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0화. 물러설 수 있습니까? (5)
백상은 말 그대로 사색이 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백천과 윤종이다.
재경각은 화산의 자금을 관리하는 곳이지만, 그 돈을 움직이는 것은 누가 뭐래도 사람이다. 한도가 정해진 돈을 어디에 쓸 것인가는 결국 사람이 판단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기에 백상은 알고 있다.
현자 배와 청명 아래 모두 평등해 보이는 화산 내에서 가장 존재감이 큰 게 누구인지 말이다. 어떤 이들이 화산의 중심인지 말이다.
‘왜……?’
백상은 때로 다행이라 여겼고, 또 때로는 안도했다. 화산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두 사람의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그 정도를 넘어 두 사람이 서로의 유일한 이해자처럼 보일 때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그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적의를 숨기지도 않고 충돌하고 있다.
“자, 잠시만. 윤종아, 너….”
“나서지 마라, 백상.”
백상이 무어라 말려 보기도 전에 백천이 차갑게 말허리를 끊었다. 놀란 눈으로 사형을 돌아본 백상은 그 냉랭함에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백천이 다시 윤종을 쏘아본다.
“계속해 봐라.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냐?”
“사숙.”
“힘으로라도 막을 셈이더냐?”
윤종이 조금 지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사숙의 행동이 옳지 않다는 건 스스로 알고 계실 겁니다.”
“네 행동은 옳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로군.”
“……그런 게 아니잖습니까.”
“정말 아닌가?”
백상은 보았다.
비교적 침착해 보이던 윤종의 얼굴이 금이 가듯 미세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제가 왜…….”
“주제넘게 굴지 마라, 윤종.”
백천의 말에 윤종의 어깨가 일순 움찔했다.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그게 옳은 것도 아니다. 네 생각을 내게 강요하지 마라.”
“사숙!”
“비켜라.”
“…….”
“비켜.”
백천의 기세는 한없이 차가웠고, 윤종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짓깨물었다.
“화산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윤종을 무시하고 발을 내디디려던 백천이 멈칫했다.
“……무슨 의미냐?”
“그렇게 무리하시는 이유가 화산을 위함이 아니었느냐는 말입니다. 화산의 장문대리로서 그 소임을 다하기 위한 게 아니었습니까?”
백천은 침묵을 택했다.
“제게는 분명 그리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사숙.”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지금 사숙께서 하려는 일이 정말 화산의 제자들을 위함인지 묻는 겁니다.”
“윤종아.”
“남궁은 화산이 아니잖습니까!”
정적이 흘렀다. 백천은 뭐에 세게 얻어맞기라도 한 듯 멍하니 윤종을 보았다.
“남궁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사숙께서 제게 그러라고 하신다면 저는 얼마든지 할 겁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하지만 사숙이……. 사숙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사숙이 화산에서 어떤 존재인지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백상은 도통 이해하지 못하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묘하게 어긋나고 있다. 그들만의 함의(含意)가 말 곳곳에 녹아 있다.
“내가 화산에서 그만큼 중한 존재라는 의미냐?”
“당연…….”
백천의 말이 윤종의 말꼬리를 잘라낸다.
“아니면, 나는 더 이상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냐?”
“사숙!”
참다못한 윤종이 버럭 소리쳤다. 울분이 실린 듯 목소리가 끝이 갈라졌다. 제 의도는 결코 그런 게 아니었다는 뜻이나, 분명 묘한 원망도 실려 있었다.
그러나 백천의 눈은 한없이 차가웠다.
“그런 게 아니라면 물러서라. 나는 네 사숙이고, 화산의 장문대리다.”
“장문인의 명이고, 태상장문인의 명입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윤종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이건 그가 아는 백천이 아니다. 그가 아는 백천이라면, 그와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을지언정 장문인과 태상장문인의 이름 앞에서 이런 식으로 반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체 무엇이 이 사람을 이토록 고집스럽게, 편협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윤종의 입에서 날 선 말이 툭 내던져졌다.
“죽을 자리라도 찾는 겁니까?”
“야!”
백상이 참지 못하고 고함쳤다.
하지만 윤종은 백상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백천만을 노려보았다.
“왜 그렇게 다급하게 구는 겁니까? 사숙이 가지 않으면 누가 죽기라도 한답니까! 사숙이 간다고 해도 대체…….”
말을 하던 윤종이 아차 한 듯 입을 다물었다.
백천은 그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능히 짐작하였다.
“뭘 할 수 있느냐는 말이겠지?”
“……아뇨. 저는.”
윤종은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순간적으로나마 그리 생각했음을 부정할 수 없으므로.
윤종은 생각했다. 아무리 되짚어 보아도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고.
몸이 성치 않은 백천이 위험한 전장에 뛰어들어 개죽음당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백천은 강하기 때문에 백천인 게 아니다.
설령 무공을 모조리 잃어 개미 한 마리 제 손으로 죽이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백천이고, 윤종의 사숙이며, 화산의 다음 장문인이다.
그런 백천을 이런 일로 잃을 순 없다. 절대로.
결연함을 넘어 독기까지 내뿜는 윤종을 보며 백천이 씁쓸하게 말했다.
“능력이 부족하다고 물러설 수는 없다. 그건 변명일 뿐이다.”
“…….”
“네가 종종 하던 말이지? 그렇지 않으냐?”
윤종이 입술을 깨문다.
경우가 다르다. 그리 말하고 싶다.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는 사람이 되는 한이 있어도.
하지만…….
“마지막으로 말한다. 물러서라. 네가 나를 아직 사숙으로 생각하고, 화산의 장문대리라 여긴다면.”
윤종의 입에서 허탈한 한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그 말만은 하지 않았으면 했건만…….
“알겠습니다.”
결국 윤종이 뒤로 한발 물러섰다.
“대신, 따라가겠습니다. 그것까지 말리지는 않으시겠죠?”
백천은 옆으로 물러선 윤종을 말없이 일별하고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윤종 역시 악의에 차 그를 가로막은 건 아니니까.
하지만…… 마음속 한구석에 원망이 싹튼다.
왜 모를까. 지금 윤종이 하는 모든 행동이 되레 백천을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어렵구나.’
백천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다시 뜨인 그의 두 눈에선 망설임 따윈 씻은 듯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동한다. 지금 당장!”
“예!”
백천이 백자 배들을 이끌고 먼저 달려간다.
백상은 그 뒤를 곧장 따르지 않고, 윤종을 빤히 보았다. 아까와는 달리 다소 불편함이 실린 시선이었다.
“당연히 이유가 있었겠지. 다름 아닌 윤종이 너니까.”
“…….”
“하지만 네 사숙이다. 네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게 옳았을까 싶긴 하구나. 늘 목적으로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거다.”
그 말에 윤종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잠시 말없이 윤종을 노려본 백상이 찬바람이 일도록 몸을 돌려 백천의 뒤를 따랐다.
멀어지는 백자 배를 복잡한 눈길로 응시하던 윤종은 긴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우리도 가자.”
“……예, 사형.”
대답하는 조원 중 몇몇은 무언가를 짐작하는 눈빛이고, 또 몇몇은 윤종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지 불편한 얼굴이었다.
어쩐지 속에서 울컥 무언가가 치밀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쏟아내려는 듯 입을 뗐던 윤종은 이내 꾹 누르며 고개만 저었다.
‘이해받고자 함이 아니었잖은가?’
“……가자.”
“예.”
땅을 박차며 윤종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틀린 게 아니야.’
결코.
그들이 떠난 곳으로, 두 사람이 내려섰다.
“……왜 막은 겁니까, 사고?”
조걸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유이설에게 물었다.
그러자 유이설이 감정이랄 게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뭘 하려고.”
“두 사람이 쓸데없이 싸웠잖습니까? 당연히 말리기라도 해야…….”
“어떻게?”
“예?”
“어떻게?”
조걸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유이설은 그저 딴죽을 걸기 위해 묻는 것이 아니다. 조걸도 그걸 알았다.
“그…… 두 사람도 물론 생각이야 있겠지만, 윤종 사형이 너무 과한 면이 있었잖아요. 그래도 사숙인데.”
“너는?”
“네?”
유이설이 조걸을 빤히 응시했다. 투명한 눈길이었다.
“넌 사형을 보내고 싶어? 전장에?”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조걸은 백천에게 찬동하는 편에 가까웠다.
백천과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조걸 역시 절대 참을 수 없었을 테니까. 검을 쥐고 살며 해 온 모든 것을 부정하고 물러날 수는 없으니까.
설사 그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해도 발버둥 칠 수 있는 만큼은 발버둥 쳐 봐야 하지 않을까?
“저는 그게…….”
“그럼 사형의 시체를 보게 되겠지. 잘했다고 할 수 있어, 그때?”
“아니, 사고.”
“죽으면 다 끝이야.”
조걸이 움찔했다. 차분하고 나직하여 묘하게 더 섬뜩한 목소리였다.
“좋은 의도가 있어도, 절대 포기 못 하는 이유가 있어도…… 다 끝이야, 죽으면. 남은 사람들 짐만 커져.”
“사고.”
“윤종이 틀렸어?”
“그건…….”
조걸은 평소처럼 수긍하고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한 가지가 마음속에 체한 것처럼 걸렸다.
평소라면 유이설에게 마음속의 말을 모두 해서 굳이 벽을 세우진 않았겠으나…….
“죽으면 다 무의미하다는 게, 살기만 하면 뭐든 괜찮다는 의미는 아니잖습니까?”
“……뭐?”
조걸이 조금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렇잖아요. 사숙에게 뒤로 물러나서 구경이나 하라고 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건 호의가 아니에요. 사람을 산 채로 죽이는 일 아닙니까?”
유이설이 무표정한 얼굴로 조걸을 바라봤다.
침묵이 내리깔린다.
그 정적이 너무 무거워져 두 사람을 짓누르기 전에 유이설이 몸을 획 돌리며 걸어갔다.
“잃어 보지 않아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너는.”
“사고.”
“먼저 갈게. 조를 두고 와서.”
탓.
유이설이 바람처럼 빠르게 멀어졌다. 홀로 남겨진 조걸이 거친 손으로 제 얼굴을 마구 비볐다.
“빌어먹을!”
어차피 들어 줄 것도 아니면서 뭐 하러 물어본단 말인가?
결국엔 자기들 멋대로 정하고, 그의 생각은 반 푼짜리로 취급하면서.
“제길.”
다시 한번 욕지거리를 내뱉은 조걸은 머리를 거칠게 벅벅 긁고 한숨을 쉬었다.
시선을 올리니, 하늘이 맑고도 푸르렀다.
가슴이 되레 답답해져 왔다. 세상은 다를 바 없는데 너희만 흔들리고 있다고 말해 오는 것 같아서.
“……뭐가 이리 복잡해.”
지금까지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들의 세상은 간명했고, 그러므로 그들의 방식을 관철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방식이 서로 맞지 않고 뒤틀리고 있지 않은가?
“사형.”
“알아.”
등 뒤로 다가오는 조원들을 힐끔 돌아본 조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따라가자. 어떻게든 되겠지.”
“진짜 그래도 됩니까? 우리가 받은 지시는…….”
“내가 책임…….”
조걸이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책임이라는 말이 새삼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다. 쉽게 내뱉을 수도 없을 만큼.
“우선은 그렇게 하자. 부탁할게.”
“……일단 알겠습니다, 사형.”
기운 없이 발을 내디딘 조걸은 억지로 제 발에 힘을 불어넣었다.
‘녀석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쩐지 그 망할 놈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생각할 것도 없이 둘의 엉덩이를 모두 걷어차 버렸을 놈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