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557화 (1,558/1,567)

1557화. 물러설 수 있습니까? (2)

쾅!

거칠게 문이 열렸다.

당군악이 성큼성큼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얼음장 같은 얼굴만 보아도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미루어 짐작할 만했다.

“상황은 어떤가?”

자리에 앉을 새도 없이 그가 임소병에게 물었다.

“흑룡왕을 비롯한 수로채의 전력이 강북에 상륙했습니다.”

“어디인가?”

“……안휘입니다. 합비에서는…… 지척이라 할 수 있겠군요.”

당군악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안휘는 이번 작전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지역이다. 적들이 가장 많이 공격해 온 위치이기도 하고, 나아가 남궁세가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곳이니까. 그렇기에 천우맹의 사람들도 가장 많이 파견되었다.

그런데 그곳으로 수로채가 상륙했다?

‘우연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우선 앉으시지요.”

먼저 와 있던 현종이 권하자 당군악이 빠르게 착석했다. 그리고 굳어진 얼굴로 현종에게 말했다.

“아이들을 불러들여야 합니다.”

“…….”

“놈들이 뭘 노리는 건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이 일로 저들이 우리의 움직임을 유도했다는 건 확실해졌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녀석들을 천우맹으로 다시 불러들여야 합니다.”

현종이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흘렸다.

“하나, 가주님…….”

“맹주님.”

당군악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내리깔렸다.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놈들이 천우맹 본단의 전력을 약화하기 위해 잡졸들을 풀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저들이 노린 건 강북으로 파견된 아이들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강한 쪽보다는 약한 쪽을 먼저 노리는 게 병법에 있어서는 상식이니까.

그리고 지금 약한 쪽은 대부분 전력을 보존한 채 화음에 뭉쳐 있는 천우맹 본단 쪽이 아니라, 저 넓은 강북 땅에 뿔뿔이 흩어진 이들이었다.

“그러니 지금 곧장 아이들을 불러들여 재정비해야 합니다.”

“물러설 수 있습니까?”

그 순간 임소병의 차가운 목소리가 당군악의 귀로 파고들었다. 당군악의 눈썹이 슬쩍 일그러졌다.

“무슨 의미인가?”

“물러설 방법이 있냐고 묻는 겁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뭐 하러 개방과 야수궁을 통해 연락망을 만들었는가?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서가 아니었나.”

현종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모두 불러들이게.”

둘이 의견을 모으니 임소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도 설마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럼 강북은 어찌 됩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사파 잡졸 놈들을 풀어놓는 것만으로도 불구덩이가 되었지요. 그런 곳에 수로채까지 쳐들어왔습니다.”

당군악의 눈꼬리가 살짝 떨렸다.

“사패련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목적은 명백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 모든 걸 외면하고 화음에 웅크리자는 것입니까?”

당군악은 말문이 막힌 듯 임소병을 묵묵히 응시했다. 임소병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부채 끄트머리로 꾹 눌렀다.

“양민, 구원, 어쩌고……. 솔직히 다른 분들이 논하는 협의가 뭔지 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물러나는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 어찌 보일지는 압니다.”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네. 알고 있지 않은가?”

임소병이 차게 일갈했다.

“그리고 강북으로 가 있는 이들에게 어찌 느껴질지도 말입니다.”

이 말에는 당군악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머리로만 아는 것과 눈으로 직접 본 것은 확연히 다르지요. 강북으로 간 이들은 이미 강을 넘어온 악적이 양민들을 주살하는 광경을 생생히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 물러서겠습니까? 고작 자신들이 위험해졌다는 이유로?”

임소병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담담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섬뜩하게 들렸다.

“제 입으로 내뱉기엔 웃기는 소리지만, 이런 상황에서 결단코 물러나지 않았기에 천우맹인 겁니다. 차라리 죽으라고 명한다면 웃으며 죽겠지만, 살기 위해 양민들을 버리라고 하면 듣지 않는 곳이 천우맹입니다.”

당군악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물론 천우맹이 살기 위해 모두를 버리자는 의도로 말을 꺼냈던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지금 나가 있는 아이들의 입장에서야 그리 들릴 것도 당연하다.

문득 머릿속에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소소와 당패. 그의 아이들.

가주이기에, 그리고 아비이기에 누구보다 잘 안다. 두 사람만 해도 퇴각하라는 명을 받는다면 있는 힘을 다해 저항할 것이다.

하나.

“뒷감당은 내가 하겠네. 부맹주의 명으로 모두 퇴각하라 이르게. 항명은 받지 않겠네.”

그러나 임소병은 이번에도 완강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당군악의 눈이 매서워졌다. 임소병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지금껏 천우맹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문파는 누가 뭐라 해도 화산입니다. 항상 앞장서서 사고를 쳐 댔지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이 다를지도 모릅니다.”

정 안 되면 권위로 임소병을 찍어누를 생각이었던 당군악이 순간 멈칫했다.

임소병의 말에, 순간 너무도 익숙한 두 글자가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남궁인가?”

“예.”

임소병이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우맹이 이대로 물러서면 안휘는 잿더미가 된다. 그런데 남궁세가가 과연 그 명을 따를까?

“화산의 반발은 맹주님과 장문인의 권위로 찍어누를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남궁세가의 반발은 절대 그런 식으로 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남궁세가의 이탈만을 불러오겠지요. 총사께서 직접 소가주를 만나 설득하지 않는 이상은……. 아니, 어쩌면 그것마저도 소용이 없을지 모릅니다.”

“…….”

“그리고 만약 그런 사태가 터지게 된다면…….”

임소병은 굳이 뒷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러나 당군악은 그 말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연이은 이탈. 아니, 운 좋게 거기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천우맹을 끈끈히 묶고 있는 결속은 무조건 부서질 것이다.

이제 막 전쟁을 시작하는 시기에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을 터.

으드득.

당군악이 이를 갈았다.

장일소는 이제 고작 두 번째 수를 두었을 뿐이다.

심지어 상황에 따라서는 저 장강 위에서 그 쓸모를 다할지도 모르는 이들을 강북에 밀어 넣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상황이 이토록 공교로워졌다.

이번 한 수에서 가장 중요한 건 수로채의 존재가 아니다. 이쪽에서 그 한 수를 가장 뼈아프게 얻어맞을 만한 상황을 유도해 내는 것이다.

저 장일소는 장가계에 들어앉아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다.

“그럼 어쩌자는 건가?”

“선택해야지요. 남궁의 이탈과 내부의 불만을 감수하고 저들을 불러들일지. 아니면…….”

임소병이 제 의사는 뒤쪽이라는 듯 조금 더 힘을 주어 말했다.

“수로채에 대항하라 할지.”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생각처럼 나쁜 수는 아닙니다. 지금 강북에 가 있는 이들의 전력은 무시 못 할 수준입니다. 물 위가 아니라 뭍이라면 충분히 수로채와 자웅을 겨루고도 남습니다.”

“가능한 일과 할 수 있는 일은 다르네.”

“냉정해지십시오, 당가주.”

임소병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자식 같은 아이들이라 걱정될 마음이야 알겠지만, 저들은 더 이상 단순히 보호하고 지켜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언제고 피해는 각오해야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희생시키는 것도 감수해야 할 천우맹의 전력입니다.”

당군악이 침묵했다. 그러자 잠자코 듣고 있던 현종이 입을 뗐다.

“녹림왕.”

“예, 맹주님.”

“상황은 전하였소?”

“일단 총사께 급히 연락을 보냈습니다.”

“청명이에게 말이오?”

“예.”

“……혹 다른 이들에게는?”

“가장 먼저 안 것은 총사겠지만, 다른 이들에게도 지금쯤 연락이 도달했을 것입니다.”

현종이 얼굴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임소병은 이 모습이 의외라 생각했다. 이런 순간이 닥치면 가장 안달복달할 이가 현종이라 여겼는데, 의외로 그는 당군악보다도 침착해 보였다.

어쩌면 그간 계속 이런 상황을 생각해 와서일는지도 모른다.

“혹여 청명이에게 다시 연락을 할 수 있겠소?”

“가능하긴 하지만 이미 금구를 보내 버렸기에 시간이 좀 더 걸릴 것입니다. 어떤 말씀을 전하려 하십니까?”

“걱정이 되어 그러오.”

현종의 얼굴에 수심이 내려앉았다. 임소병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섣불리 판단을 내릴 때가 아닙니다. 강북은 넓고 대처할 시간은 아직 충분합니다. 우선 저들의 움직임을 조금 더 지켜보고…….”

“그럴 시간이 있으면 좋겠지요. 하지만 그러지 못할까 봐 그럽니다.”

그 순간 임소병의 눈이 가늘어졌다.

두루뭉술한 현종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노파심이 드는 상황인 건 알겠으나 지금은 다른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닐진대…….

“남궁의 이탈을 걱정할 때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예?”

“모두에게 소식이 전해졌다 들었소.”

“그렇지요.”

“그럼 아이들이 어찌 나오겠소?”

“……일단은 우리 쪽에서 올 지시를 기다리겠지요. 장강변에 있는 양민들은 일단 대피시키고 있으니 굳이 요격을 나갈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게 상식이지요. 지금 안휘에 있는 이들이 남궁세가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남궁세가가…….”

임소병이 순간 입을 닫았다. 동시에 머리카락이 쭈뼛 일어섰다.

현종의 우려가 무엇인지 그제야 이해한 것이다.

그는 전략을 보고 판세를 본다. 그렇기에 한 가지를 고려하지 못했다.

“서, 설마?”

“그렇지요.”

“남궁…황…….”

신음처럼 흘러나온 이름에, 현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로채는 매화도에서 남궁세가를 반파하고 가주였던 남궁황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들이외다. 지금 남궁세가를 이끄는 남궁도위 소가주의 입장에서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이지요.”

“…….”

“지금까지는 잘 참아 주었지만, 그 가슴속에 맺힌 원한이 어느 정도일지는 안 보아도 훤하지 않습니까.”

임소병이 부채를 움켜잡았다.

지금 남궁세가는 안휘에 가 있다. 그런 안휘로 다름 아닌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가 진입했다.

그럼 남궁도위는 어찌 나올 것인가?

“물러설 수 있습니까?”

조금 전 임소병이 했던 말을 현종이 다시 한다.

“녹림왕께서 소가주의 입장이시라면…….”

물러설 수 있다.

임소병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리 대답할 것이다. 그는 얼마든지 물러설 수 있다. 심지어 이득을 위해서라면 흑룡왕에게 절이라도 할 것이다.

하지만 남궁도위는? 그 남궁도위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어쩌면 지금이 그 원수를 제 손으로 갚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중원이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복잡한 형세 속에서 두 사람이 마주칠 기회라는 게 그리 흔하게 오는 건 아니니까.

그걸 알고도 물러설 수 있을까? 저 남궁도위가?

임소병이 침묵했다. 현종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아, 안…….”

“어쩌면 이미 늦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드득.

임소병이 쥐고 있던 부채가 끝내 부러지고 말았다.

* * *

콰직.

흰 전서가 거친 손안에서 구겨졌다.

천천히 다시 주먹을 편 그는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굳은살이 끼고, 곳곳이 터져 엉망이다.

과거에도 그의 손은 검수의 것으로 부족함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악귀의 것에 가깝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거칠다.

그는 안다.

그의 손을 이리 만든 건 겉으로는 향상심이었고 책임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깊은 곳에 꼭꼭 숨겨 놓았던 복수심이었다.

숱한 밤을 지새우고도 잊히지 않았다.

그를 먼저 보내기 위해 희생한 아비. 그리고 그 아비에게 쏟아지던 도기. 그 모든 걸 알면서도 달아나야 했던 초라한 그 자신. 그 비참함.

“흑룡왕……. 적세광이라.”

사내, 남궁도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넓게 펼쳐진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는 빙긋 웃었다.

“창천(蒼天)이로군.”

바로 남궁의 색이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