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8화. 물러설 수 있습니까? (3)
“아아아아아악!”
인세에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다.
검은 파도처럼 밀려온 수로채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말 그대로 으스러뜨렸다.
고작 증오로는 그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 없다.
장강수로십팔채. 그들은 본디 장강 위에서는 저승사자보다 두려운 존재였다.
하지만 사패련의 일익이 된 이후, 그들의 위상은 아무리 보아도 과거에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흑룡왕이 정파의 화산검협에게 패한 이후로는 장강이 양측 진영의 경계선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위상이 나날이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장강수로십팔채는 한때 동등했던 이들의 눈치나 보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로 인해 쌓여 온 울분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여파는 고작 사파의 잡졸들이 침범해 저지르던 일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마, 막아!”
지금까지는 상황을 주시하며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중소문파들도 기겁하여 항전에 나섰다.
항전할 수밖에 없었다. 적이 있을 만한 곳은 교묘히 피해 다니던 잡졸들과 달리, 수로채는 적들이 있을 만한 곳은 모조리 쥐잡듯이 뒤지며 전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아나거나, 혹은 싸우거나 선택해야 하는데 사실상 선택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아아아악!”
삼지창에 가슴을 꿰뚫린 검수가 입으로 피를 후드득 쏟으며 경련했다. 삼지창을 박아 넣은 이의 두 눈은 살기로 번들거렸다.
“크흐흐. 이 강북 바닥에 처박혀 있으면 안전할 줄 알았나 보지?”
검수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삼지창을 잡으려 하자, 수적은 냉소를 흘리며 삼지창을 비틀었다. 가슴팍이 후벼 파지며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끄으으…….”
검수가 쏟아지는 고통에 경련할 때마다 수적의 두 눈은 열기로 들떴다.
“이노오오옴!”
어디선가 달려온 이가 날카로운 검을 날리며 수적의 목을 일거에 베어 내려 했다.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
검은 반월과 같은 기운이 허공을 격하며 날아든다. 그리고 달려들던 이를 대번에 반으로 갈라 버렸다.
콰아아아앙!
사람 하나를 쪼개 놓고도 기세를 잃지 않은 기운은 뒤편에 불뚝 솟아 있던 바위 하나를 완전히 산산조각 내었다.
“어으…….”
실로 기겁할 광경이다. 놀란 수적이 몸을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흐, 흑룡왕이시여.”
어느새 등 뒤까지 다가온 적세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수적은 느닷없이 범을 맞닥뜨린 것처럼 그대로 얼어붙었다.
쾅!
흑룡왕이 단번에 수적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는 피를 내뿜으며 나가떨어진 수적을 눈빛만으로도 으스러뜨릴 듯 노려보았다.
“이 병신 같은 새끼…….”
“죄, 죄송합…….”
피투성이가 된 수적은 고통을 참아 내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그를 일별한 흑룡왕이 고개를 들어 우레와 같은 소리로 외쳤다.
“발목 잡는 놈들은 모조리 찢어 죽여 버리겠다! 정신 똑바로 차려!”
“예!”
바짝 긴장한 수적들이 전신의 근육을 팽팽하게 당기며 앞으로 내달렸다.
모두의 얼굴에 긴장과 흥분이 동시에 어려 있었다.
흑룡왕의 눈 밖에 나면 살아날 수 없으리라는 데서 오는 긴장, 그리고 흑룡왕의 힘이 여전하다는 데서 오는 흥분.
그 두 가지로 무장한 수적들은 잘 훈련된 사냥개처럼 미지의 땅을 달렸다.
우득.
언월도를 강하게 움켜잡은 흑룡왕이 다시 발을 내디뎠다.
이 화려한 시작은 분명 이곳을 넘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달아나지 마라. 아니, 달아날 테면 달아나 봐라!’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갈 테니까.
* * *
“소가주님!”
“오셨습니까?”
달려오는 남궁명을, 남궁도위가 빙긋 웃으며 맞았다.
남궁명은 재빠르게 소가주의 안색을 살폈다. 소식을 듣자마자 전력으로 달려와 남궁도위와 합류한 것이다.
의외로 남궁도위는 차분해 보였다. 바로 지척에 아비를 죽인 원수가 살아 있다는 것을 분명 들었을 텐데 말이다.
“괜찮으십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남궁도위가 되레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침착한 건가?’
그 모습을 보자니 안심과 동시에 우려가 들었다. 흥분하지 않았다는 건 분명 반길 일이지만…….
남궁명이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
“들으셨습니까?”
“흑룡왕 말입니까?”
남궁도위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이 말이다.
“예, 들었습니다. 흐음. 상황이 조금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숙부님.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아마 저들이 노렸던 건 애초에 우리 뒤를 찌르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렇다는 건 이전에 강북에 밀어 넣은 사파 놈들 모두가 사석(捨石)으로 쓰였다는 건데……. 이런 말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과연 패군은 패군이군요. 그만한 이들을 희생양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니.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는 인물입니다.”
남궁도위가 살벌한 말을 늘어놓고 있음에도 남궁명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가주는 현재 침착한 상태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것이었다.
복수심에 불탄 남궁도위가 당장 장강으로 달려가기라도 할까 봐 얼마나 가슴을 졸이며 달려왔던가?
하지만 다행히 남궁도위는 그의 생각 이상으로 잘 성장해 준 모양이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남궁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예, 숙부님. 놈들이 노리는 바가 뻔한데, 이대로 두면 피해가 점점 더 커지겠지요.”
안휘 사람들을 최대한 대피시키고 있지만,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는 인원이 그래 봐야 얼마나 되겠는가.
한 성의 인원을 단기간에 모조리 물리는 것은 나라가 나서도 불가능하다. 고작 일개 가문, 그리고 고작 하나의 연맹이 할 수 있을 일이 아니다.
“그럼 우선은 맹에서 오는 명령을…….”
“아닙니다.”
남궁도위가 담담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는 늦습니다. 좋은 연락망을 구축했다고는 하지만, 맹에서 이 먼 곳의 일을 세세히 알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부터라도 당장 할 수 있는 건 해야 피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습니다.”
남궁명이 남궁도위를 곁눈질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그야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남궁도위가 빙그레 웃었다.
“죽여야지요. 흑룡왕을.”
공기가 삽시간에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남궁명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눈치를 보던 것도 잊고 그저 멍하니 남궁도위를 보았다.
하나 정작 남궁도위는 당연한 말을 당연하게 뱉은 것처럼 태연했다.
“소, 소가주. 그게…….”
남궁명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심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충동적으로 생각하실 때가 아닙니다. 우선은…….”
“오해하지 마십시오, 숙부님.”
다 듣기도 전에 남궁도위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저는 지금 화나지 않았고, 감정에 휘둘린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저 당연한 일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소가주!”
“안휘에 수로채가 쳐들어왔습니다. 그럼 누가 그들을 막아야 합니까?”
남궁명이 입을 다물었다.
“……그건…….”
“당연히 남궁세가입니다. 그리고 많은 적을 일일이 제거하는 것보다는 머리를 자르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다름 아닌 저들이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
“소가주!”
“그러니 저 역시 그리할 뿐입니다.”
남궁명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침착한 게 아니다. 아니, 정말 침착한 상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태가 어떠하든 결론이 동일하면 결국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참다못한 남궁명이 언성을 높였다.
“왜 이러시는 거요, 소가주! 지금 남궁세가의 힘만으로는 수로채와 대적할 수 없습니다. 뻔히 알고 계시지 않소?”
“숙부님.”
남궁도위는 사뭇 가라앉은 눈으로 남궁명을 응시했다.
“그렇다고 물러서시겠습니까?”
“……예?”
“힘이 부족하니, 남궁만 믿고 있을 이들을 두고 달아나시겠습니까? 힘이 부족하니, 다른 이들이 힘을 빌려줄 때까지 이곳에서 숨만 죽이겠냐는 말입니다.”
남궁명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예. 숙부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게 현명한 방법이겠지요. 하지만 숙부님. 잊지 마셔야 합니다. 남궁은 그 현명한 길을 택하지 않은 이들 덕분에 가까스로 살아났습니다. 그들이 구파처럼 ‘현명한 길’을 택했다면, 남궁이라는 이름은 진즉에 세상에서 지워졌겠지요.”
“……소가주.”
“창천이더군요.”
남궁도위가 빙긋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그 하늘이 그들을 내려보고 있다.
“남궁은 어째서 창천을 그 기치로 삼는가? 어려서부터 오래도록 생각했습니다. 여러 대답을 들어 보았지만 딱 이해되는 말은 없더군요. 그런데 아버님을 보고, 다른 이들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남궁이 처한 상황까지 달라지니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숙부님. 남궁이 어째서 창천인 줄 아십니까?”
“……어째서입니까.”
“하늘 아래 부끄럽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궁도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이들의 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물러나면 숙부님께서는 떳떳하실 수 있습니까?”
“도위야…….”
“저는 아닙니다.”
고개를 내저은 남궁도위가 하늘을 똑바로 바라본다.
“어쩌면 아버님께서는 바라지 않으실지도 모릅니다. 그 선택은 아버님의 실수였고, 복수는 무의미하다고 여기실지도 모르고요.”
“그럴 것이다. 형님이라면 분명……!”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우리가 안휘의 사람들을 위험에 내던지고 물러나는 걸 아버님께서 용인하시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남궁명의 몸도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형제이자 가주였던 남궁황을 떠올린다.
생각할 것도 없다. 남궁황이라면 소식을 접한 즉시 자신의 검을 들고 장강으로 향했을 것이다. 저 더러운 수적 중 단 한 명도 살아선 장강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겠다며.
하지만…….
“숙부님. 힘이 부족하다는 말씀은 마십시오. 아버님께서는 힘이 부족해도 당신의 목숨을 거셨을 겁니다.”
남궁도위에게서 무거운 기파가 흘러나왔다.
“그 남궁의 이름을 잇고 아버님 같은 가주가 되어야 할 제게 아직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 결국 저 때문에 남궁이 남궁답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밖에는 더 되겠습니까?”
“도위야.”
남궁도위가 빙긋 웃었다.
“숙부님은 물러나십시오. 이건 소가주로서……. 아니, 가주 대행으로서의 명입니다.”
“그, 그건 무슨 소리냐?”
“만에 하나 제가 잘못된다면 누군가는 저를 대신하여 가문을 이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순간 남궁명의 심장이 차게 식었다.
지금 남궁도위는 승리할 수 있다고 여기고 가는 것이 아니다. 승패를 막론하고, 가야 하기에 가려는 것이다.
이 말인즉, 무슨 수를 써도 남궁도위를 말릴 수 없다는 뜻이다.
“저는 남궁의 이름을 지키러 갑니다. 사사로운 복수의 감정은……. 으음, 솔직히 없다고 할 수는 없겠군요. 하지만 괜찮지 않겠습니까. 두 가지가 서로 다른 말을 한다면 어렵겠으나, 같은 말을 한다면 겸사겸사 좋은 일이지요.”
남궁도위가 제 검을 툭 쳤다.
“아버님의 검입니다. 설령 그 힘이 예전만 못하다 해도 남궁은 여전히 남궁임을 증명할 것입니다. 제가, 이 검으로.”
남궁명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속눈썹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 숙부님께서는…….”
“너는 가주 대행이다. 가주가 아니다.”
다시 눈을 뜬 남궁명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러니 내게 명령하지 말거라. 형님의 원수를 갚는 일에서 나를 빼놓을 수는 없다.”
“숙부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날 이후 단 하루도 이날을 꿈꾸지 않은 적 없었다. 형님을 죽인 저 수로채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 그 피를 마시는 날을 말이다.”
남궁명은 이성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복수심으로 채웠다.
“선두엔 내가 서마.”
“…….”
“나를 막을 테냐?”
남궁도위가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그럴 수는 없지요.”
“그래. 남은 이들도 남궁이다. 내가 없다 해서 무너지지 않는다.”
남궁명마저 남궁도위의 편을 들고 나서니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너희 중 물러날 이가 있는가?”
“없습니다!”
“복수는 제 검으로 할 것입니다!”
“수로채가 안휘를 짓밟게 둘 수는 없습니다! 절대로!”
남궁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가주. 모두가 오면…….”
“아니요.”
남궁도위는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면 따를 이들은 알아서 올 것입니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길을 굳이 강요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 맞는 말이오.”
남궁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창천기를 올려라!”
“예!”
커다란 하늘색 깃발이 올라간다. 남궁세가의 가주를 상징하는 기(旗). 이곳에 남궁이 있음을 증명하는 기다.
남궁도위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마…… 누군가가 이곳을 향해 전력으로 뛰어오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를 기다려 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도장.’
오기라 욕해도 좋고, 치기라 비난해도 좋다. 하지만 사람은 때로 설익은 오기로 부딪쳐야 할 때도 있는 법!
“적의 위치는?”
“개방에서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아직 장강에서 멀리 이동하지 않았습니다.”
남궁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휘에 퍼져 있는 다른 남궁세가 조들이 합류할 시간을 고려해 어느 정도 속도를 조절한다면?
“하루 거리쯤 되겠군.”
모두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라…….’
남궁도위가 빙긋 웃는다.
“딱 적당한 시간이야.”
이 복수의 칼을 날카롭게 벼려 내기에는 말이다.
“출발한다! 놈의 수급을 취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존명!”
발을 내디뎠다.
남궁의 푸른 깃발이 장강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검은 용의 피로 그 깃발을 붉게 물들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