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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52화 (1,553/1,567)

1552화. 글쎄. 어느 쪽일까? (2)

“비켜라!”

파아아앗!

흉측한 거치도를 든 장한이 일격에 두 쪽으로 갈라져 좌우로 튕겨 나간다. 공격한 이는 쏟아지듯 튀는 피를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더욱 속도를 붙여 앞으로 달려 나갔다.

“히, 히익!”

실로 마귀 같은 기세였다. 이에 눌린 사파인 하나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남궁도위는 이번에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러 눈앞에 보이는 이를 사분오열 내려 했다.

쾅!

하지만 그의 검에 잘려 나갔어야 할 이는 어디선가 날아온 권력에 얻어맞아 튕겨 나가 버렸다. 그 바람에 남궁도위의 검이 애꿎은 허공만 갈랐다.

남궁도위의 눈가가 못마땅하게 꿈틀했다. 귓가에 나직한 불호 소리가 들려왔다.

“아미타불.”

혜연이 담담한 눈으로 남궁도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급한 것은 이해하나, 과한 살수는 그걸 쓰는 시주께 해가 될 것이외다.”

“……예, 스님.”

순순히 대답하면서도 남궁도위의 얼굴은 영 마뜩잖았다. 혜연이 다시 한번 나직이 불호를 왼다.

마음이야 모를 리 없다. 그 역시 숭산이 불타고 있단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급해 다른 걸 돌보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남궁가를 이끄는 남궁도위는 그 마음이 오죽하겠는가.

“소가주님! 저쪽에 연기가……!”

누군가의 외침에, 남궁도위는 순간 갈등했다.

연기가 나는 쪽은 그들이 이동해 가야 할 길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다. 저곳으로 가 전투를 벌이다 보면 시간을 지체할 수밖에 없다.

“어찌합니까?”

그리고 그 순간, 남궁도위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자기혐오에 휩싸였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사람을 구하는 일이다. 그런데 망설일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안휘에 있는 이들만 사람이 아니다. 저들 역시 사람이다.

“가자!”

“예!”

하지만 그들이 채 발을 떼기도 전에 혜연이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시주. 저쪽은 제가 갈 터이니 시주께선 길을 재촉하시지요.”

“스님?”

남궁도위가 돌아보자 혜연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한시가 급하지 않으십니까.”

순간 남궁도위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더 급한 게 무엇인지 구분도 못 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사람을 구하는 일에는 선후가 없는 법입니다. 더 급한 일도 더 중한 일도 없지요. 그저 둘 중 하나가 먼저 가야 한다면 남궁 소가주께서 먼저 가시는 게 옳다고 여겼을 뿐입니다.”

“……스님.”

“설마 저희를 못 믿으시는 것이외까?”

혜연이 빙그레 웃었다. 남궁도위는 황당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화산 검수들이 한쪽 팔을 접어 근육을 내보이는 시늉을 했다.

자신들만 믿으라는 의미다.

“가시지요.”

남궁도위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미타불.”

“가자!”

남궁도위가 제 수하들을 이끌고 앞으로 치고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혜연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다들 마음이 너무 급해지지 않으면 좋으련만.’

“갑시다, 시주들. 서둘러야 합니다.”

“예, 스님!”

혜연이 연기가 치솟는 곳을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급하지 않을 도리도 없겠지.’

참극을 눈으로 본 이상 어찌 급하지 않을 수 있을까. 걸음이 늦춰질수록 희생자가 늘어날 게 자명한 것을.

‘그저 부처께서 돌보시기를.’

“아미타불.”

간절한 마음을 실은 불호가 흘러나왔다.

“사형.”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백천이 슬쩍 돌아보았다. 못마땅한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다.

“왜 자꾸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저는 그럴 위인이 못 된다니까요.”

“쯧.”

백천이 대놓고 혀를 찼지만 백상은 태연자약했다.

“조장쯤 되려면 무력이 웬만큼은 받쳐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위기 때 도움이 안 되는 조장을 누가 따르려고 하겠습니까?”

“딱히 약하지도 않은 녀석이.”

“무슨 고릿적 이야기를 하십니까? 사제들은 물론이고 사질 놈들도 저를 추월한 지 한참 됐습니다.”

백상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누구라도 제 입으로 늘어놓기에는 속이 뒤집힐 말이건만, 이놈은 딱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부각주쯤 되는 놈이 일개 조원이 되는 건 말이 되고?”

“사람에게는 다 제각각 어울리는 자리가 따로 있는 거죠. 그리고 모르는 말씀 마십시오. 장문대리의 조원쯤 되면 웬만한 조장보다 끗발이 셀 테니까요.”

“하아.”

백천이 결국 못 이기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다리로는 여전히 빠르게 땅을 차며 나아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왜? 부른 이유가 있을 게 아니냐.”

“……두고 온 사람들은 괜찮을까요?”

백천은 말없이 슬쩍 뒤쪽을 일별했다.

보이는 족족 사파 놈들을 도륙 내며 이동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핍박받은 이들까지 돌보지는 못했다. 백상은 그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사형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마음이 쓰이는 거겠지.”

“……예.”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을 돌볼 여유가 없다. 이 순간에도 더 큰 위험에 노출된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일단은 최대한 많은 목숨을 구하는 게 우선이다.”

“알고 있습니다, 사형.”

“정 걱정이 된다면 더 빨리 달려라. 강북에 침투한 사파 놈들을 모조리 베어 내고 나면 그때는 여유가 조금 생길 테니까. 그때까지 모두 잘 버텨 주길 바랄 수밖에.”

“……예.”

“그보다, 집중해라!”

“예?”

어느새 차갑게 얼굴을 굳힌 백천이 앞을 쏘아보았다.

잠시 후, 한 무리의 무인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사파 특유의 박도에는 핏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백천의 두 눈에 불길이 일었다.

“박살 내 버려라!”

“예!”

명이 떨어지고, 백상이 단번에 뛰쳐 나가려는 그때였다.

휘익!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이 들렸다. 그리고 사파 무리 사이로 푸른 문양이 새겨진 흰 무복 차림의 누군가가 뛰어들었다.

“뭐, 뭐냐!”

“웬 놈이냐!”

그리고.

휘이이이이이잉!

마치 새하얀 눈보라가 일거에 몰아치는 듯한 검기가 터져 나왔다. 갑작스러운 난입에, 도를 치켜들려던 사파 무리는 비명을 내지를 틈조차 없이 휩쓸렸다.

휘이이이잉!

맹렬한 눈보라가 잦아든 후 남은 건 쓰러진 사파인 십여 명과, 그 가운데 홀로 선 한 사내였다.

비웃는 듯 묘한 웃음을 흘리는 그 사내와 눈이 마주친 순간, 백천이 이를 갈아붙였다.

“무슨 짓이야!”

사내는 여유 넘치는 미소로 화답했다.

“영문을 모를 물음이로군. 사파를 베는 데 이유가 있나?”

“아니, 왜 네가 여기에 있냐고!”

“그것 역시 멍청한 질문이야. 다른 성으로 가는 길이 설마 수두룩하게 많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길이 겹치는 건 당연하다. 그저 네가 느려 터졌을 뿐.”

“으…….”

백천이 이를 악물었다.

진금룡의 주위로 순식간에 따라붙은 종남의 검수들은 마치 진금룡을 호위하듯 도열했다.

그 광경을 본 백천의 가슴엔 천불이 일었다. 진금룡이 그런 백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굳이 그렇게 애쓸 것 없다.”

“뭐?”

“궂은일은 내가 대신 해 주마. 그게 형의 도리 아니겠느냐?”

“누가 형……!”

“아니.”

진금룡이 빙그레 웃더니 말을 정정했다.

“더 강한 문파의 도리라고 해야 할까?”

“…….”

“그러니 적당히 몸 사리며 따라오너라. 너희가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진금룡은 백천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종남의 검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가자. 조금 서둘러야겠군.”

“예!”

종남의 검수들은 차가운 눈으로 백천과 화산 검수들을 보더니 이내 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갔다.

“후우.”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백상이 탄식하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적일 때는 끔찍했던 놈들인데, 확실히 한편이 되니까 든든하긴 합…….”

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않고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백천의 얼굴이 뭐라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형편없이 일그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상.”

“예? 아……. 예, 사형! 하명하십시오!”

“달려라.”

“예?”

“……종남 놈들보다 뒤처지면, 차라리 청명이 놈을 따라가는 게 나았다고 생각하게 해 주마.”

……오랫동안 백천을 봐 온 백상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건 절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절대로.

“하, 하지만, 사형! 아시다시피 저희는 지금 개방의 합류를…….”

“그래서?”

“…….”

“뭐 하느냐?”

“……예?”

백천이 감정 없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달리라고.”

“예! 예! 사형!”

기겁한 백상과 화산 일대제자들이 전력을 다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저 인간에게 이런저런 말이 통할 리가 없다.

‘빌어먹을! 모르겠다. 알아서 찾아오겠지!’

죽자고 그들을 쫓아오고 있을, 이름도 모르는 개방도에게 마음속으로나마 묵념했다.

으드득 이를 갈아붙인 백천 역시 이내 그들의 뒤로 따라붙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망할 인간이…….”

진금룡보다 못하다는 소리는 들을 수 있다. 그런 사소한 일로 화를 낼 만큼 어린애는 아니다.

하지만 화산이 종남보다 못하더라는 소리는 죽어도 들을 수 없다. 아니, 무덤에 묻혀서도 듣기 싫다.

“개방 분들 오시는 대로 각 조장에게 연락해서 진격 속도 높이라고 해! 뒤처지는 놈은 가만 안 둔다고!”

“예, 사형!”

“대답할 시간에 달려라!”

“…….”

그 시각.

백천이 굳이 재촉할 것도 없이, 사방으로 퍼진 천우맹의 타격조들은 임소병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강북 전체에 뻗어 나가고 있었다.

“뭐, 뭐가 이렇게 빨라?”

홍대광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커다랗게 내걸린 강북의 전도에 검은 선이 수도 없이 생겨났다. 굵게 이어지던 선은 중간중간 갈라져 강북이라는 거대한 땅에 가지처럼 뻗쳤다.

그뿐만이 아니다.

“진성(晋城) 인근에서 교전입니다!”

“맹에서 출발한 이들이 장자현 인근에서 사파 무리를 주살했다 합니다!”

“합비 쪽에서도 교전 소식이 있습니다!”

“버, 벌써?”

사방에서 연신 소식이 쏟아진다.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지도 위에 교전 위치를 재빠르게 표시했다.

물에 갠 붉은 안료를 묻힌 붓이 지도 위를 오갈 때마다 검은 선 곳곳에 빨간 점이 찍힌다.

“……세상에, 이렇게 싸워 대면서도 이 속도로 이동한다고?”

제대로 된 무인도 아니고, 기껏해야 흑도패에 불과한 사파 잡졸들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싸우고 정비하는 데 최소한의 품은 들기 마련일진대.

홍대광이 멍하니 지도를 응시하는 와중에도 선은 더 잘게 뻗어나가고 붉은 점은 더욱 늘어난다.

“……매화 같군.”

마치 강북이라는 커다란 땅에 거대한 매화나무가 피어나는 것만 같다.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린 홍대광이 외쳤다.

“이, 이럴 때가 아니지! 우리 쪽 놈들은 어찌 됐느냐?”

“지금 다들 출발했습니다. 다만 저쪽이 워낙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보니 합류에 시간이…….”

“이런 멍청한 놈들! 그래도 우리가 명색이 개방인데 상대가 빨라서 따라잡기 힘들다는 게 말이나 되냐! 왜? 차라리 구걸하는 법을 까먹었다고 하지!”

홍대광이 버럭 호통치고 윽박질렀다.

“오늘 내로 합류 못 하는 새끼는 내가 그 쓸모없는 발모가지 잘라 버린다고 전해! 어서!”

“예, 방주님!”

홍대광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거, 나조차도 천우맹을 너무 쉽게 보고 있었던 건가?”

이 순간에도 가지는 계속해서 뻗쳐 나가고, 붉은 점은 점점 빽빽해진다. 홍대광은 조금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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