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5화. 글쎄. 어느 쪽일까? (5)
온 얼굴이 땟국에 젖은 아이가 뒤뚱거리며 앞으로 내달렸다.
콰당.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돌부리에 걸려 맥없이 엎어지고 만다.
커다란 두 눈에 금세 눈물이 맺히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얼굴이 일그러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읏차.”
어디선가 불쑥 다가온 손이 넘어진 아이의 겨드랑이로 들어오더니 덜렁 아이를 들어 올렸다.
“울면 안 되지.”
“어…….”
순간 울려던 것도 잊은 아이가 멍하니 눈앞의 사람을 보았다.
무서운 사람인가? 아니면……?
빙그레 웃고 있기는 하지만 사람이 마냥 또 착해 보이지는 않는다.
아이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사내가 아이의 머리에 손을 턱 얹었다.
“엄마는?”
“어, 엄마……. 엄마.”
아이의 두 눈이 다시 그렁그렁 차올랐다. 조금 당황한 사내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마른세수했다.
“울지 마, 울지 마! 내가 잘못했다. 엄마는 무사할 테니까 제발 울지 마.”
사내는 아이를 잽싸게 옆구리에 떡하니 꼈다.
“서둘러야겠네. 엄마 찾으러 가야지?”
아이가 영문을 모르고 사내를 올려다보자, 사내는 옷자락으로 아이의 얼굴을 슬쩍 가렸다.
“이건 딱히 안 보는 게 나을 테니까.”
그 순간, 사내의 기도가 일변했다.
“저쪽이다!”
“이 맹랑한 놈이!”
울창한 수풀 사이에서 커다란 장한 둘이 튀어나왔다.
토끼몰이라도 하는 듯 신나게 뛰어오던 둘은 눈앞의 사내를 발견하고 순간 흠칫했다.
“웬 놈…….”
사내의 발이 땅을 박찼다.
파아아앗!
그 자리에서 퍽 꺼지듯 사라졌던 사내가 삽시간에 장한의 앞에 나타났다. 새하얀 빛줄기가 허공을 갈랐다.
서걱!
무어라 고함을 내지르려던 장한의 머리가 그 표정 그대로 허공에 떠올랐다.
“히, 히익!”
제 동료의 머리가 단번에 잘려 나가자 나머지 하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런 영문 모를 순간에도, 딱 하나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게 있었다.
검은 무복과 그 가슴에 새겨진 매화 문양.
흰빛 검과 높게 묶어 휘날리는 긴 머리.
그리고 무엇보다…… 감정이라고는 한 올도 없어 보이는 저 눈.
“매화검…….”
서걱!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린 칼날이 그의 목을 갈랐다.
“……귀…….”
마지막 말은 몸뚱이와 멀어져 가는 입 안에서 스러졌다.
파아아앗!
허공에 떠올랐던 목 두 개가 아직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사내는 땅을 박차고 나아갔다.
“아…….”
그 바람에 얼굴을 가렸던 소맷자락이 떨어져 나가자 아이가 고개를 빼꼼 들었다.
괴이한 세상이 아이를 반긴다.
높이 자라난 나무들이 길게 일그러지며 뒤로 스쳐 지나가고, 땅이 금방이라도 솟구쳐 오를 것처럼 들썩인다.
아이는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떴다.
‘와…….’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 광경이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도 얼굴을 덮쳐 와야 할 바람은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다.
파앗!
그 순간 세상이 급격하게 옆으로 틀어졌다.
펄럭!
다시 한번 시커먼 천이 시야를 가렸다.
“끄륵…….”
뭔가 억눌리는 듯한 신음이 희미하게 들렸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멀어졌다.
다시 한번 검은 천이 밀려나는 순간.
“읏차!”
파아아앗!
아이의 눈에 보이는 세상이 또다시 급변했다. 울창하게 자라난 나무들이 순식간에 아래로 빨려 들어가더니 이내 새파란 하늘이 두 눈 가득 쏟아졌다.
“아…….”
파란 하늘과 새하얀 구름.
마치 하늘 한중간에 떠 있는 것만 같다.
아이가 놀라 고개를 숙이자 발아래 푸른 숲이 가득 펼쳐져 있다.
높은 산에 올라 내려다보는 것처럼 까마득하게.
헤 벌어졌던 아이의 입이 제풀에 꾹 닫혔다.
놀랄 여유조차 없었다. 혼이 나간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사내가 중얼거렸다.
“저쪽인가?”
이내 멀리 보이던 숲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솟구치듯 다가왔다.
아이가 저도 모르게 사내를 꽉 움켜잡았다. 그러자 쾌속하게 내려꽂히던 몸이 부드럽게 방향을 전환하며 나무 위를 딛고 박찼다.
“오줌 싸면 안 된다. 진짜 저주할 거야.”
펄럭.
또다시 검게 시야가 가려진다.
“끅!”
“커헉!”
목이 눌린 듯한 소리가 몇 번 울린 후, 아이의 몸이 위로 둥실 끌어당겨졌다.
“봐. 저기 엄마가 있어?”
아이는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했다. 엄마와 한참 전에 떨어졌으니 분명 이보다 훨씬 앞에…….
“어!”
그 순간, 아이는 겁을 먹은 듯 이쪽을 응시하는 이들 중에서 제 어미를 찾았다. 아이가 사내를 놓고 울면서 달렸다.
“엄마!”
“진아!”
제 아이를 발견한 아낙도 혼이 나간 듯이 헐레벌떡 달려와 아이를 품에 안는다.
“다행히 안 늦은 모양이네.”
그 모습을 보고 머리를 긁적인 사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영문 모를 일에 당황한 나머지 사람들은 쓰러진 악적들과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이를 번갈아 보았다.
“시, 신선……?”
“아니, 그건 너무 갔고. 일단 도사로 하죠.”
옆에 다른 이가 있으면 ‘너 도사 맞아!’라고 대번에 반박할 발언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꼼짝없이 여기서 다 죽는 줄 알았는데…….”
앞에 나서서 감사를 표하는 노인의 주름진 눈가가 젖어 들었다.
“뭘요.”
사내는 부상을 입거나 하여 쓰러진 몇몇 이들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늦게 와서 되레 죄송하죠. 조금만 빨리 왔으면 저 사람들도…….”
그러자 몇몇 이들이 눈물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사내는 노인을 보며 말했다.
“일단 주변에 있는 잡놈들은 모두 정리했으니 이대로 계속 가시면 됩니다. 앞쪽으로 가시다 보면 임시로 피난민을 받는 곳이 나올 겁니다.”
“저, 정말입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살던 곳으로 금방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죄송하지만, 지금 흩어져 달아나고 있는 사람들을 모아 드릴 시간은 없네요. 다른 곳도 도우러 가야 해서.”
“그, 그러문요. 쇤네들이 알아서 찾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들은 아이들이라도 살리기 위해 아이는 다른 방향으로 보내고, 어른들만 대규모로 이동하며 사파를 유인했다. 그만큼의 현명함을 지녔으니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사내는 몸을 돌려 가려다 어미의 품에 안겨 이쪽을 보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곤 잠시 머뭇거리다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턱!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조금 투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울지도 않고. 대가 세네.”
아이는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사내가 피식 웃었다.
“혹시나 나중에 좀 더 커서 할 일 없거든 섬서에 있는 화산으로 찾아와라. 화산은 여제자도 받거든. 물론 고생이야 좀 하겠지만.”
아직 이해도 온전히 하지 못할 아이에게 할 말을 남긴 사내는 슬쩍 웃고 몸을 돌렸다.
파아아앗!
이내 그의 몸이 한 줄기 빛이 되어 사라졌다.
멍하니 바라보던 이들이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짜 신선님이신가…….”
“좀 전에 화산이라 하지 않았어. 보아하니 어떤 문파 분이신 모양이구나.”
“문파요?”
“그런 분들이 있단다. 저 소림 같은.”
“아…….”
모두 알 듯 말 듯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안은 어미는 제 아이의 몸 이곳저곳을 확인했다.
“진아. 다친 데는 없니?”
걱정 어린 어미의 얼굴을 빤히 보던 아이가 작게 입을 열었다.
“꽃…….”
“응? 꽃?”
“꽃이 예뻤어.”
아이의 얼굴에 해맑은 웃음이 피어났다.
* * *
싸움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전방의 모두가 힘을 내고 있을 무렵, 후방에 남은 천우맹의 머리들도 악전고투를 치르고 있었다.
“상단주님! 대륙상단에서 더는 피난민을 수용할 수 없다고 합니다!”
황종의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수용이 불가하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대륙상단 규모가 얼마나 큰데, 겨우 그만한 이들을 가지고!”
“하지만 곡식도 부족하고 의복도 없다고…….”
“망할…….”
황종의가 이를 갈아붙였다.
전 중원을 오가며 곡식 장사를 하는 놈들이 이 정도로 곡식이 떨어진다? 차라리 장강 물이 말랐다는 쪽이 더 신빙성 있다.
“처음 제안한 곡식 값에서 이 할을 더 쳐 준다고 하게!”
“예? 곡식이 부족하다는데…….”
“그렇게 전하면 되네! 그럼 받아들일 걸세!”
“이, 일단 알겠습니다.”
“다른 상단도 마찬가지일세. 더는 어렵다고 하면 일단 돈을 올려준다고 하게. 그럼 군말이 쏙 들어갈 테니.”
“예.”
황종의는 쥐고 있던 붓을 부러뜨릴 기세로 꽉 움켜쥐었다.
‘빌어먹을 놈들.’
이쪽은 가산까지 털어서 난민들을 지원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상인이라지만, 이런 와중에도 눈앞의 이득에 눈이 멀어 장사를 해 먹겠다는 게 말이 되는가.
장사도 사람이 있어야 할 수 있다. 살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비싼 상품이라 해도 결국 가치가 없어진다는 걸 왜 모르는가.
“후우…….”
치솟는 울화를 황종의가 억지로 달래려 들 때였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해 온 상단은 따로 정리해 두십시오.”
“……예?”
“장사꾼이 기회를 틈타 장사해 먹겠다는 걸 뭐라 할 수는 없겠지만, 대가는 치러야지.”
임소병의 말에 황종의가 그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녹림왕. 대체 어찌하실…….”
“뭐, 걱정하지 마십시오. 산적 놈들을 풀어서 상단을 습격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다, 당연하지요. 그거야.”
“그런데 그게 나을 수도 있기는 합니다. 미친 도사 놈이 머리끈 풀고 달려드는 것보다야.”
“…….”
어…….
확실히 산적이 나을 수도 있겠다. 적어도 산적은 두고두고 괴롭히려 들지는 않을 테니까.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지금 산적 놈들까지 곳간을 열고 있는 마당에. 이래서 장사꾼 놈들이란. 쯧쯧.”
임소병의 말에 황종의는 자꾸만 머리가 수그러들었다. 거의 책상에 박힐 기세였다.
평생에 걸쳐 산을 오고 갈 때마다 산적 욕으로 밤을 지새우는 게 바로 상인이다. 적어도 녹림에 대해서만큼은 욕을 하는 입장이지, 먹는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임소병의 말에 조금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임소병이 빙그레 웃었다.
“어쨌든 이렇게나마 상계가 협조해 주니 다행이군요.”
“……감사합니다.”
그 협조를 현실로 이루기 위해서 황종의가 한 고생과 치른 대가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물론 대부분은 천우맹에 소속된 문파의 가산, 특히 남궁세가의 가산에 크게 힘을 입었지만 말이다.
“각 성에 지부를 설치하는 일은 어찌 되고 있습니까?”
“반쯤은 완성됐습니다. 사나흘 내로 대충 구실은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저 빌어먹을 거지 놈들이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어도 칠 할은 완성했을 텐데. 하여간 게을러터져서는!”
각 성의 지휘소는 일단 천우맹 지부로 명명하기로 결정이 났다. 지부라는 이름을 쓰기에는 초라한 산채지만, 지휘소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영 애매해서 나온 결론이다.
“설마 이런 일이 실제로 가능할 줄이야…….”
상계와 녹림, 그리고 유령문과 개방이라는 네 문파를 묶어서 이은 결과, 그들은 강북 전체에 단 하루 만에 지시를 하달할 수 있는 체계를 손에 넣었다.
‘황궁도 못 할 일을…….’
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단 말인가?
“진척이 생각 이상으로 빠르군요.”
“예. 빠르지요. 빨라요. 다만…….”
임소병이 묘한 얼굴로 중원의 전도를 응시했다.
“……이게 좋은 일일지는…….”
“예?”
“아닙니다.”
임소병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불길하다는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되니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일이 이리 잘 풀리는 게 찝찝하다.
‘장일소. 분명 노리는 것이 있을 텐데.’
손에 든 부채를 꽉 움켜쥔 임소병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불안한 건 사실이지만, 거기 얽매일 필요도 없다.
그들이 장일소의 노림수를 모르듯, 장일소 역시 강북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 알진 못할 것이다.
천우맹과 화산이 언제고 퍼진 전력을 불러들일 수 있고, 천하에 흩어져 있는 이들을 손에 놓고 들여다보듯 지시할 수 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무슨 수를 쓰더라도 대응할 수 있다. 반드시!
“우선은 사패련의 동향에…….”
바로 그 순간이었다.
“구, 군사! 군사! 개방에서 보내온 소식입니다!”
“뭐냐! 빨리 말해 봐라!”
사색이 되어 박차고 들어온 이를 임소병이 닦달했다. 내심으로는 어떤 말이 나와도 놀라지 않을 각오를 세우며.
하지만 그 각오는 들어온 소식과 함께 썩어 버린 고목처럼 스러졌다.
“장강! 장강에서 다시 대규모의 선단이 도하를 시도하고 있다 합니다.”
임소병이 커다랗게 눈을 부릅떴다.
“장…강……?”
머릿속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던 단어가 시퍼런 비수처럼 틀어박혔다.
“이게 무슨…….”
거기에 누가 타고 있는가?
아니, 아니다. 누가 타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빈 배가 아닌 이상 반드시 누군가는 타고 있다.
하지만…… 어째서?
장일소는 천우맹의 전력을 분산시켰고, 구파의 합류를 더디게 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주력을 움직여 그 틈을 노려야 할 때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그 귀한 전력을 더 나눠서 뿌리겠다고?
이 너른 강북에?
“왜?”
어째서? 장가계에 있는 저들이 주력이 아닌 건가?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
그럼 대체 왜?
왜 상식적으로 이해도 안 될 일을 벌이는 건가. 패하려 작정한 게 아니라면?
“……대체 무슨 짓을 할 생각인 거냐, 장일소…….”
섬뜩한 한기가 임소병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