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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66화 (1,567/1,567)

1566화. 산책은 이런 날에 가는 거란다. (1)

“……도위야.”

남궁명의 입에서 신음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상상도 해 본 적 없다. 조카가 저리 싸울 수 있을 거라고는 말이다.

물론 남궁도위는 훌륭한 인재다. 혈육의 정을 떼어 놓고 보아도 그렇다. 객관적으로 그를 인정하지 않는 이는 세상에 드물 것이다.

하지만 지금 보는 남궁도위는 지금껏 그가 알던 남궁도위가 아니었다.

“너는…….”

파아아앗!

그 순간, 남궁명의 얼굴 쪽으로 날카로운 아미자(峨嵋刺: 작살)가 날아들었다. 급히 고개를 틀며 피한 남궁명이 잽싸게 검을 내질렀다. 수적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은 그가 입술을 짓깨물었다.

잠시 방심하고 말았다. 이래선 안 된다.

“대주님! 노, 놈들이 더 몰려옵니다!”

“알고 있다!”

감동 같은 걸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남궁도위를 대견하게 여길 때는 더더욱 아니다.

재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사방으로 퍼져 나갔던 수적들이 이곳의 상황을 들었는지, 먹이를 발견한 개미 떼처럼 우르르 몰려들고 있다.

절망적인 광경이지만, 남궁명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알고 있던 결말이다!’

뒷일을 생각해 몸을 사렸다면 흑룡왕에게 닿지도 못했을 것이다.

흑룡왕을 죽인다.

오직 그 하나만을 노리고 뒤 없이 돌진해 왔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왕을 습격한 결사대의 마지막이 무엇인지 모를 리 있겠는가.

“버텨라! 아니, 꿰뚫어라! 등에 칼이 박혀도 나아가라!”

“예!”

남궁명이 검을 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목숨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 비참한 죽음보다 더 끔찍한 건 굴욕적인 삶이니까. 그렇기에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저렇게 싸우는 남궁도위의 모습을 본 순간, 남궁명의 가슴속에는 또 하나의 사명이 생겨났다.

‘도위만큼은……!’

입술을 질끈 깨문 남궁명이 검에 내력을 밀어 넣자 이내 흰 검기가 어렸다.

“오오오오!”

내뿜어진 백색 검기가 앞에 선 수적들을 일거에 휩쓸어 날렸다.

“꿰뚫어라!”

남궁명의 두 눈에 핏발이 곤두섰다.

* * *

같은 시각.

“남궁이 장강으로 향했다는 첩보입니다. 지금쯤이면 수로채와 조우했을 것입니다!”

“화산 장문대리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그 뒤를 쫓고 있습니다!”

“당소소의 지시로 의료대의 인원들이 차출되어 지원 중입니다. 동시에 당가의 조들 중 일부가 우선은 장강 쪽으로 이동하겠다는 보고를 보내 왔습니다!”

“종남과 연락이 제대로 닿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재촉해 보겠습니다!”

쏟아지는 보고를 들으며 당군악이 표정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결국은…….’

보고는 ‘예측’한다고 말하지만,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쯤 남궁세가는 뒷일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수로채로 돌진해 버렸을 거라고.

남궁황이 주변의 말을 모두 무시한 채 장강을 넘었듯 말이다.

오대세가에 속한 이들의 특성을 이곳에서 가장 잘 아는 이가 당군악이다. 그렇기에 모를 리 없다.

사람들은 하북팽가를 두고 폭급하다고 말하지만, 그건 사람의 성정을 논하는 말일 뿐이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가장 극단적이고 과감한 가문은 누가 뭐라 해도 남궁세가다.

당군악이 주먹을 빠르게 쥐었다 폈다.

역사는 반복되는 거라고 말들 하지만, 이렇게 금방 또 같은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이건 남궁세가의 잘못인가? 아니면 이럴 가능성이 있음에도 전혀 대비하지 못한 이들의 잘못인가?

아니면…….

“완전히 당했군요.”

그때, 임소병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녹림왕.”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병법이라고 할 것도 없을 만큼 뻔한 말이거늘.”

임소병은 생각보다 담담해 보였고, 다만 조금 허탈한 듯 보였다.

하지만 당군악은 알 수 있었다.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도 드러난 눈동자에 짙은 굴욕감이 스쳤음을.

“남궁을 우리보다 잘 아는 건 오히려 사패련이었던 겁니다.”

당군악은 침묵했다. 그가 가장 우려했던 게 바로 이 부분이었다.

이건 누가 봐도 노린 일이다.

안휘로 잡졸들을 밀어 넣은 것은, 그렇게 해야 남궁세가가 이끌려 올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틈에 남궁세가가 절대로 두고 물러설 수 없는 적인 수로채를 안휘로 향하게 한 것까지도 노린 것이다.

연이어 얻어맞을 때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수였지만, 이쯤 와 버리니 그 모든 것이 일목요연하다.

당군악의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이토록이나 무능했던가?’

이토록 뻔한 수에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다. 잘났다고 자처한 적은 없지만 못난 사람은 아니라 여기며 살아왔건만, 자신에 대한 회의와 자괴감이 밀려올 정도다.

그 순간 침묵하던 현종이 입을 열었다.

“단지 그것만이 아니겠지요.”

“……맹주님.”

“냉정해야 합니다. 장일소 그자가 알고 있는 건 남궁세가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 천우맹이라면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보다 우릴 더 잘 알았던 거지요.”

“…….”

“우리 입장에서는 수많은 갈등과 협의를 거쳐 마침내 도달한 결론이지만,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현종은 말을 채 다 잇지 못했다. 이어진 한숨에 허탈함과 망연함이 묻어났다.

부채를 쥔 임소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확한 말씀이십니다.”

이제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직 치명적인 수를 얻어맞은 건 없다 해도, 사패련이 장강을 도하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천하가 저 장일소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 장가계에서 느긋하게 진을 꾸린 악적에게.

“생각해야 합니다. 대체 무얼 노리는 건지.”

임소병이 으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이미 지나간 건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놈의 목적을 놓친다면, 우리는 상상 이상의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겁니다.”

“……노리는 거라니.”

당군악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거칠게 흘러나왔다.

“노리는 거야 뻔하지 않은가. 강북 전역으로 퍼질 이들을 끌어들이는 것일세.”

“그리고?”

“또한 호북으로 지원을 오려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전력 역시 그 자리에 묶어 둘 셈이겠지.”

“……그리고요?”

“그리고라니?”

“그래서, 화산과 남궁세가, 당가의 일부 전력을 잡아먹는 게 목적이라는 겁니까?”

당군악의 입이 절로 닫혔다.

“그건…….”

“그 대가로 수로채를 내어주고? 그 흑룡왕의 목숨을 담보로 고작?”

사실 고작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다.

사람에 따라 평가는 다르겠지만, 수로채를 대가로 화산과 남궁세가, 사천당가의 전력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확실히 이익이라 할 수 있다.

그 화산의 전력에 청명과 오검이 포함되어 있다면 더더욱.

하지만 이곳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 그곳에 청명이 있는 이상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는 결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한쪽 팔을 잃었다지만, 절대고수의 수가 부족한 사패련에서 흑룡왕은 잃어선 안 될 전력입니다. 그런 이를 확실치도 않은 도박에 희생시킬 만큼 장일소는 멍청한 작자가 아닙니다.”

당군악도 이 말에는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임소병이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보여 온 장일소의 행동은 예측이 어려웠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단순히 장일소의 계략이 신묘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럼 무엇 때문인가?”

“그 빌어먹을 놈이 개전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손해 보는 짓거리만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간적으로 당군악의 얼굴이 굳어졌다.

가슴 한구석 응어리에 갑자기 구멍이 뚫린 기분이다. 내도록 머릿속을 갑갑하게 만들었던 것이 지금 임소병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큰 도움은 안 된다지만 머릿수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병력을 굳이 사지로 밀어 넣고, 자신들이 가진 가장 강대한 세력 중 하나인 수로채 역시 같은 곳에 밀어 넣었습니다. 그 대가로 사패련이 대체 뭘 얻었습니까?”

모두가 얼굴을 굳힌 채 대답하지 못했다.

없다.

아무것도 없다.

고작해야 양민들의 목숨. 그리고 강북의 혼란.

그건 구파나 천우맹 쪽의 전력에는 이렇다 할 지장을 주지 못하는, 심적 피해에 불과하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장일소가 지금껏 말도 안 되는 악수만 반복해서 두고 있다는 소리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 장일소가?

“……그럼 뭘 노리고 있단 말인가?”

“모릅니다. 당연히 알 수가 없지요. 다만…….”

임소병이 씹어뱉듯 말했다.

“제가 확신할 수 있는 건, 그놈은 절대 손해 보는 짓을 하는 놈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당연히 지금껏 본 손해를 뒤집기 위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맹주님!”

콰앙!

문이 터지기라도 한 듯 벌컥 열리며 한 사람이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하도 이런 일이 잦으니 천우맹의 중진들은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새로이 들어온 보고에, 수뇌부 모두가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 만인방! 패군 자, 장일소가 움직였습니다!”

그 순간, 숨 막히는 긴장감이 북해의 협곡에 부는 칼바람처럼 들이쳤다. 회의실에 있던 모두가 할 말을 잃은 채 한 사람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숱한 시선 속에서 임소병은 쥐어짜 내듯 말했다.

“이런 순간에…….”

파리하고 수척한 뺨을 타고 한 방울의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 *

“흐음.”

나직한 콧소리가 울린다.

화려한 옷자락이 부드럽게 스쳤다.

검은 수실로 수놓인 붉은 장포는 그 화려하기가 장포라기보다 차라리 여인의 궁장에 가까울 정도였다.

거기에 커다란 면류관(冕旒冠)까지 쓰니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치렁치렁하고 번쩍였다.

희고 긴 손가락이 느릿하게 면류관 앞으로 늘어진 류(旒)를 슬며시 젖혔다. 꿰인 구슬이 부딪치며 차그락 맑은 소리를 내었다.

“좋은 날씨구나.”

발이 걷힌 자리로 흰 얼굴과 붉은 입술이 드러났다.

사패련의 련주, 패군 장일소. 그는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 좋은 날씨잖니. 그렇지?”

촤라락.

손가락 끝이 움직이니 젖혀졌던 발이 다시 흘러내리듯 떨어졌다.

“산책은 이런 날에 가는 거란다. 이번에는 조금 멀리 갈 테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지 않겠니?”

장일소가 슬쩍 뒤에 선 이들을 돌아보았다.

여유가 넘치는 그와 달리 짙은 각오와 팽팽한 긴장으로 무장한 이들이 대답했다.

“예, 련주님!”

“하하핫.”

짧게 웃은 장일소는 고개를 돌려 앞을 응시했다. 눈앞에 드넓은 강북 땅이 펼쳐져 있다.

“다들 잘 따라오렴. 아차 하면 길을 잃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장일소의 발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붉은 비단화를 신은 발은 느리게 들어 올려졌다가 고요히 내려앉는다.

탁.

단 한 걸음이지만, 결코 작지 않은 발걸음이다.

“악기가 없어서 아쉽구나. 소리를 지르렴. 노래하는 것도 좋겠지. 무엇이든 좋다. 저기 멀리 있는 아이들도 우리가 간다는 걸 알아야겠지?”

장일소의 붉은 입꼬리가 섬뜩하게 올라갔다.

“그래야…… 재미있을 테니 말이야.”

전신을 붉은색으로 휘감은 장일소가 사패련의 선두에서 나아간다. 그 모습은 흡사 검은 칼 끝에 묻어난 한 방울의 피 같았다.

목표는 당연히 강북.

지금껏 그들에게 허용되지 않던 금단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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