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561화 (1,562/1,567)

1561화. 그때와는 달라. (1)

파아아앗!

‘더 빨리!’

청명의 발이 땅을 강하게 박찼다.

쏘아 낸 화살처럼 튀어 오른 청명이 단숨에 수십 장의 거리를 주파하며 나아간다.

그가 흘린 땀방울이 얼굴을 타고 흩뿌려져 불어온 바람에 휩쓸린다.

‘이쯤!’

터엉!

허공을 한 번 걷어찬 청명이 방향을 전환하여 내달린다. 분명 받은 정보대로라면 이 앞에…….

눈앞을 빼곡히 채우고 있던 울창한 숲이 밀려나며 드넓은 공터의 모습이 청명의 두 눈 가득 들어온다.

“…….”

그리고 그 순간 청명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비어 있다.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너른 공터는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청명의 시선이 바닥을 훑는다. 수많은 이들이 머물렀던 흔적이 아직 이곳에 남아 있었다.

“이…….”

그의 이가 아랫입술을 파고든다.

‘남궁도위.’

이해는 한다. 그 마음을 이해하니까 청명 역시 이곳까지 숨도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한 가문의 가주라면 적어도…….

그 순간, 청명의 고개가 한쪽으로 획 돌아간다.

파앗!

곧바로 땅을 구르며 솟아오른 청명이 한줄기 빛살이 되어 앞으로 쏘아진다.

“허억!”

갑자기 눈앞에 유령처럼 나타난 이를 본 사내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하나 그 행위는 그의 검이 뽑혀 나올 방향을 선점한 손바닥에 간단히 저지되었다.

“처, 청명 도장?”

놀란 남궁세가의 무사가 자신의 앞에 나타난 청명을 보며 눈을 끔뻑인다.

“소가주는?”

청명 역시 설명할 상황이 아니라는 듯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러자 눈을 끔뻑이던 남궁세가의 무사가 움찔하고는 바로 입을 열었다.

“자, 장강으로 먼저 가신 것으로 압니다.”

“어디서 합류하기로 했지?”

“그런……. 말은 없으셨습니다. 장강으로 갈 테니 알아서들 따라오라고.”

청명이 또다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언제?”

“예?”

“놈이 언제 출발했지? 합류하러 가는 중일 것 아냐?”

“그, 그건 잘…….”

청명의 눈가가 일그러지자 당황한 무사가 바로 부연했다.

“저, 저희는 남궁세가의 조들 중에서도 가장 북쪽에 있던 조 중의 하나라, 출발하면서도 장강에 도달하기 전에 합류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소가주께서 언제 출발하셨는지까지는…….”

말아 쥔 청명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다른 조들은? 이미 합류하고 있나?”

“그럴 겁니다.”

이 순간만큼은 당황하던 무사의 두 눈에 단호함이 어렸다.

“남궁의 이름을 쓰는 이라면 당연한 것입니다. 선대 가주님의 원한을 갚지 않고 어떻게 남궁의 이름을 쓰겠습니까?”

“…….”

청명이 눈을 감고 말았다.

탓할 마음도 들지 않는다.

만약 세상에 청문을 죽인 이가 아직 살아 있고, 그가 지척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면 청명은 어찌했을까?

‘생각할 것도 없지.’

무슨 상황이건, 얼마나 어려운 일이건 고려의 대상조차 아니다. 불공대천(不共戴天)이란 그런 것. 한 하늘을 이고 살지 못한다는 것은, 상대를 죽일 수 없다면 차라리 자신이 죽겠다는 의미이지 않은가?

“……도장께서도 가십니까?”

그 말에 청명이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남궁의 무사를 마주 보았다.

그 눈빛에 어린 것은 분명 ‘기대’였다.

청명이라면 이해할 것이라는, 그리고 당연히 그들의 편에 서서 함께 싸워 줄 것이라는 기대 말이다.

“머저리 같은 놈들이…….”

청명이 이를 으득 갈았다.

“먼저 간다.”

“예?”

파아아앗!

청명이 그들을 둔 채 앞으로 벼락처럼 달려 나갔다.

“도, 도장! 저희도!”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진다. 전력을 다해 내달리는 청명의 표정이 절로 다급해졌다.

‘멍청한 새끼!’

그럴 거라면 최소한 날 기다리기라도 했어야지.

* * *

“남궁세가가 장강으로 향했습니다!”

“……빌어먹을.”

당군악이 턱에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는 말을 설마 남궁 소가주에게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당군악이 성이 난 눈으로 임소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임소병은 태연하게 그런 당군악의 눈빛을 받아 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잖습니까.”

당군악 역시 이 말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근거 없는 확신으로 매화도로 돌진한 남궁황의 선택과 부족한 전력으로 흑룡왕을 향해 나아가는 남궁도위의 선택이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으니까.

이래서 ‘기질’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다.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막을 방법은 있는가?”

“글쎄요. 장강에 도달하기 전에 연락을 취해 보는 정도야 어찌 가능하겠지만.”

그것도 불가능하다면 연락망에 이리 공을 들일 필요가 없었겠지.

“지시라는 건 듣는 사람이 들어줄 의지가 있어야 의미가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시할 거라는 의미인가?”

“아니라 생각하십니까?”

당군악이 침묵했다.

지금 남궁도위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선친의 원수가 코앞에 있는데 뭘 생각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이 정도로 어리석은 녀석이 아닐 텐데……. 이 결정이 남궁세가를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몰아갈 수 있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건가?”

“새삼스럽게 생각할 일이 아닐 수도 있지요.”

임소병이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황이 이리되었다 한들, 남궁 소가주의 진정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남궁세가의 부흥에 진심이었고, 천우맹이 논하는 협의에 누구보다 공감하는 이였습니다.”

천우맹 내에서 남궁도위와 가장 으르렁댔던 이는 누가 뭐라 해도 임소병이었다. 그가 하는 말이니만큼 더없이 정확한 평가라 해야 할 것이다.

“한데?”

“그게 진심이라 해서 지금 하는 행동이 이상한 건 아닙니다. 누구나 더 우선인 것이 있고,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요. 가문의 부흥에 진심이라 해도 그보다 복수가 더 중요할 수도 있고, 그에게는 이게 어느 것보다 우선하는 협의일 수 있는 겁니다.”

당군악이 미간을 찡그렸다.

임소병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같은 길을 가고 있을 때는 그런 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달할 때쯤에는 알게 되죠. 서로 비슷한 길을 가려 했어도 도착하려는 곳은 다 달랐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을 증명하듯, 사방에서 보고가 날아들었다.

“맹주님!”

“무슨 일이냐?”

“절강에서 온 보고입니다! 우선 장강으로 이동할 터이니 지시를 내려 달라는…….”

“지시라니!”

현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하지 않았더냐? 새로운 지시가 내려지기 전까지는 하던 임무를 속행하는 것으로! 그런데 왜 자의적으로……. 누구냐? 누가 보내온 전갈이냐?”

“배, 백천 사형입니다.”

“누구……?”

“백천…….”

현종이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임소병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런 법이죠.”

당군악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제 이마를 감싸 쥔다.

“백천이 장강으로 향했다면, 당연히 오검들도 그 뒤를 따르겠군.”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럼 화산의 다른 이들도 그리될 테고.”

“아마도.”

당군악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이토록 그들의 의도에서 벗어난 일이 제멋대로 벌어질 수 있는가? 기껏 만들어 놓은 연락망이 거꾸로 저들의 결정을 본단에 전달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고?

여기까지 생각하니 새삼 그들이 지금껏 해 온 일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제각각 생각이 다르고, 고집이 센 이들을 어떻게 한곳에 묶어 놓았단 말인가?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그들이 우습게 보았던 구파일방의 결속력이 강호의 역사에 유례없을 정도로 탄탄하다는 평을 받아 왔다는 사실을.

법정이 모자란 게 아니었다. 법정이나 되니 그런 구파를 어떻게든 묶어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당군악은 엄두도 못 낼 일이 아닌가?

“그럼 방법이 없다는 건가?”

“글쎄요……. 저는 방법을 찾을 수 없지만, 방법이 있는 사람이야 있겠죠.”

“그게…….”

그게 누구냐고 물으려던 당군악이 입을 닫고 말았다. 너무 당연한 것을 물으려 했으니까.

“총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연락을 받았으니, 분명 남궁세가 쪽으로 향했을 겁니다.”

당군악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맞다. 청명이라면 당연히 그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잘못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청명과 화산, 그리고 남궁세가가 모조리 장강으로 향하는 상황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이쯤 되면 이걸 전면전이 아니라고 부정할 도리가 없었다.

“이쪽에서 무슨 수를 쓰려 해도 늦었습니다. 우리는 장일소를 견제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모자랍니다. 결국은 강북에 있는 이들이 결정을 지어야 합니다.”

“…….”

당군악의 고개가 깊이 떨어졌다.

“결국은 다시 녀석이로군.”

그토록 그 어깨에 짊어진 부담을 줄여 주려 애썼건만, 또다시 청명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건 그의 존재가 너무 크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들의 힘이 그만큼 부족하기 때문일까?

“다만……. 총사라 해도 이번 일은 쉽지 않을 겁니다. 이건 반쯤은 그가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니까요.”

“자초?”

임소병은 당군악의 의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어서?

아니, 그도 대답할 말이 궁해서다.

대신 그저 궁금했다.

‘어느 쪽일까?’

청명의 믿음과 장일소의 노림수.

그중 무엇이 더 옳았는지 곧 결정이 날 것이다.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대가로 말이다.

그리고 그 시각.

“소가주님.”

“음.”

남궁도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바라본다.

푸른빛.

보는 이에게 결코 나쁜 인상을 주는 빛깔은 아니다. 하지만 저 장강의 물빛을 닮은 푸른빛은 남궁세가에게 있어서는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원한의 빛깔이었다.

그 빛깔로 몸을 두른 이들을 발견한 남궁도위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어렸다.

“수로채로군.”

“척후(斥候). 혹은 선행조로 보이는군. 소가주, 어찌할 것인가?”

남궁명의 말에 남궁도위가 뒤를 바라보았다.

남궁세가의 흰 무복을 입은 검수들이 하나같이 형형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두 눈에 짙은 결의와 원한을 담고.

‘삼분지 이 정도인가?’

강북으로 온 이들 중 모두가 합류하지는 못했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남궁도위가 그들이 합류할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았으니까.

그럼 이 정도로는 부족한가?

‘천만에.’

모두가 모인다 해도 지금 남궁세가의 힘으로는 수로채를 상대하기 버겁다. 그러니 오히려 힘이 부족한 것 따위는 계산하지 않아도 좋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목숨을 내다 버릴 각오는 되어 있는가?”

대답은 없다.

대신 그를 바라보는 남궁의 검수들이 일제히 검집을 바닥에 내버린다. 과거 그들이 매화도에서 했던 각오.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를 재현할 뿐.

“좋군.”

남궁도위가 빙긋 웃었다.

그때 못다 지킨 각오를 이곳에서 지켜 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가자. 남궁세가.”

남궁도위가 자신의 검집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세상에 드러난 그의 애병(愛兵)이 새하얀 검기를 내뿜었다.

콰아아아아아!

남궁도위가 날린 흰 빛의 검기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수로채의 수적들을 향해 날아간다.

“진혼(鎭魂)의 시간이다!”

그와 동시에 하늘을 뚫을 것 같은 남궁세가의 포효가 세상 가득 울려 퍼졌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