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스윽-
눈이 떠졌다.
도진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보았다.
상체를 일으키는 두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두 다리가 몸을 지탱했다.
"아……."
선명한 현실감에 절로 입술이 열리고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고개를 든 두 눈 한가득 들어오는 건 기억 속에 있는 색이 바랜 벽지의 작은 방이다.
천천히, 19년만에 두 다리로 걷는 감촉을 생생히 느끼며 도진은 집을 거닐었다.
바로 옆의 방은 동생들의 방이다.
이제 열한 살인 유진이, 아홉 살인 호진이가 같이 쓰는 방.
벽지처럼 색이 바랜 공주옷의 인형은 유진이가 몇 년은 더 소중히 여기며 끝까지 버리지 못한 것이었고 부품이 몇 개 부러진 로봇은 호진이가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두 살 차이라 앙숙 같은 남매였지만 그래도 번개치는 날엔 둘이 꼭 붙어 자던 귀여운 동생들.
도진은 동생들의 방을 나와 주방을, 그리고 부모님의 방도 두 눈에 담았다.
오래되고 낡은, 그리고 미련이 덕지덕지 붙어 난잡한 세간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사고'가 있기 전부터 집안 사정은 좋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었고 그 상황에서 삼남매를 키우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거기에 도진이다.
한국의 무림학교는 초등학교까지만 필수교육과정이다.
초등학생까지는 모두가 무공을 익힐 수 있다.
그러나 중학생부터는 오롯이 스스로, 혹은 가정에서 부담해야만 한다.
이 금액은 일반 가정에 상당한 부담이 된다.
무공이란 게 세상의 주류임에도 이런 정책인 건 무공의 특성에 기인한다.
'재능이 없는 자는 무공을 익혀봐야 소용없다.'
무공은 재능 있는 자가 뼈를 깎는 노력으로 쌓아 나가는 것이다.
재능이 없다면 투자해봐야 의미있는 결실을 맺지 못한다.
그리고 이 재능은 초등학교의 교육만으로도 얼마든지 판별할 수 있다.
도진은 그 재능의 최저선은 넘을 수 있었다.
그래서 무림학교에 갔다.
무공이 돈이 되는 세상. 그리고 등용문이 되어줄 수도 있는 세상이었기에 부모님은 도진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리고 도진은 급류를 거슬러 등용문에 오를 만큼의 능력이 없음을 절감했다.
겨울방학이 되어 도망치듯 집에 온 것이 바로 이때.
지독히도 참혹했던 열여섯의 겨울이었다.
"……."
낡은 운동화를 신고 바깥으로 나갔다.
기억 속에 남았던 흑백의 달동네에 색이 입혀진다.
동적산이라는, 살고 있는 주민들 중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적당한 높이의 산을 끼고 있는 달동네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편이 많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마음껏, 재미있게 뛰어놀 수 있다는 장점 하나는 있는 곳이었다.
녹이 슨 몇 개의 놀이기구가 전부인, 그러나 넓은 놀이터에 가니 추억 속에 남아 있던 그대로의 동생들을 볼 수 있었다.
흙장난을 하느라 꼬질꼬질해졌지만 그것으론 결코 가릴 수 없는 순수한 예쁨과 가능성으로 빛나는 아이들.
세파에, 참혹한 불행의 연속에 스스로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망가져 버렸던 동생들이 아직은 행복했던 시절 속에서 웃고 있었다.
'…….'
동생들을 부르려 했던 도진은 열었던 입을 꾸욱 닫고 주먹을 쥐었다.
이대로 목소리를 냈다간 울고 말 것 같았으니까.
힘주어 치고 올라오려는 것을 꿀꺽 삼켰다. 떨리는 감정을 겨우 잠재우고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유진아. 호진아."
"어? 형!"
"오빠!"
슬슬 어둠이 내려앉는 놀이터에 덩그러니 둘이 남아 흙장난을 하던 동생들이 도진의 부름에 파아, 가득 웃으며 발딱 일어나 달려왔다.
"오빠!"
"형!"
이제 겨우 허리깨에 미치는 동생들이 덥석 도진에게 안겼다.
그 온기를 마주 안는 도진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잘 놀았어?"
"응!"
흙투성이에 은은한 땀내가 어린 것이 정말로 동네 아이들과 열심히 놀았던 모양이다.
"그럼 이제 집에 가자."
"응!"
자연스레 손을 잡고 삼남매는 집을 향해 걸었다.
아무것도 아닌, 그저 손을 잡고 집을 향해 천천히 걷는 것뿐인데 도진은 아까보다 더 차오르는 어떤 것을 참기 힘들었다.
이것이 그리도 특별하고 행복했던 것임을 이제서야 알았다.
집에 돌아온 삼남매가 나란히 낡은 신발을 벗고 집에 들어왔다.
"일단 씻자."
"응!"
아이들은 힘차게 대답하고선 옷을 홀라당 벗고 화장실 겸 욕실로 들어갔다.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15분 정도가 지나 동생들이 나왔다.
'음…….'
샤워를 마치고 나온 동생들의 모습에 도진은 눈썹을 모았다.
귀 뒤. 목 주변.
제대로 씻지 않은 부분들이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구나.'
아버지의 사업이 기운 뒤로 부모님은 동생들을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다.
빚을 갚고 남매를 키우기 위한 돈을 버는 것만으로도 한계였기에.
그것은 작은 것부터 시작해 큰 것까지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 이런 일상적인 부분에서 그것이 드러난 것이었다.
몸은 잘 씻었다. 하지만 이렇게 보이지 않는 부분을 꼼꼼히 씻는 건 배우지 못했다.
'내가 더 잘 돌봤어야 했는데.'
어린 시절의 못난 자신은 장남으로서 부모님을 대신하기는커녕 스스로의 일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었다.
도진은 자책하며, 그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미소지으며 말했다.
"자, 얘들아. 세수만 다시 해볼까?"
"왜?"
"오빠가 꼼꼼히 세수하는 법 알려줄게."
"응!"
별것도 아니다.
하지만 동생들은 기대로 눈을 반짝이며 다시 화장실로 향했다.
솨아아아-
따듯한 물이 나오는 것을 확인한 샤워기를 먼저 유진이의 얼굴로 향했다.
"잘 봐야 돼, 호진아."
"응!"
지그시 바라보는 호진의 시선을 느끼며 도진은 부드러운 손길로 유진이의 얼굴을 씻어 주었다.
"이렇게 귀 뒤랑 목까지 비누칠을 꼼꼼히 해주고 씻어내는 거야. 뽀득뽀득해질 때까지. 알겠지?"
"응."
"나도 해 줘, 형!"
"그래, 그래."
유진이를 씻겨준 뒤 호진이의 얼굴도 씻겨 주었다.
사춘기의 남매는 꽤 심한 피부트러블을 겪었었다.
아마도 이렇게 꼼꼼히 세수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가르쳐 줬으니 그러지 않겠지.
도진은 뿌듯함을 느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아이들을 씻긴 다음 도진도 샤워를 했다.
한데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아이들이 저녁 밥상을 차리고 있었다.
'아…….'
거기서 도진은 또 하나를 깨달았다.
'저녁을 차린 적이…… 없었구나.'
중학생이 되어 무림학교에 입학한 도진은 기숙사에서 지냈다.
물론 따로 돈을 내야만 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렇게 도진이 기숙사에서 지내는 동안 이 어린 동생들은 스스로 밥을 차려 저녁을 먹었다는 것이다.
맞벌이로 집을 비운 부모님은 남매의 식사를 챙겨줄 수 없었으니까.
심지어 방학 동안엔 점심까지도.
그래서 이토록 식사를 차리는 것이 익숙할 것이다.
기억 속의 도진은 방학동안 집에 있으면서도 그런 동생들의 사정에 무관심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다.
놀아달라는 동생들의 눈빛을 모른 척 했었다.
식당일로 고단했던 어머니가 돌아오면 늦게 저녁을 차려달라 해 먹었다.
계란과 햄이 반찬으로 나왔었다.
'나는…… 이렇게나 한심했구나.'
"오빠! 밥 먹어!"
이런 한심한 장남임에도 그토록 따라주었던 착한 동생들이었구나.
도진은 몇 번인지 모를 차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삼키며 간신히 응, 하고 대답했다.
밥과 몇 번이고 끓여 졸은 찌개, 나물 몇 가지에 김치.
그런 반찬임에도 동생들은 불평하지 않고 한그릇을 다 비웠다.
* * * *
늦은 밤이 되었다.
아이들은 엄마랑 아빠가 올 때까지 기다릴까 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곤히 잠들어 버렸다.
밤 11시가 넘었으니 어린 아이들이 눈을 뜨고 있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둘을 재우고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었다.
그러고도 시간이 더 지나 12시가 가까워 왔을 때에나 도진의 어머니가 돌아왔다.
"다녀오셨어요, 어머니."
"그래, 도진아. 밥 차려줄게."
"아뇨, 아니에요. 애들이랑 먹었어요."
"그랬니?"
"…네."
도진의 어머니는, 이때부터 세파에 깎여나가고 있었다.
검었던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어 가고 그것을 염색으로 가릴 여유조차 쉽게 내지 못했다.
뽀글거리던 머리가 점점 힘을 잃어감에도 미용실에 갈 시간과 돈조차 아쉬웠다.
팔목이 아파 돌릴 수 없었고 팔을 펴고 접는 것도 어려워졌다.
…그러면서도 식당일을 그만두지 못했다.
그만두면 모두 굶어야 했으니까.
도진의 학비를 마련할 수 없었으니까.
도진은 그것을 알면서도 외면했었다.
모른 척 했었다.
"아버지는요."
"오늘도 당직이라고 하시네."
"네. 저는…… 이만 잘게요."
"일찍 자네?"
"네."
짧게 답하고 도진은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들어가서, 자리에 눕고 이를 악물었다.
악물지 않으면, 볼썽사납게 소리치며 울어 버릴 것 같았으니까.
스스로의 한심함에 악을 쓰고 말 것 같았으니까.
몇 번이고 억지로 억눌렀던 감정은 이를 악물었음에도 이번엔 새어 나오고 말았다.
막을 수가 없었다.
도진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축축해지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소리만큼은 새어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 * * *
"왔느냐."
"네."
늦은 밤. 도진은 필사적으로 잠을 청했고 겨우 심상세계에 들 수 있었다.
천마와 사신은 착 가라앉은 도진의 얼굴을 마주하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맞이해 주었다.
"그래, 과거로 돌아왔다는 실감은 했느냐?"
"네."
과거로 돌아오는 건 그 어디서도 겪지 못할 신비한 경험이었다.
도저히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초월적인 현상.
억지로 비유하자면 위도 아래도, 아예 공간이라는 것 자체를 실감할 수 없는 바다를 표류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심상세계에서의 표류가 끝나자 사신은 과거로 돌아왔다 말했고 체감하고 오라며 도진을 바깥으로 튕겨냈었다.
그리하여 도진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시작점에 설 수 있었고 그 시작점에 섰음을 분명하게 체감하고 왔다.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셔서 두 분께 감사를 드리고 싶은데 도저히 어울리는 말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냥, 그냥 감사하다고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말을 마친 도진은 천마를 향해 서서 아홉 번 절을 했다.
"똑같은 잘못을, 한심한 삶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어 사신에게도 마찬가지로 아홉 번 절을 했다.
"하고 싶은 게 있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힘을 갖고 싶습니다."
과거의 삶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덮쳐왔던 모든 불행을 때려 부수고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힘을 원했다.
천마와 사신은 그런 도진의 갈망에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 위지혁이 앞으로 나섰다.
"너는 이제부터 나 위지혁의 뒤를 이어 천마의 이름을 계승할 것이다. 그리고 천마의 이름으로 무림에 군림할 것이다."
두 번째 삶의 시작점.
도진은 천마로서 새로운 길을 걸어나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