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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59화 (1,560/1,567)

1559화. 물러설 수 있습니까? (4)

“수로채?”

“예, 사숙!”

백상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이런 뻔한 수를!’

뻔한 수지만 생각지도 못했다. 상대가 짐작하지 못하는 시점에 두는 수는 아무리 뻔해도 묘수가 된다.

“맹에서는?”

“아직 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놈들이 안휘로 진입했으니 조심하라는 지시만…….”

“안휘?”

백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안휘와 수로채. 두 단어를 듣는 순간, 앞으로 벌어질 일이 익히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남궁세가는!”

“예?”

“남궁세가는 어쩌고 있다더냐? 소가주께서는?”

“그것까진…….”

백천은 아랫입술을 짓깨물었다.

물어 뭐 하겠는가?

남궁도위는 정명한 사람이다. 하지만 침착한 사람은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야 호수 같을지 모르나, 그 안에는 불길이 끓는 사람이었다.

과거의 남궁도위가 어떠했는지 두 눈으로 뻔히 보지 않았던가?

그런 이가 원수가 다가오고 있단 소식을 듣고 과연 가만히 있을까? 그동안은 물 밑에 잠겨 있어 손도 쓸 수 없었던 용이 스스로 뭍까지 올라왔는데?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 용을 제 손으로 벨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과연 고민이라는 걸 할까?

“망할!”

더 짐작해 볼 필요도 없다. 남궁은 분명 장강으로 갔다.

“맹은…….”

무리다.

소식을 듣고 상황을 판단하여 내리는 지시가 이곳에 도달하기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한나절은 걸릴 터. 눈이 돌아 버린 남궁도위가 장강에 도달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최소한의 이성이 남아 있어서 그리 급하게 돌진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지시가 오고 나서야 움직이면…….

‘늦어!’

때를 놓치고 나면 무슨 수를 써도 남궁과 수로채의 운명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백천은 긴장으로 살짝 굳어진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장강으로 간다.”

“사, 사형!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맡은 임무와 다르다는 것을. 걱정하지 마라. 나라고 당장 장강에 가서 남궁세가를 도와야 한다고 날뛸 만큼 막 나가지는 않으니까.”

“그럼……?”

“명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받아야지! 그래야 늦지 않게 말리든 돕든 할 것 아니냐. 여기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백상이 그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백천의 말에 틀린 구석은 없었으니까.

문제?

당연히 있다. 지금 천우맹의 각 조는 각 성에 설치된 지부를 통해 명을 하달받도록 되어 있다. 성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그 명령체계에 혼란이 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백상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굳이 그 우려를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건, 그게 남궁이 처한 위기에 비하여 너무도 작은 문제라는 데 동의하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당장 출발해야 한다.”

“예!”

백상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 옳은가 묻는다면 콕 집어 대답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는 백천의 판단만큼은 완벽히 신뢰했다.

그런 그들 앞에, 뜻밖의 예상도 하지 못한 이가 불쑥 나타났다.

“불가(不可)합니다.”

백천이 놀라 시선을 틀었다.

그들을 막아서며 다가오는 이들이 보였다.

“……윤종아?”

선두에서 선 윤종을 보며 백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왜 여기…….”

“장강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윤종이 느릿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알고 계시겠지요, 사숙. 특별히 명을 받지 않는 이상은 원래 하던 임무를 지속한다. 그게 우리가 맹을 떠나오기 전 맹주님께 받은 지시입니다. 지금 사숙은 그 지침을 어기려 하고 있습니다.”

백천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느냐?”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생길 자의적인 판단을 막기 위해서 연락망이 있는 겁니다. 모두가 제멋대로 움직일 거라면 맹이, 연락망이 왜 필요합니까?”

백천은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윤종은 그런 백천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을 듯했다.

백천이 입을 뗐다.

“이럴 작정이었느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원칙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백천이 이를 갈아붙이며 윤종을 쏘아보았다.

“남궁세가다. 남궁의 소가주야.”

“…….”

“그런 사람이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들 게 뻔한데, 이를 알면서도 말리지는 못할망정 구경이나 하란 말이냐?”

“안다고 해도 같이 뛰어들지는 않아야겠죠.”

“윤종아!”

윤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숙. 아십니까? 지금 사숙의 행동이 참 누구를 떠올리게 합니다.”

“…….”

“놈은 항상 그랬죠. 지시나 명, 그리고 원칙보다는 순간순간의 판단을 중시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놈을 말리던 건 다름 아닌 사숙 아니셨습니까?”

부정할 수 없다. 백천이 늘 앞장서서 말려 왔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놈이 있을 때의 사숙은 그런 것에 학을 떼는데……. 막상 녀석이 없을 때의 사숙은 꼭 녀석처럼 구시니 말입니다.”

윤종은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젓더니, 이내 칼 같은 눈빛으로 백천을 주시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제가 사숙의 역할을 할 수밖에요. 가시면 안 됩니다. 아니, 결코 보내지 않겠습니다.”

그 순간 백천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었다.

“보내지 않으면?”

“…….”

“검을 뽑아 막아서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사숙.”

“그때처럼?”

그 말에 윤종의 얼굴도 굳어졌다.

“저는…….”

“어디 해 봐라.”

“사숙!”

“뽑아라. 그리고 막아 봐라. 팔 하나쯤 잘려 나가면 내가 포기할지도 모르잖느냐?”

윤종이 이를 악물며 턱의 힘줄이 도드라졌다.

두 사람이 날을 드러내며 서로 대치하자 당황한 백상이 언성을 높였다.

“대, 대체 둘 다 왜 이러는 겁니까!”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 * *

우드드득.

깔끔하게 으스러진 머리가 땅으로 툭 떨어진다.

머리를 잃어버린 몸뚱이는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잠시간 푸들푸들 경련했다.

실로 끔찍한 광경이나, 그 시신이 무섭다거나 혐오스럽다고 느끼는 이는 이곳에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사람은 때에 따라 살쾡이도 두려워할 수 있으나, 범을 앞에 두고 살쾡이를 두려워하진 않는다.

누군가의 죽음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앞에 있으니 저 죽음은 아무런 의미조차 가지지 못한다.

“흐음.”

장일소는 새하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잘 손질된 손톱을 감상하는 듯한 모양새로 피에 젖은 손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보던 그가 이내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그의 새하얀 얼굴에는 피가 점점이 튀어 있었다.

“혹시…… 또 불만 있는 사람? 있니? 있으면 손 들어 보렴.”

손을 들기는커녕 모두가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푹 고개를 숙인 채 차마 엎드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작은 행동조차 눈에 거슬리면 목숨을 잃을 여지가 되고 말 것이다.

모두가 숨을 죽이는 가운데 장일소가 혀를 찼다.

“쯧쯧. 이렇게 대가 약해서야.”

그러더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신이 어느새 경련을 멈추고 식어 가고 있다.

조금 전까지 이곳에서 목소리를 높여 불만을 토로하던 이다. 드물게 순찰을 나왔던 장일소가 뒤에서 다가오는 것도 모르는 채로 말이다.

“그래도 얘는 용기라도 있잖니. 나는 이런 애들을 좋아한다니까?”

“…….”

“더 불만 있는 사람, 진짜로 없니?”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장일소가 화사하게 웃었다.

“그래. 그럼 가 보렴. 자리 잘 지키고.”

“예!”

목이 터지도록 대답한 이들이 달아나듯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장일소와 시신만이 덩그러니 남겨진 곳에 을씨년스러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저벅.

그 광경을 저만치서 지켜보던 호가명이 다가왔다. 그리고 준비해 두었던 비단을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흐음. 뭐가?”

“……제가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 벌어진 일입니다.”

“쯧쯧. 가명아. 저 혈기 넘치는 애들을 여기서 이렇게 잡아두고 있는데 어찌 불만이 없을 수 있겠느냐? 불만이 쌓이는 건 당연한 거란다.”

호가명의 눈빛에 순간 의문이 스쳤다. 이해하면서 왜 죽였냐는 의미다.

장일소는 질문을 듣지 않고도 그 의문을 읽고 답을 돌려주었다.

“재미있는 소리를 하더구나. 내가 겁을 먹어 움직이지 않는다느니, 배에 기름이 차서 이제는 싸우려 들지 않는다느니.”

그 순간 호가명의 눈이 놀랍도록 싸늘해졌다. 죽은 이를 노려보는 모양새가, 시신이라도 다시 도륙 내고 싶은 듯했다.

호가명이 보았을 때 장일소는 때로 과하게 자비로웠다.

만일 그 망언을 들은 게 호가명이었다면 저리 쉬이, 곱게 죽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무서운 눈빛으로 볼 것 없다. 나는 하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으니까.”

“……예?”

“그나마 다행이지 않니. 저런 애가 있어서.”

장일소가 나직이 웃었다.

“어차피 오늘쯤에는 적당한 녀석 하나를 잡아 본보기로 삼을 셈이었는데 마침 죄를 지어 준 놈이 있어서 멀쩡한 아이를 죽일 필요는 없어졌잖니. 고마운 일이지.”

천하의 호가명도 이 말에는 조금 당황했다.

“……그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장일소가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산책이라도 하는 듯 여유로웠다.

“이제 슬슬 잊혔을 때가 되었기 때문이란다.”

화사한 웃음이 맺혔다.

“내가 누구인지. 저들의 목숨이 누구의 것인지. 저들이 누구의 명을 받는지 말이다.”

“…….”

“사람이란 참 재미있어서, 뻔히 알고 있는 것도 잊어버리고 오늘과 내일이 다르지. 알아도 다시 깨닫게 하고, 몰라도 새겨 놓아야 한단다. 안 그러면 결국은 난장판이 벌어져.”

납득한 호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식에서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역시 자주 쓰는 방법이다.

문파의 기강이 흐트러질 때 평소보다 벌을 과하게 준다든가. 일부러 죄지은 이를 찾는다든가.

“사람이 왜 그런 우를 범하는지 아느냐?”

“……글쎄요.”

“사람이란 결국 제 생각이 가장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란다. 상대가 누구라고 해도 말이야.”

“…….”

“그러니 저 멍청한 놈들조차 자신들의 생각이 나보다 더 옳다 여기겠지. 나라면 벌써 쳐들어가 적의 목을 베었을 텐데, 련주가 멍청해서 실기하고 있다, 뭐 그렇게.”

“아둔하여 그런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다행이지.”

“……예?”

장일소의 입꼬리가 비틀리듯 올라갔다. 비단으로 훔치고도 덜 닦인 피가 얼굴에 번져 있었다. 호가명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알게 하고, 떠올리게 해야 해. 자신들은 그저 따르면 그만이라는 것을. 그럼 문제가 없어진단다. 그런데…… 생각해 보렴. 그걸 제때 하지 못하면 어찌 될까?”

“……저마다 제 생각이 가장 옳다 여기겠지요.”

“그래. 그리고 그 와중에 그 아둔한 것들을 흩어 놓기까지 하면?”

“그야…….”

장일소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머리가 여럿이 되어 버리지. 서로가 자신이 가장 옳다고 여기고, 제각각의 명분을 내세우게 돼. 심지어 그게 서로를 위한 길이라 여기게 된단다. 우습지 않니?”

호가명의 등골이 일순 서늘해졌다.

그럼 설마…….

“연맹이라. 참 좋은 말이지. 서로 다른 입장과 배경을 지닌 이들이 하나의 가치를 위해 뭉친 것.”

“예.”

“실로 우스워.”

장일소가 쿡쿡 웃어 댔다. 색 옅은 눈이 섬뜩한 광채를 내뿜었다.

“그저 타인의 능력에 눌려 있었던 것뿐인 놈들이 제게 뭔가 대단한 웅심이라도 있는 듯 굴어 대는 게 말이다. 남의 선택을 제 선택이었다고 믿고, 남의 각오를 제 각오라 믿어 댔던 것들은 결국 제 목에 칼이 들어올 때 그 민낯이 드러나는 법이지.”

호가명의 시선이 자연히 강북 쪽으로 향했다.

“선택을 했으니까.”

“…….”

“선택이라는 건 가치를 저울질하고 옳고 그름을 나눈다는 의미란다. 한마음이라 믿었던 이들도 반복해서 무언가를 계속 선택하다 보면 결국 서로가 다름을 알게 되지.”

“세상은 그걸 분열이라 부릅니다.”

“그래. 그렇지.”

장일소가 빙그레 웃었다.

“사람이란 분열하기 위해 존재한단다. 그걸 막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야.”

장일소가 차게 식은 시신을 일별했다.

“넌 선택하는 존재가 아님을 알려 주는 것.”

호가명이 공감하여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지만 놈들이라고 이 상황을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 당연히 알겠지. 그래서 수습하려 들 거란다. 하지만 말이다.”

장일소가 빙그레 웃었다.

“그 선택의 순간이 연이어 찾아온다면 어찌 되겠느냐?”

그 답은 호가명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그리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건데.”

장일소의 두 눈에 묘한 열기가 어렸다.

“어디 한번 보자꾸나. 믿음이라는 알량한 감정에 기대어 제 책임을 놓아 버린 이가 얼마나 깊은 구렁텅이까지 빠져들 수 있는지.”

호가명은 저도 모르게 몸을 희미하게 떨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섬뜩했다.

‘믿음이라니…….’

그가 알기로 장일소란 사람은 세상 누구도 믿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깊은 증오는 대체…….

장일소를 바라보는 호가명의 얼굴에 깊은 의혹의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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