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4화. 글쎄. 어느 쪽일까? (4)
“으라차아!”
조걸의 검이 쾌속하게 적의 어깻죽지로 파고든다.
“아악!”
“시끄러워!”
비명을 내지르는 흑도인의 입으로 연이어 발이 날아들었다.
쾅!
흑도인은 결국 마음껏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조걸이 버럭 소리쳤다.
“뭘 잘했다고 꽥꽥 언성을 높이고 난리야! 빌어먹을 새끼들이!”
일갈한 조걸은 재빠르게 다음 사냥감에게로 쇄도했다.
그 모습을 보던 곽회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마침 그 모습을 함께 보던 사형제가 중얼거렸다.
“……진짜 세긴 세네요, 사형.”
“그게 불행이지.”
한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늘은 어쩌자고 저 사람에게 저런 힘과 재능을 주었다는 말인가? 대체 뒷감당을 어찌…….
‘아. 원래 별생각 없지?’
애초에 하늘에게 생각이 있었으면 청명이 놈을 그리 세상에 풀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사형이 센 것도 맞지만, 솔직히 이놈들이 좀 허접한 것 같은데? 내 생각만 그러냐?”
“맞습니다, 사형.”
오검이 가장 강할 뿐, 다른 화산의 제자들 역시 웬만큼은 실전 경험을 갖췄다. 사파들을 상대해 본 경험이 적지 않다는 의미다.
그런데 지금 싸우는 사파 놈들은 지금까지 알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만인방은 고사하고 녹림도 수준도 안 되는 것 같은데?’
산적 토벌을 나섰을 때 상대했던 산적 놈들도 이놈들보다는 위협적이었다. 그사이 그들이 성장해서 그리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긴장을 풀지 마라. 생각대로 술술 풀리는 일은 좀처럼 없으니까.”
“……될 수 있으면 그 말을 조장 되시는 분이 해 주시면 좋을 것 같긴 합니다만.”
곽회는 고개를 돌려 조걸을 바라본다.
조원이고 나발이고 다 뒷전으로 둔 채 사냥개처럼 신나게 사파들을 쫓고 있다.
곽회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바랄 걸 바라고.”
“…….”
* * *
“이쪽은 끝냈습니다, 사형.”
윤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고생스럽겠지만, 쉴 시간은 없겠구나. 바로 이동하자.”
“당연합니다.”
“그리고……. 음, 뭐라 불러야 할지. 개방 분?”
“예? 아, 예! 추일추월(追日追月) 양화(楊和)입니다. 편하게 추일개(追日丐)라 불러 주십시오!”
“아, 추일개.”
윤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딱히 적의가 없는 눈빛임에도 추일개는 절로 몸이 굳어졌다.
‘이 사람이 윤종이구나.’
사실 천하에 이름 높은 화산오검 중 가장 존재감 없는 이가 눈앞의 이 사람일 것이다.
이제는 화산오검이라는 이름하에 놓이기에는 너무 커져서 빠지게 된 청명이야 그렇다 치고, 화산의 장문대리인 백천이나 검귀로 이름 높은 유이설, 최근 가장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일검분광 조걸, 심지어 당가주의 여식임에도 화산에 입문한 당소소까지 하나같이 남의 이목을 잡아끈다.
그런 탓에 상대적으로 윤종이라는 이름이 울려 퍼질 일은 많지 않았다. 화산에서는 장문지재(長門之才)라 불린다지만, 당장 장문대리인 백천이 있는데 이 사람이 부각될 이유가 무어 있겠는가?
그런데 막상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윤종이란 사람은 다른 이들의 이름값에 묻힐 만한 이가 절대 아니다.
추일개도 개방 거지인 만큼 지금껏 수두룩한 사람들을 만나 왔고, 먼발치에서나마 지켜본 사람은 그보다도 더 많아 헤아릴 수조차 없다.
그 경험이 지금 추일개에게 말해 주고 있다. 윤종은 절대 평범한 이가 아니라고 말이다.
“천우맹에서 온 명은 없습니까?”
“예? 아……. 아직은 딱히 없습니다.”
“아직 연락이 없는 건지, 우리 쪽에 제대로 명이 전달되지 않는 것인지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직 지부가 완비되지 않은 상황이라 그런 일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을 겁니다.”
“그, 그렇게까지요?”
추일개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사실 이건 어떤 측면에서는 개방을 무시하는 언사다. 물론 윤종에게야 딱히 그런 의도가 없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의문 어린 눈빛을 받고도 윤종은 차분했다.
“이 작전의 핵심은 적을 격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전을 펼치면서도 맹과의 연결선을 확고히 구축하는 것입니다. 상황이 바뀌면 즉시 반응할 수 있도록.”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제가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윤종이 포권 하여 감사를 표하자 추일개가 황송하다는 듯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는 과하게 굽실댄다고 혀를 찰지도 모르지만, 추일개는 결코 자신의 예의가 과하지 않다 여겼다.
“한데…….”
추일개가 말끝을 흐리며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윤종 도장께서는……. 아니, 천우맹에서는 사패련이 뒤에서 뭔가 일을 벌일 거라 예상하시는 겁니까?”
윤종이 담담하게 말했다.
“저 사패련이 이런 일을 그냥 벌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반드시 노림수가 있겠지요.”
“아니, 그걸 아시면서도 어찌…….”
윤종은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추일개를 응시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단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잖습니까.”
“…….”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누군가는 해야 합니다. 지금은 그게 우리일 뿐이지요.”
추일개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정론이니 반박도 어렵다.
그리고 사실 천우맹이 정말로 대단한 건, 뻔한 정론을 늘어놓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고 정말 있는 그대로 실천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은 제 과실을 면피하는 데나 가져다 쓰는데 말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혹시라도 혼선이 벌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윤종이 다시 한번 깊이 포권 했다. 추일개가 품 안에서 작은 전서구를 꺼내 들었다.
그사이 윤종은 사제들을 돌아보았다.
‘쉽지 않군.’
신경 써야 할 게 한둘이 아니다. 고작 십여 명도 되지 않는 이들을 대동해 움직이는 것이고, 심지어 윤종에게 주어진 역할은 그리 크지 않음에도 말이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상대해야 할 적들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 이 정도 수준이라면 그 수 때문에 골머리 썩는 상황이 생길지언정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
이 순간에도 서서히 제 실력을 잃어 가고 있을 이에게도 말이다.
“……이동하자. 뒤처지면 안 된다.”
“사형.”
그때 진태가 슬그머니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지금도 속도가 느리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이러면 섬서에서 너무 빨리 멀어지게 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
“출발할 때 이 부분을 유의해야 한다고 하셨잖습니까? 아까는 제가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만…….”
진태는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윤종의 얼굴에 잠시 갈등이 피어났다.
하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아직 그렇게까지 멀어진 건 아니니, 일단은 가자.”
“하지만 사형.”
“이동이 너무 급하다 싶으면 내가 적당히 조절하마.”
그 말을 듣고서야 진태가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얼굴은 영 개운치 않아 보였다.
윤종도 사제의 우려를 충분히 이해했다. 지금 그가 추일개를 두 번, 세 번 닦달하는 것도 다 같은 부분을 우려하기 때문이므로.
하지만…….
“가, 감사합니다.”
땟국 가득한 얼굴의 한 여인이 품에 아이를 안은 채 다가와 깊이 고개 숙였다.
“도사님들께서 도와주지 않으셨으면 저희는 지금쯤…….”
윤종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아니라도 누구라도 도와주러 왔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낙은 물기 어린 눈으로 입을 떼다 이내 말꼬리를 흐렸다. 그렇게 말은 하지만, 누구도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리라.
윤종 역시 안다. 자신들이 조금만 늦게 도착했어도 이들의 운명은 크게 험해졌으리라는 걸.
“걸을 수 있다면 이 길로 가까운 상단에 가서 도움을 청하십시오. 천우맹의 이름을 대면 그들이 먹을 걸 내어 줄 것입니다.”
“가까운 상단……. 저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평생 살던 곳을 벗어나 본 적도 없는데…….”
“그건 이분께서 잘 설명해 주실 겁니다.”
상황을 살피던 추일개가 재빨리 여인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상단이 어디냐면…….”
윤종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저 머나먼 앞을 주시했다.
‘사숙은…….’
이미 한참 앞서갔겠지. 위험이야 없다지만…….
이윽고 짧게 숨을 토해 낸 윤종이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진짜로 출발하자꾸나. 더 늦기 전에.”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 * *
같은 시각, 장강.
검게 옻칠 된 바닥 위로 저벅저벅 발소리가 울린다.
연신 출렁이는 것 따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한 걸음이 이어진다.
그리하여 바닥이 좁아진 끄트머리, 발이 멈추었다.
사자 갈기처럼 휘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거칠게 자라난 수염.
패도(覇道)라는 글자를 빚어 만든 것 같은 이가 흔들리는 선수에 서서 오연히 앞을 응시했다.
불어오는 강바람에 비어 버린 오른쪽 소매가 거칠게 펄럭였다.
원독과 분노, 그리고 새파란 냉기까지 머금은 새카만 눈이 강 너머 땅을 바라본다.
“……정말 귀신 같군.”
보이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을 경계하기 위해 은신해 있던 거지들도, 그들을 위협하듯 내도록 순찰하던 구파 놈들도.
머저리 같은 잡놈 몇을 강북으로 밀어 넣었을 뿐인데, 세상은 마치 이 장강 위에 수로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고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말이다.
얼핏 자존심 상하는 일일지도 모르고, 억울해해야 할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이 사내, 일도적하(一刀赤河) 적세광(狄世光)에게는 오히려 기꺼운 일이었다.
앞을 막아서는 이가 없고, 심지어 그가 가려는 곳에 그의 원수가 존재하니 말이다.
으드드득.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강 너머를 노려보는 그의 눈 안에 흡사 검은 불길이 치솟는 듯했다.
“……저기에 있다는 거지.”
그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은 이들. 바로 화산 놈들이 말이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지?”
흑룡왕이 씹어뱉듯 말했다.
군사는, 그리고 장일소는 분명 그에게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저 증오스러운 화산 놈들을 제집에서 끌어내 주겠다고. 그리고 저 숨을 곳 없는 강북에 흩뿌려 놓겠다고 말이다.
적세광은 그저 수로채의 정예들을 이끌고 사방으로 흩어진 그들을 하나하나 사냥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지만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지났건만 아직도 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저 증오스러운 놈들의 살을 씹어먹을 수 있단 말이냐!”
흑룡왕이 막 노기를 터뜨리려는 찰나였다.
“련에서 온 전갈입니다!”
조각배를 타고 흑룡선에 접근한 한 사내가 흑룡왕을 발견하고는 크게 외쳤다.
“뜻대로 하라! 련주의 명입니다!”
잠깐 눈을 부릅떴던 흑룡왕의 얼굴에 천천히 기괴한 웃음이 번졌다.
“큭큭큭.”
이윽고.
“돛을 올려라!”
“예!”
익숙하지 않은 왼손으로 콱 움켜잡자 언월도가 격하게 울어 댄다. 적세광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가자. 돌아오지 못해도 좋다. 하지만 적어도 저 쥐새끼들만큼은 기필코 내 손으로 죽일 것이다.”
흑룡왕 적세광.
팔을 잃은 대신, 불타는 증오로 전신을 채운 마귀가 강북으로 향하는 돛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