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6화. 물러설 수 있습니까? (1)
“오, 옵니다!”
떨리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촤아아아아!
전체를 검게 칠한 커다란 범선이 뭍을 향해 전속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다. 대단한 위압감이었다.
“흑룡선…….”
누군가가 앓는 듯 중얼거렸다.
활짝 펼쳐진 돛에 그려진 건 검은 흑룡의 문양이다.
이 넓디넓은 장강에서 감히 저 문양을 돛에 그려 넣을 수 있는 배는 오직 하나뿐이고, 저 문양을 쓸 수 있는 사람도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존재만으로도 상징인 그 배는 뭍을 향해 돌진하면서도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어,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도망이라도 치라는 거냐?”
뒤늦게 장강변으로 달려온 이들이 악을 쓰듯 외쳤다.
“정말로 흑룡선이면 달아나야지요! 흑룡왕이 타고 있다는 소리 아닙니까!”
“빌어먹을! 배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알 게 뭐냐고! 그랬다가 흑룡왕이 아니면 누가 책임을 지는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감정이 격해져서 고성이 오갔지만, 그 와중에도 모두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들끼리 이런 소모적인 논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단 당장 개봉으로 전서를 보내라! 흑룡선이 강북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아니, 구파! 개봉에만 보내지 말고 호북으로도 전서를 보내라! 지금 그들이 이곳에서 가장 가까울 테니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고!”
“예! 그, 그럼 저희는?”
“빌어먹을, 어딘가에 틀어박혀 숨어 있든지!”
악에 받친 고함을 내지른 후, 백면개(白面丐)는 떨리는 눈으로 흑룡선을 주시했다.
‘아니겠지…….’
흑룡왕은 화산검협에게 팔을 잃은 후 은거에 들지 않았던가?
개방의 정보방에도 도통 들어오지 않아서, 패군에게 제거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마저 돌던 상황이다.
그런 흑룡왕이 하필 이런 시기에…….
‘그럴 리가 없어.’
백면개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설사 흑룡왕이 살아 있다 해도 본대와 떨어져 단독으로 강북을 노릴 이유는 없다. 애초에 누구도 생각지 않았던 일이다.
콰가가가가!
그 순간, 뭍에 이른 흑룡선이 귀에 때려박는 것 같은 굉음을 내며 장강의 모래톱을 들이받았다.
콰드득! 콰득!
두터운 배 바닥이 부러지고 으스러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이는 저 귀한 흑룡선이 박살이 난다고 해도 상관없다는 선언 같았다.
이윽고.
쿠웅!
흑룡선의 거대한 선체가 뭍에 반 이상 올라탄 채 멈추었다.
백면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닐…….’
“쥐새끼 놈!”
콰아아아아아아!
그 순간 어마어마한 파공음과 함께 흑룡선의 선수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빛살처럼 쏟아졌다.
‘뭐?’
콰드드득!
“끄아아아아아악!”
백면개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획 뒤로 꺾은 채 괴로워하던 그는 덜덜 떨며 다시 턱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가까스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무언가가 그의 가슴에 삐죽이 솟아 있었다.
검은 용이 양각된 긴 장대. 먼 거리를 격해 날아와 그를 꼬치처럼 꿰어 버린 장대의 정체는, 기다란 언월도였다.
이를 깨달은 순간 백면개는 다가올 제 운명을 알아챘다.
“어, 어떻…….”
입에서 말 대신 피가 쏟아졌다.
뭍으로부터 백면개가 선 여기까지는 적어도 백 장 이상의 거리가 있거늘, 어떻게 그를 알아채고 정확히 도를 날릴 수가…….
의문은 길어지지 않았다. 고통이나 절망 때문이 아니다.
쿠웅.
백면개의 바로 앞에 거짓말처럼 누군가의 신형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시커먼 장발을 휘날리며 광포한 기세를 뿜는 사내는 백면개를 눈으로 불태우기라도 할 듯 쏘아보았다.
우득.
커다란 손을 뻗어 창백한 백면개의 얼굴을 움켜잡은 적세광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감히 너 따위 놈마저 나를 우습게 봐? 내가 오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기웃대?”
“흐, 흑룡…….”
무언가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백면개가 입을 연 그때.
콰득!
단숨에 쥐어진 흑룡왕의 좌수 안에서 백면개의 머리가 으스러지고, 이내 스르르 빠져나갔다.
“흥!”
백면개의 가슴에 꽂혀 있던 언월도를 단번에 뽑아낸 적세광은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뭣들 하느냐! 하선해라!”
“예!”
그러자 검은 흑룡선에서 수로채를 상징하는 푸른빛 무복을 입은 이들이 개미 떼처럼 쏟아졌다.
우드드득.
언월도를 부러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콱 움켜쥔 흑룡왕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놈은? 놈은 어디에 있지!”
그가 광인처럼 발악하려 할 때,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이가 나직이 속삭였다.
“흑룡왕. 련주의 명을 잊지 마십시오.”
“이……!”
광기 어린 흑룡왕의 시선이 그에게로 획 돌아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알고 있다.”
흑룡왕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땅을 쾅 내밟았다.
“찾아내라! 강북 땅에 퍼져 있는 천우맹 놈들은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쳐 죽여라!”
“예!”
우우우우우우!
쩌렁쩌렁한 나팔 소리와 함께 장강에서 거대한 선단이 우후죽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장강수로십팔채.
장강의 지배자이자 저 사패련의 일각. 과거 매화도를 피로 물들였던 그들의 주력이 마침내 강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우드득.
언월도를 쥔 흑룡왕의 좌수에 새파란 힘줄이 돋아났다.
욱신거린다. 고통스럽다.
오른팔은 잘려 나간 지 오래건만, 있을 리 없는 팔에서 여전히 통증이 느껴진다. 마치 잘려 나간 팔이 그에게 복수해 달라고 울부짖기라도 하듯.
이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그는 영원히 그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흑룡왕은 알고 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화산. 그리고…… 그 쥐새끼 놈.’
그의 팔을 자른 놈.
수로채와 흑룡왕이 만인방의 발밑에 굴복하는 신세가 되게 만든 놈들.
그들을 모조리 씹어 먹지 않고서는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이다.
“흑룡왕이시여! 흑룡채는 준비가 끝났습니다.”
“가라!”
흑룡왕이 상처 입은 범처럼 울부짖었다.
“가서 죽여라! 저 증오스러운 놈들을 모조리!”
“예!”
수적들이 일제히 달려 나갔다.
그 뒷모습을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던 흑룡왕이 이윽고 한 발짝을 내디뎠다.
불어온 강바람에 거친 그의 머리카락과 비어 버린 소매가 휘날린다.
반드시 죽일 것이다.
설령 이 걸음으로 인해 그가 다시는 살아서 장강을 누빌 수 없게 된다고 해도 말이다.
쿠웅!
흑룡왕이 땅을 내밟는 소리가 신호라도 된 듯, 장강 곳곳에서 새하얀 전서구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 * *
우득!
“커헉!”
턱이 으스러진 털복숭이 장한이 그 자리에 풀썩 엎어졌다.
“쯧.”
청명은 영 성가시다는 듯 제 손을 탈탈 털며 혀를 찼다.
“뭔 개미 새끼들도 아니고 끝도 없이 나와!”
개미면 근처에 있을 굴만 조져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이놈들의 굴은 하필 강남에 있다.
“아오. 보이는 족족 다 죽여 버릴 수도 없고.”
푸념하던 청명이 발을 뻗어 쓰러진 이들의 단전을 빡 걷어찼다.
그리고 양팔과 다리를 질끈 밟아 으스러뜨렸다.
“끄르륵…….”
의식을 잃은 와중에도 고통은 느껴지는지 쓰러진 이가 경련을 일으켰다. 냉정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노려본 청명은 시간이 아깝다는 듯 몸을 획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째애애액!
맑은 새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올려다보니 흰 비둘기 한 마리가 상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이리 와!”
청명이 한쪽 팔을 뻗었지만 새는 그 사실을 모르는지 계속 같은 자리만 맴돌았다.
“아오, 저 멍청한 놈!”
타앗!
결국 위로 몸을 날린 청명이 날고 있는 전서구를 단숨에 낚아채 땅으로 내려섰다.
타닥.
청명의 손에서 풀려난 전서구가 떡하니 손목 위에 올라타더니 신경질적으로 팔뚝을 쪼았다.
한숨을 푹 내쉰 청명이 품 안에서 새 모이통을 꺼내 팔뚝 위에 올려 주었다. 그러자 전서구가 빠르게 모이를 쪼아 댄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청명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새는 영 귀여운 맛이 없네.”
그 허연 놈이었으면 벌써 아웅다웅하기 시작했을 텐데, 얘는 밥만 주면 그만이라 영 심심하다.
“끄응. 뭐 꼭 아쉽다는 건 아닌데.”
이건 다 그 허연 놈 때문이다.
그렇게 잘해 줬는데(?) 왜 자꾸 패악질만 부려 댄단 말인가. 누굴 닮아 성격이 그렇게 더러운지. 야수궁주 아저씨인가?
혀를 찬 청명이 전서통을 열어 그 안에 든 전서를 빠르게 읽어 내렸다.
“흐음.”
좋은 소식이다.
대부분 조가 배정받은 성에 진입했고, 사파를 주살하는 것 역시 순조롭다. 난민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거야 목숨만 붙어 있다면 뭐 어떻게든 될 일이고.
“지부도 거의 마련됐고……. 소소가 고생하고 있겠네.”
지금 가장 바쁜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당소소일 것이다. 심지어 본인의 경험에 비해 과중한 임무를 맡았으니 부담도 심하겠지.
하지만 살짝 당소소를 떠올린 청명은 피식 웃어 버렸다.
당소소는 잘할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제 아버지보다 나은 사람이니까.
작은 종이에 빼곡하게 적힌 내용을 하나 놓치지 않고 훑던 청명의 시선이 잠시 우뚝 멈추었다. 백천이라는 두 글자와 윤종이라는 두 글자가 시선을 잡아챈 것이다.
“…….”
하지만 그도 잠시, 머뭇거린 일 따윈 없었던 것처럼 남은 내용을 빠르게 마저 읽었다. 그리고 품 안에서 세필을 꺼내 종이의 뒷면에 글귀를 적어 내려갔다. 몇 가지 당부였다.
전서를 작게 접어 전서통 안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자, 이제 가!”
청명이 팔을 훅 띄워 올리자, 작은 비둘기가 푸드덕대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서쪽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본 청명은 이내 굳은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아직이라…….’
장일소가 아직도 움직이지 않았다.
문제는 장일소가 아직 움직이지 않은 게 아니라, 그가 언젠가는 움직인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등 뒤에 겨눠진 독 묻은 칼을 의식하면서 눈앞의 상대와 싸우는 기분이랄까.
괜찮을 것이다.
그 칼이 움직이는 즉시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를 끝냈으니까. 적의 행동을 예상할 수 없다면, 모든 상황에 대응할 수 있도록 만들면 된다.
그래, 그러면…….
땅을 박차려던 청명이 문득 그 자리에 도로 멈춰 섰다.
‘잠깐…….’
대응?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청명의 얼굴이 묘하게 비틀렸다.
정말 예상할 수 없는가? 저놈이 무엇을 하려는지 진정 알 수 없는가?
알 수 없다. 알 수 없어야 한다. 그는 장일소가 아니니까.
천하가 인정한 광인. 오직 욕망만으로 움직이는 그 미친놈의 머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만일 그가 장일소라면……?
청명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남쪽을 향해 돌아가려는 바로 그 순간.
삐이이이이익!
피리 소리 같은 높은 울음소리가 울렸다.
하늘을 가르며 날아드는 금빛 궤적이 또렷하게 보인다.
“저건……!”
청명이 잽싸게 팔을 뻗었다.
이전과는 달리, 금빛 궤적은 곧장 섬전처럼 청명의 팔을 향해 날아들었다.
타앗!
금빛 새는 청명의 팔을 움켜잡으며 몸을 멈추었다. 훈련이 잘된 모양새다. 청명이 곧장 그 발에 매달린 전서통을 열어젖혔다.
으득.
잠시 후, 청명의 이가 제 아랫입술을 파고들었다.
“이…….”
왜 좀 더 빨리…….
손에 쥔 전서통을 콱 움켜잡아 으스러뜨려 버린 청명이 즉시 땅을 박찼다. 한 줄기 검은 선으로 화한 청명의 신형이 황량한 황톳빛 땅에 그였다.
마치 누군가의 새하얀 얼굴 위로 그어진 핏빛 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