말이 떠올랐다.
그 생각은 집안을 둘러보며 더욱 커졌는데, 설거지에 집안 청소까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덜어둔 치킨은 날개 두 조각이 포함되어 있다.
서정원이 날개를 좋아한다는 걸 아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벌써 이렇게 컸구나…….'
가슴 속에서 따듯한 어떤 것이 피어올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시린 겨울밤을 걸어오느라 지치고 얼어붙었던 몸이 녹는 것 같았다.
* * * *
육체가 잠이 들고 도진의 정신은 심상세계로 왔다.
위지혁이 말하지 않았음에도 도진은 스스로 천마군림의 수련을 시작했다.
'물아일체.'
천마군림의 요결은 한 마디로 물아일체다.
나 자신을 자연과 동화시키는 것.
중요한 건 동화하되 주체가 '나'여야 한다는 거다.
나의 의지가 세상을 물들여야 한다.
'상식의 영역'에 있는 현대 무공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도진은 그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현실임을 명백하게 알고 있다.
실현할 방법도 알고 있다.
푸학!
그렇기에 온몸의 혈맥이 갈가리 찢기는 실패의 반복 속에서 궁구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두근!
"……!"
어느 순간.
도진은 세상의 심장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아니.'
아니었다.
그것은 도진의 심장 소리였다.
세상과 동화된 도진의 심장 소리가 퍼져 나간 것을 들은 것이었다.
그것은 즉.
"…호오."
도진이 천마군림에 성공했음을 의미했다.
위지혁과 달리 세상에 군림했다기보단 '자신을 확장했다' 표현하는 게 더 알맞을 정도로 지극히 좁은 범위였으나 성공은 성공. 그렇기에 위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한다. 드디어 입문했구나."
"…감사합니다."
도진은 기쁨, 놀람, 얼떨떨함 등 온갖 감정에 휩쓸렸다.
현실에서의 도진은 중학교 수준의 입문 무공에조차 쩔쩔매는 신세였다.
그런데 지금, 소설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런 무공을 체현해냈다는 사실이 도진을 격동시켰다.
수천 번이 넘는 실패 속에서 나아가며 도진은 드디어 천마신공에 입문했다.
"이제 겨우 수련을 할 수 있게 되었구나."
"수련…… 이요?"
수련이라니? 지금까지 한 것이 수련이 아니었던가?
의문으로 혼란스러워하는 도진의 모습에 위지혁은 씨익 웃으며.
두웅-!
천마군림을 시전했다.
'……!'
보름달 앞의 반딧불.
절로 도진은 그 말을 떠올렸다.
도진의 천마군림은 근처를 비추기도 힘겨운 반딧불이었다.
그에 비해 위지혁의 천마군림은 세상 전체를 비추는 보름달과 같았다.
스윽-
위지혁이 손을 들자 세상을 비추는 빛이 모조리 검기로 변했다.
"말하지 않았느냐. 오직 천마군림만을 사용해 대련을 할 것이라고. 이제 너도 천마군림을 사용할 수 있으니 이제서야 대련을 할 수 있게 됐구나."
그랬다. 처음부터 위지혁은 '천마군림만을 이용해 대련하겠다'고 했었다.
"이 세상에도 그런 말이 있더구나. 맞으면서 배우는 게 직빵이라고. 최선을 다해 보거라."
푸푸푸푹!
무수한 검기가 도진을 꿰뚫었다.
* * * *
"허억!"
도진은 기함했다.
무수한 검기가 온몸을 잘게 분해해 버리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도진은 멀쩡한 몸으로 동산 위에 서 있었다.
"…어떻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앞서의 혈맥이 갈가리 찢기는 것과는 경우가 달랐다.
그땐 '치명상'을 입었던 것과 같아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었지만 이번엔 말 그대로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넌 죽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스승님."
위지혁의 목소리에 도진이 고개를 들었다.
위지혁은 여전히 천마군림을 시전한 그대로 말했다.
"말했듯 이곳 심상세계에선 강한 심상이 그대로 반영된다. 그리고 여기엔 '생존 본능' 또한 포함되지."
인간의 가장 강한 본능 중 하나인 생존 본능. 그것이 반영되는 한 죽을 일은 없다.
"하물며 너는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지 않느냐. 죽음을 모르니 그 심상이 반영될 일도 없지."
도진은 한 번 죽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든 사이에 저도 모르게 겪은 일.
그러므로 도진에게서 '생존 본능을 넘어선 죽음의 심상'이 떠오를 일은 없었다.
"…그렇군요."
이 수련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위지혁의 운용을 보는 것을 넘어 맞상대하는 것으로 단순히 수련하는 것의 수십, 수백 배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죽을 일이 없으니 가감없이 그것을 받아내 몸으로 체감할 수 있다.
그것은 달리는 KTX에 몸을 묶어 강제로 달리게 하는 것과 같은 터무니없는 일이었으나 또 그것이 가능한 게 심상세계이며 무공이란 것이었다.
핏- 피피핏-
세상 전체가 검기가 되어 쏟아지는 것을 단 한 번도 막아내지 못하고 난도질당한다.
그러나 의미없이 당하는 게 아니다.
도진은 단 한 시도 눈을 감지 않고, 고통 속에서도 오히려 온몸의 감각을 열어 위지혁의 천마군림을 분석했다.
그렇게 알게 되는 것들을 실시간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천마군림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적용했다.
지극히 고통스러운 수련이었으나 도진은 전혀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바라는 바였다.
천재가 아니기에, 그리고 한 시라도 더 빨리 강해지길 바라는 자신은 남들의 백 배 천 배 더 가혹한 수련이 필요했으니까.
실시간으로 머릿속의 지식을 체화하고 있다는 감각이 오히려 도진을 더욱 적극적으로 만들었다.
다만.
"이 얼마나 좋으냐. 죽어도 죽지 않고 육체의 제약마저 없다. 거기에 장 제 덕분에 이론을 완벽하게 습득한 채로 속성 수련이 가능하지 않느냐. 지금 시대에는 이런 걸 '개꿀'이라고 하던데 그야말로 개꿀 수련이로구나."
"……."
그 개꿀이라는 말을 들으니 없던 불만이 생길 듯한 도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