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3화. 글쎄. 어느 쪽일까? (3)
“결국 천우맹이 움직였습니다.”
공동 장문인 종리형이 법정의 눈치를 살폈다. 표정 없이 눈까지 감고 있으니 영 감정을 읽어 내기가 쉽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얼굴을 굳힌 팽엽이 중얼거렸다.
강북을 겨누는 장일소의 칼날에 노출된 건 구파만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천우맹이 더 위험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호북이라는 막연하고 실체 없는 구심점을 바탕으로 집결해 있는 구파와 달리, 천우맹은 화음이라는 명백한 실체가 있으니 말이다.
언제 저 장일소가 화음으로 들이닥칠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본진의 병력을 분산한다?
이건 천치도 하지 않을 짓거리였다.
“강북으로 보낸 전력이 어느 정도라 합니까? 적당히 생색만 내는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개방에서 아직 정확한 정보를 보내 주지 않아 파악에 어려움이 있습니다만…… 천우맹 전력의 최소 이 할 이상은 강북으로 급파된 듯 보입니다.”
“개방…….”
팽엽이 이를 갈아붙였다.
‘이 할’이라는 사실보다 ‘정보를 보내 주지 않는다’라는 쪽이 더 귀에 거슬렸다.
최근의 개방은 노골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 구파와 천우맹을 차별하고 있다. 새로운 방주가 취임한 이후로 말이다.
속이 뒤집히지만, 딱히 조치를 취할 방법도 없었다. 당장 개방이 없으면 눈과 귀가 머는 데다, 지금 그들은 호북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므로.
“이 할이라는 정보는 확실합니까?”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아주 이 할이라는 것도 아니고, ‘최소’ 이 할.
전쟁에서 이 할의 병력이면 승패를 뒤집을 수도 있다.
그런데 고작 사파의 잡졸들 잡겠답시고 그 귀한 전력을 낭비하다니.
팽엽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종리형이 말했다.
“천우맹의 기행이 어디 한두 번입니까?”
“이번 일은 고작 그 정도로 평할 게 아닙니다.”
팽엽은 차게 일갈했다.
“말씀대로 지금껏 천우맹이 괴이한 짓거리를 몇 번이고 해 온 건 사실이지만, 대부분 고작해야 한두 문파의 괴멸로 끝날 만한 일들이었습니다. 아니요, 따지고 보면 사실 그 정도도 되지 않았지요.”
“……그건 무슨 의미이신지?”
“움직인 이들의 면면이 워낙에 화려하여 어느 정도 과장된 측면이 있었을 뿐, 지금껏 천우맹이 벌였던 일은 잘못 풀려 봐야 그 피해가 막대하지 않을 일이었다는 의미입니다. 해남행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듣고 있던 종리형과 법계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니다. 해남행에 문제가 크게 생겼다 해도, 천우맹 측에선 고작해야 십여 명이 죽고 끝날 문제였다. 그들이 원체 유명세를 얻고 있는 탓에 이목이 끌렸을 뿐.
“하지만 이번 일은 아닙니다. 이는 자칫하다가는 천우맹의 괴멸로도 이어질 수 있는 선택입니다. 어째서 이런 짓을…….”
팽엽은 도통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그때, 내도록 침묵하던 법정이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물길을 내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방장.”
“하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한번 뚫었던 물길을 다시 막는 일이지요.”
모인 이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이곳에 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기호지세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틀린 길임을 안다 해도 이제 와 돌이킬 방법이 없을 테지요. 설령 화산검협이라 해도 말입니다.”
“으음…….”
팽엽이 슬쩍 앓는 소리를 흘렸다.
자업자득이다. 잘난 듯 떠들어 대던 천우맹이 제 꾀에 걸려 넘어지는 꼴이니 비웃어 주면 그만이겠지만, 문제는 그 여파가 꼭 천우맹에게로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당장 천우맹이 삐걱대면 그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건 바로 구파가 아닌가?
“하지만…… 최소한 고뇌 정도는 할 줄 알았거늘.”
법정이 작게 중얼거렸다. 팽엽은 그의 입가에 짧게나마 쓴웃음이 맺히는 걸 놓치지 않았다.
“스스로 해 온 일에 발목이 잡히는 것쯤이야 예상했지만…… 또 그렇다기에는 대처가 가히 빠른 것 같습니다.”
“팽가주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둘 중 하나겠지요. 화산검협이라는 이가 우리의 예상보다 아둔하거나…… 더는 그가 천우맹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게 되었거나.”
순간 모두가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화산검협 청명이 생각보다 아둔하다?
그럴 리 없다.
여기에 있는 이들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없지 않되 쓸데없이 오만하지도 않다. 적어도 머리를 쓰는 일에 있어서는 화산검협이 자신들보다 훨씬 나은 면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있었다.
종리형이 답했다.
“후자겠군요.”
“아마도.”
“하지만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그가 그동안 해 온 일을 생각해 보면 외려 발언권이 더 높아지는 게 당연할진대.”
막말로 화산검협이 현종을 내쫓고 맹주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멋모르는 이들이나 흘겨보고, 알 만큼 아는 이들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세상일이라는 게 꼭 그렇게 이치에 맞게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지요.”
법정이 고소를 머금었다.
“이 이야기는 이 정도로만 하십시다. 제 얼굴에 침 뱉는 격이라 영 민망합니다.”
“크흠.”
종리형이 어색한 얼굴로 헛기침했다.
법정의 말도 맞다. 천하의 소림 방장이 문파에 대한 통제권을 잃고 제자들이 마음대로 숭산을 벗어나는 일도 벌어지고 있는데, 아직 나이 어린 화산검협의 통제력이 생각만큼 먹히지 않는다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일까?
개방에서 전해 준, 천우맹의 진격로가 표시된 지도를 슬쩍 살핀 법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사패련의 움직임은 어떠합니까?”
“아직은 딱히 큰 움직임이 없습니다. 장가계는 계속 부산스럽긴 합니다만, 시끄러운 것에 비해서는 딱히…….”
종리형은 ‘사실 사패련은 딱히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게 아닐까요?’라는 말을 하려 했다.
“움직일 것이외다.”
“예?”
하지만 질문을 입 밖으로 내기도 전에 법정이 단호하게 말했다.
“반응을 보였으니 말이지요.”
지도를 바라보는 법정의 눈빛이 어두웠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패련이 보인 움직임은 무언가를 유효하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수가 아니다. 그 수에 의의가 있다면…….
‘천우맹을 움직였다는 것이겠지.’
그러니 사패련은 조만간 반드시 움직인다. 천우맹이 움직인 이상 반드시 틈이 생길 것이고, 그 틈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찌르고도 남을 이가 장일소다.
물론 설마 천우맹이 이리 아둔한 방식으로 움직일 거라고는 장일소도 예상 못 했겠지만 말이다.
“개방에 전하십시오. 지금부터 장가계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말라고.”
“전해는 보겠습니다만, 개방이 과연 우리 뜻대로 움직일지…….”
“그리 전하기만 하시면 됩니다. 개방의 새 방주도 생각이 없는 이는 아닐 터이니, 지금 같은 상황에서 구파와 완전히 척지려 들지는 않겠지요. 제 목숨도 걸린 일이니 더더욱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방장.”
종리형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수족처럼 부려 오던 개방이건만, 어쩌다 이런 당연한 말을 전하면서도 눈치를 살피게 되었을까.
“제갈세가에서는 아직 소식이 없습니까?”
“주변을 정리하는 대로 합류하겠다고 합니다. 공교롭게도 천우맹이 움직여 준 덕에 정리가 수월해져 예상보다 합류가 빨라질 것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짧게 답한 법정이 굳은 눈으로 지도를 응시했다.
‘패군.’
움직인다. 그는 반드시 움직인다.
그러니 법정은 이곳에서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움직이면 틈이 생긴다는 이치는 장일소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터. 법정은 그 틈을 노릴 생각이었다.
“아미타불.”
불호가 무겁게 방 안으로 퍼져 나갔다.
일격이다. 인내하고 또 인내한 끝에 찔러 넣는 그 일격으로.
‘모든 걸 제자리로 되돌릴 것이다.’
본래 모든 것이 있어야 할, 당연한 자리로 말이다.
* * *
“천우맹이 움직였습니다.”
호가명의 눈이 차게 빛났다.
“예상했던 그대로 말입니다.”
“흐음.”
장일소가 호가명을 흘끗 보더니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니? 집에 도둑이라도 든 사람처럼?”
“놈들이 너무 예상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장일소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아. 아무래도 내가 너를 너무 부려 먹은 모양이구나. 이번 전쟁이 끝나는 대로 휴가를 줄 테니, 어디 산 좋고 물 좋은 데 가서 푹 쉬다 오려무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제 머리는 아주 멀쩡합니다.”
‘아닌 것 같은데?’라며 갸웃대는 장일소를 외면하며 호가명이 말했다.
“구파 같은 멍청한 놈들이 예상대로 움직이는 거야 당연하지만, 천우맹은 아닙니다. 화산검협은 논외로 친다 해도 녹림왕 임소병은 결코 만만한 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흐음?”
“우리가 노리는 바가 뭔지 그가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토록 뻔한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건…….”
“다른 수를 숨겨 놓았을 거다,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거니?”
호가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상대를 경시하지 않는다. 아니 경시할 수가 없다. 상대의 능력이 자신보다 높다는 것을 이미 확인했으니까.
그러니 매사에 신중해야 한다.
“예.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가명아, 가명아.”
장일소가 과장되게 고개를 내저었다. 호가명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련주님의 생각은 다르십니까?”
“다를 게 있겠니? 뻔한 일이지. 어디 그놈들이 곧이곧대로 움직일 놈들이니?”
“하면…….”
생각이 다르지 않은데 왜 반응이 다른가를 묻는 것이다.
장일소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의미가 없단다.”
“……예?”
“무슨 수를 숨겨 놓았건 의미가 없지. 의미 있는 건 수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수를 두었다는 사실 그 자체란다.”
이는 천하의 호가명조차 쉬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련주님께서는 지금의 상황을 좋은 쪽으로 보고 계신 겁니까?”
“글쎄. 어느 쪽일까?”
장일소가 쿡쿡 나지막이 웃었다.
“좋은 쪽이고 나쁜 쪽이고를 따질 게 없지. 중요한 건 놈들이 선택을 했다는 거니.”
“그 선택이 옳을 수도…….”
“쯧쯧. 가명아. 왜 이리 답답하게 구니. 그 선택이 옳은가 그른가는 중요하지 않다니까? 중요한 건 선택을 했다는 사실 그 자체라고. 모르겠니?”
모르겠다. 호가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장일소를 탓할 일도 아니다. 아마 지금 장일소는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일 테니까.
그저 듣는 이가 이해하지 못할 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놈들의 선택이 제 목을 조이게 만드는 것뿐이란다. 그리고 그건…… 굳이 대단한 품을 들일 필요도 없는 간단한 일이지.”
장일소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호가명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대체 언제부터 이 상황을 그려 왔고, 또 얼마나 이 상황을 기다려 온 것일까?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단다.”
장일소가 빙그레 웃었다.
“딱히 내가 대단한 건 아니다. 능력만으로 따진다면 저 화산검협이나 소림 방장의 능력이 나보다 못할 게 없겠지. 아니, 오히려 저들의 능력이 훨씬 대단한 부분도 있다.”
“너무 과한 겸손이십니다.”
세상 누구라도 그리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장일소는 진심인 듯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그저 나는 저들이 모르는 한 가지를 알고 있을 뿐이란다.”
“……그게 무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장일소의 시선이 느리게 천막 밖으로 향했다.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협잡질이든, 천하를 모두 불태울 거대한 전쟁이든, 그 모든 걸 결정하는 건…… 결국 사람이란다.”
장일소의 얼굴은 어느새 차게 굳어 있었다.
혐오하듯, 찬탄하듯, 어쩌면…… 두려워하듯.
“이제 놈들에게도 그걸 알려 주어야겠지.”
잠시 떠올랐던 감정을 삽시간에 말끔히 지운 장일소가 미소를 띠었다.
“이쯤이면 됐다. 시작하라고 하렴. 생각보다 이르지만 어쩌겠니? 저리 급하게 굴어 대니. 쯧쯧.”
“예. 바로 지시하겠습니다.”
호가명이 몸을 돌려 나갔다.
나른한 얼굴로 길게 자라난 손톱을 내려다보던 장일소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조금은 내보일 줄 알았더니.’
선택에 있어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딱히 재미없는 선택이라는 건 분명했다.
“영 사교성이 없는 아이구나.”
웃음으로 휘어진 장일소의 두 눈이 번득였다.
“내보이지 않는다면 강제로 끄집어내 주지. 그럼 우리는 분명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거란다.”
재미있는 놀이를 시작한 아이처럼 희고 맑은 미소가 오래도록 그의 얼굴에 번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