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564화 (1,565/1,567)

1564화. 그때와는 달라. (4)

“흐아아아악!”

두 기운이 충돌하며 인 여파가 흑룡왕 주변의 수적들을 휩쓸었다. 건장한 수적들이 태풍에 휩쓸린 가랑잎처럼 튕겨 나갔다.

“큭!”

기세를 높여 달려들던 남궁세가의 검수들 역시 멈칫하며 제 몸을 물렸다.

그들 모두가 한곳을 응시했다. 조각조각 비산하는 검고 흰 기운 속에서 뒤쪽으로 튕겨 나가는 남궁도위의 모습이 보였다.

“소가주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튕겨 나간 남궁도위가 허공에서 몸을 한차례 뒤집더니 그 자리에 내려섰다. 여전히 오연한 얼굴이었다. 이렇다 할 충격을 입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외려 동요한 건 남궁세가의 검수들이었다.

“소, 소가주님이…….”

그들은 안다. 남궁도위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지금의 남궁도위는 과거 매화도에서의 남궁도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들도 눈으로 봐 오지 않았다면 고작 몇 번의 경험과 달라진 마음가짐이 무인의 실력을 이만큼이나 끌어올릴 수 있을 거라고는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강해진 남궁도위가 일격에 튕겨 나왔다. 저 흑룡왕은 고작 두어 발짝 물러난 게 전부였는데 말이다.

“하, 한쪽 팔을 잃었는데도…….”

누군가 앓듯이 뇌까린 바로 그때, 남궁명의 차가운 목소리가 검수들의 귀로 날아들었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그, 그렇지만…….”

“팔이 잘렸다 해서 가진 내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무기를 든 팔이 바뀌었다 해서 그 근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흑룡왕 정도 되는 무인이라면 외려 이게 당연하다.”

가장 증오스러운 적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순수하게 인정할 수 있었다.

만일 흑룡왕이 별 볼 일 없는 자라면, 수로채가 고작 수적 집단에 불과한 문파라면, 남궁황의 죽음은 개죽음으로 전락하고 남궁세가의 고통은 어리석음에 따른 대가가 될 뿐이지 않은가.

“오른팔이 없다고 해도 흑룡왕은 여전히 흑룡왕이다. 소가주가 상대하기에는 버거운 상대야.”

그 버겁다는 표현 역시 남궁도위의 체면을 많이 고려해야 내놓을 수 있는 말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남궁도위는 흑룡왕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적어도 아직은.

“그, 그럼…….”

“왜? 이제 와 목숨이 아까우냐?”

남궁명의 그 말에 검수들의 눈에 순간 독기가 차올랐다.

“그럴 리 있습니까!”

“그럼 검을 들어라! 가주에게 모든 걸 맡기지 마라. 흑룡왕의 목을 베는 건 다름 아닌 우리! 남궁세가다! 남궁의 상징은 가주가 아니라 바로 창천검대다!”

“예!”

정신을 차린 남궁의 검수들이 이를 악물고 다시 흑룡왕에게 돌진했다. 눈치라면 세상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수적들이 그 움직임을 기민하게 알아채고 그들의 앞을 막아 왔다.

“이놈들이 감히 어딜!”

“이미 관짝에 처박힌 놈들이!”

수적들의 기세 역시 남궁세가 못지않았다. 남궁도위를 일격에 밀어 낸 흑룡왕의 신위가 그들의 사기를 끌어 올렸음이 분명했다.

흑룡왕이 건재하다.

그걸 두 눈으로 확인한 것 이상으로 힘이 되는 일이 있겠는가?

“뚫어 내라!”

“막아라!”

장강 위 작디작은 섬에서 펼쳐졌던 인세의 지옥이 지금 이곳에서 다시 한번 그 형태를 바꿔 재현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격전의 한중간에 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으음.”

흑룡왕은 슬쩍 시선을 내려 제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았다.

선명하게 찍힌 발자국. 여파를 이기지 못해 뒤로 물러나며 흑룡왕이 남긴 수치의 흔적이었다.

“……견자(犬子) 따위가.”

남궁도위를 노려보는 흑룡왕의 눈이 검은 불길처럼 이글거렸다.

고작해야 두 걸음이다. 상대를 저 멀리 날려 버린 대가로는 싼 대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제 반도 살지 않은 어린놈이라면 그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을 터.

남궁황이라면 모를까, 그 자식놈 따위는 애초에 도를 갖다 댈 가치도 없다. 그런데 범 아래 난 개새끼 같은 놈의 검에 그가 잠깐이나마 밀려난 것이다.

으드드득.

이를 갈아붙인 흑룡왕이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아비와 자식이 둘 다 내 손에 죽겠다고 설쳐 대는 꼴이라니. 코웃음도 나지 않는구나. 저승에 있는 네 아비가 보면 뭐라 할지 궁금하군.”

남궁도위가 차갑게 흑룡왕을 쏘아보며 일갈했다.

“천하의 흑룡왕이 그런 말을 지껄이기에는 영 면이 안 서지 않나?”

“……뭐?”

“누가 들으면 네가 정정당당히 아버님을 꺾은 줄 알겠군. 너도 알 텐데?”

남궁도위가 헌앙한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뜨렸다. 입술 사이로 피에 젖은 이가 드러났다.

“내 아비는 제왕검 남궁황이다.”

“…….”

“네가 아버님과 제대로 생사결을 나누었더라면 네 목숨이 아직 성히 붙어 있을 리 없지.”

“이!”

“한낱 수적을 베는 데 제왕검은 격에 맞지 않아. 너는 나 정도로도 충분하다.”

흑룡왕의 거무튀튀한 얼굴이 불그죽죽해졌다.

남궁황보다 못한 평가를 받은 데 흥분한 게 아니다. 하찮은 애송이 놈이 감히 그의 앞에서 할 말을 다 지껄이는 데 화가 난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건…….

흑룡왕의 뇌리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덩치로 따지자면 그의 반이나 될까 싶었던, 조그만 애송이 놈. 그놈의 검이 그의 팔을 파고들었던 순간.

그 모든 게 생생히 떠오른 순간, 흑룡왕의 두 눈이 분노에 휩싸였다.

“갈기갈기 찢어 장강의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 주마! 너는 네 아비와는 달리 그 시신조차 세상에 남기지 못할 것이다!”

남궁도위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쩐지 이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말, 네게 그대로 돌려주지. 똑똑히 기억해 둬라.”

그가 아는 이라면 당연히 이리 받아쳤을 테니까.

“오오오!”

흑룡왕이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는 듯 커다란 언월도를 내리쳤다.

콰아아아아!

먹물에 잔뜩 적신 붓으로 단번에 그어 낸 것만 같은 거친 도기가 남궁도위를 향해 곧장 날아들었다. 패도(覇道) 그 자체를 뭉쳐서 만든 모양새다.

남궁도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건가?’

심장이 절로 쿵쾅쿵쾅 두방망이질하고 전신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날아드는 저 도기가 주는 압력보다도, 전신을 짓누르는 공포감이 더 극심했다.

그와 동시에 남궁도위는 새삼 깨달았다. 지금까지 그가 단 한 번도 자신보다 강한 이와 생사결을 겨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아니, 어쩌면 제대로 검을 섞을 만한 상대와 목숨을 걸고 싸워 본 적조차 없는 건지도 모른다.

‘이런 거였습니까?’

뇌리에 한 사람이 스쳐 간다.

누구나 다 무모하다고 고개 젓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버리는 사람.

그리고 또 한 사람의 모습도 스쳐 간다.

너른 등으로 언제고 그들을 지켜 내던 사람.

‘아무렇지 않았을 리 없어.’

콰앙!

남궁도위가 거세게 진각을 내밟았다.

분명 그들도 두려웠을 것이다.

그들이 이겨 내야 했던 건 고작 흑룡왕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은 더한 짐을 지고, 더한 상대와 싸워 왔다.

그러니까.

“오오오오오!”

남궁도위의 검이 백색 검기에 휩싸였다.

미약하게 피어난 흰 검기는 일순 폭발적으로 솟구치더니, 단숨에 흑색 도기를 향해 마주 쏘아졌다.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검기와 도기가 다시금 충돌한다.

울컥!

남궁도위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전신을 커다란 망치로 후려친 것만 같았다. 젊은 무인 중 손에 꼽힐 만큼 대단한 내력을 지녔다고는 하나, 이미 강호의 정점에 서 있는 흑룡왕의 내력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남궁도위는 물러서는 대신 힘껏 땅을 박찼다.

충돌과 동시에 비산한 도기와 검기의 파편이 그의 몸에 박혀 온다. 하지만 남궁도위은 오로지 앞에 있는 한 사내만을 주시했다. 눈 한 번 깜빡이는 일이 없었다.

- 더 강한 자와 싸우는 법?

언젠가 물었었지.

- 도망가는 거지, 멍청아. 나보다 센 놈하고 왜 싸워? 뒈지고 싶으면 접싯물에 코 처박으면 되지, 뭐 하러 귀찮고 어렵게 뒈져? 뭐 어떻게, 물 한 사발 받아 줘?

대답도 눈빛도 모두 시큰둥했지만, 남궁도위는 사실 알았다. 그 가시 돋친 말속에 걱정이 숨겨져 있었다는 걸.

- 그런데도 정말 꼭 싸워야 하는 상황이라면……. 도망칠 방법이 없어서 상대 코라도 물어뜯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방법은 딱 하나뿐이지.

또다시 검은 도기가 남궁도위를 향해 날아든다. 남궁도위가 달려들던 기세 그대로 검을 힘껏 올려 쳤다.

부드러움으로 상대의 기운을 흘려내는 법.

콰아아앙!

이내 남궁도위의 몸이 포탄처럼 튕겨 나가 바닥에 처박혔다.

‘그런 방법 따위는 모른다.’

청명이라면 저 도기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매끄럽게 흘려 버렸을 것이고, 남궁황이라면 저 도기를 힘으로 부숴 버렸겠지만, 남궁도위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파앗!

곤두박질치던 남궁도위의 몸이 마치 미리 짠 듯이 앞으로 쏘아졌다.

그 순간, 남궁도위의 시야가 막대한 검은 도기로 가득 메워졌다.

압도적이고, 또 동시에 절망적인 광경이다.

그토록 까마득한 힘의 차이 앞에서 남궁도위가 선택한 건 전진하는 것. 하지만 그건 비굴하기까지 한 전진이었다.

남궁도위는 제 몸을, 하늘이 아닌 땅을 향해 전력으로 내리꽂았다.

쿠웅!

그의 몸이 단단한 땅을 뚫고 그 속으로 반쯤 박혀 들었다. 실낱같았던 틈을 강제로 벌려 내는 일수(一手)다.

고통을 참아 내는 남궁도위의 머리 위로 거친 도기가 무섭게 스쳐 지나갔다.

파앗!

남궁도위는 그 즉시 몸을 굴려 그 반동으로 또다시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범 같은 부모 아래 개 같은 자식(虎父犬子)?

그럴지도 모른다.

남궁황에 비하면 그는 개조차 되지 못한다. 청명에 비한다면 그는 뱀은커녕 지렁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남궁도위는 좌절하지 않는다. 스스로 범이 되기까지 기다리면 된다는 환상 따위도 없다.

그도 이제는 아니까. 알게 되었으니까.

개에게는 개만이 취할 수 있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이놈이!”

흑룡왕이 노호성을 터트리려는 찰나, 남궁도위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제왕검형이 아닌, 철검십이식.

내력으로 찍어누르는 검식이 아니다. 그저 빠르고 쾌속하게 끊어 내는 남궁의 검술이다.

파아아앗!

그가 발출한 십여 개의 검기가 더없이 쾌속하게 흑룡왕을 향해 쏘아졌다. 내력을 끌어올려 다시 한번 도기를 내뿜으려던 흑룡왕이 얼굴을 구겼다.

“하찮은 짓을 하는구나!”

카아앙!

언월도를 크게 휘두르자 날아들던 검기는 거센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으스러졌다.

“오오오오오!”

하지만 남궁도위는 지치지 않았다. 그가 연이어 새하얀 검기를 뿜어내었다. 부질없어 보일 정도로 미련하게, 절로 주먹이 쥐어질 정도로 간절하게!

“이 쥐새끼 같은 놈!”

흑룡왕의 두 눈이 광기로 번뜩였다.

언월도를 움켜잡은 그의 왼팔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여든 힘은 언월도가 휘둘러짐과 동시에 폭발적으로 터졌다. 실로 무시무시한 일격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

세상이라는 화폭 위로 검은 먹물이 엎질러진 것만 같다.

검디검은 기운이 남궁도위의 검기를 모조리 집어삼키고 이내 남궁도위마저 덮쳐 온다.

정신이 아득해질 만한 광경.

그러나 남궁도위는 이번에도 물러나는 대신 땅을 박찼다.

고오오오오오오!

남궁도위의 검이 백색 빛을 내뿜었다.

바로 그의 검.

오연하게 세상 위에 서기 위한, 창천의 검이다.

검과 하나가 된 남궁도위가 도기의 바다로 뛰어든다. 짙은 밤, 망망대해에 뛰어드는 것처럼 그토록 무모하게.

콰드드득!

이내 검 끝이 도기를 꿰뚫는다.

퍼억!

남궁도위의 어깻죽지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 나갔다.

투둑!

눈 쪽에서 무언가 연이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이내 한쪽 귀도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우드드득.

몸 어딘가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머릿속에 직접 울렸다. 태산이 짓누르는 것 같은 압력과 고통 때문이다.

그럼에도 남궁도위는 나아갔다.

압력으로 여기저기가 터져 감각조차 무뎌진 입술을 짓깨물며,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그리하여 마침내 백색 검이 검은 바다를 꿰뚫어 냈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새파란 빛을 띤 한 자루의 언월도였다.

“마지막이다!”

파아아아아아아아앙!

공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굉음과 함께 만근의 힘을 실은 언월도가 남궁도위의 머리통을 쪼개 놓을 듯 무섭게 내리쳐졌다.

그 광경을 보며 남궁도위의 눈이 일순 멍하게 풀렸다.

‘그때, 뭐라 했더라?’

……무슨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그때…….

- 내 강점으로 적의 약점을 친다. 기억해. 세상에 약점 없는 사람은 없어. 그저 강점이 그걸 가릴…….

파아아앗!

찰나간 멈추었던 남궁도위의 검이 벼락처럼 내뻗어졌다.

노리는 곳은 적의 심장도, 목도 아니다. 허공을 가르며 내리쳐지고 있는 언월도, 바로 그 언월도를 잡은 손. 손가락이다!

“큭!”

날아들던 언월도가 급격하게 비틀렸다. 그대로 내리쳤다면 남궁도위를 두 쪽 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흑룡왕은 이미 한쪽 팔을 잃은 사람이다. 남은 손마저 잃을 순 없었다.

콰아아아앙!

방향이 틀어진 언월도가 단단한 땅을 두부처럼 뭉개 놓았다.

흙먼지가 솟구치며 어마어마한 충격이 주변을 휩쓸었다.

‘어디……!’

그 탓에 남궁도위의 종적을 놓친 흑룡왕이 급하게 몸을 세워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적세광.”

그의 오른편. 애병을 휘두르던 팔이 있던 곳. 그러나 이제는 그저 비어 버린 그곳에서 스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잡았다.”

준수한 얼굴을 온통 피로 물들인 남궁도위가 헐떡이며 악귀 같은 미소를 흘렸다.

흑룡왕의 등골로 서늘한 한기가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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