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1화. 글쎄. 어느 쪽일까? (1)
“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비라고는 없는 칼날이 제 아내를 감싼 이의 등을 거칠게 갈랐고, 이내 아이를 부둥켜안은 아낙의 어깨에 쑤셔 박혔다.
“죽여라!”
이 처참한 광경은, 어쩌면 이 모든 걸 지시한 이의 계산에서조차 벗어난 일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걷잡을 수 없는 광기가 넘실거렸다.
사파. 타인의 것을 탐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정당하지 않은 행위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나약한 자의 것은 당연하게 제 것처럼 여기는 이들.
사파를 택한 데 딱히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다. 언제 어디서든 정도를 추구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가.
이들이 사(邪)라는 이름에 자신을 내맡긴 이유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망을 다스리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억누르지 않기 위해 사파가 된 이들이니까.
하지만 공교롭게도 최근 몇 해, 그들은 외려 사파이기에 자신을 억누르며 지내야 했다.
장일소, 그의 압제 때문이다.
한 지역을 완벽하게 지배하던 흑귀보를 말 그대로 오체분시하고, 저 두렵기 짝이 없던 구파일방을 짓밟아 버린 자.
그자가 주는 공포는 정파에게까지 미쳤으나, 사실 사파에 몸담은 이들이 느끼는 정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흐하하하하핫! 잘도 뛰는구나!”
장일소의 아래서 살기 위해선 참아야 했고, 숨죽여야 했다. 마음만 먹으면 눌러 죽일 수 있는 이 날파리 같은 것들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고 말이다.
손쉽게 타인을 약탈하고 짓밟으며 도락을 누리던 이들에게 지난 몇 해는 지옥과도 같았다.
그렇게 눌리고 또 눌려 온 흉악한 본성이,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는 이 강북에서 마침내 폭발한 것이다.
“아아아악!”
또 한 명, 달아나는 이의 등에 박도(朴刀)를 쑤셔 박은 이가 핏발 선 눈으로 옆을 돌아보며 외쳤다.
“여기! 여기 곡식이 있다.”
몇몇 놈들은 마을 곳간을 털고 있고, 또 몇 놈은 울부짖는 아낙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채 칼을 휘두른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는 종효(宗效)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어렸다.
곳곳에 옮겨붙으며 번지는 불이 황홀하다. 과거의 영화와도 같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화려하다.
“……대형. 이거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그때 다가온 수하가 조심스레 물었다. 종효의 고개가 살짝 못마땅하게 꺾였다.
원래 밥 먹듯 흔하게 벌이던 일인데, 고작 몇 해 참았다고 마음이 약해진 건 아니고?
“장강에서 꽤 올라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긴 아직 호북인데 이러다가 구파 놈들이 오기라도 하면…….”
“멍청한 놈!”
종효가 사납게 역정을 냈다.
“구파 놈들이 올 거면 벌써 왔지! 우리가 여기까지 오도록 내버려 뒀다가 뒤늦게 온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원래 잘난 것들은 우리 같은 놈들에겐 관심도 없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하던 일이나 마무리해라.”
“그래도…….”
“이 새끼가 그래도!”
계속 토를 다는 수하의 가슴팍을 종효가 단박에 걷어차 버렸다.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내며 나뒹군 이가 겁먹은 얼굴로 종효를 보았다.
“겁만 많아서는! 정파 놈들이 떠들어 대는 것만큼 진정 남을 위했다면 세상이 이렇게 둘로 나뉘었겠느냐? 있는 힘 없는 힘 다 끌어모아서 진즉에 사패련과 한바탕했겠지!”
“…….”
“그러니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나 해!”
“예! 예, 대형!”
수하가 부리나케 달려갔다. 종효가 그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쯧.”
그야 지위가 높을수록 귀찮은 일이 많아진단 걸 알아서 일부러 이렇게 산다지만, 저것들은 아니다. 저리 멍청하니 평생 잡졸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수하에게 돌렸던 신경을 끊고 불타는 마을과 여기저기 피를 흘리며 쓰러진 이들을 보았다.
협의? 세상에 그런 게 정말 있었다면, 그가 아직 살아 있을 리 있는가? 그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협의 따윈 없단 증거다.
물론 저승의 염왕은 그를 용서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승에서는 굳이 그를 벌하겠다고 찾아올 이가 있을 리 없다.
그때, 저 멀리 휘청휘청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달아나는 아이의 뒷모습이 눈에 걸렸다. 광기 어린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하.”
꾸욱.
박도를 잡은 종효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땅이 움푹 파이도록 강하게 발을 내디딘 그가 뒤로 한껏 팽팽하게 당겼던 손을 단번에 앞으로 내뻗었다.
쇄애애애액!
박도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며 아이의 등을 향해 쏘아졌다. 작고 마른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기세였다.
도가 아이에게 거의 이르렀을 때, 종효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인다.
그 순간, 불길함을 느낀 아이가 뒤를 돌아본다. 작은 두 눈에 어리는, 순간적인 절망. 이 찰나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종효의 등을 타고 시퍼런 전율이 흘렀다.
카아아아앙!
하지만, 그가 고대하던 광경은 별안간 박살 나고 말았다.
그가 내던진 박도. 백 근은 과장이지만, 못해도 서른 근은 충분히 넘을 무쇠 박도가 말 그대로 폭발하듯 조각나며 비산한 것이다.
종효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눈이 의심될 지경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져야 저 무거운 도가 연약한 자기 그릇처럼 산산조각 날 수 있단 말인가?
“뭐…….”
이내, 누군가의 범 같은 노호성이 종효를 잡아채며 그를 현실에 밀어뜨린다.
“이 개 같은 자식이!”
달아나던 아이가 있던 곳에, 어느새 한 사람이 나타나 있었다.
곱슬곱슬한 머리에, 검은색 무복 차림을 한 건장한 청년이었다. 그의 눈에는 지독한 살기와 분노가 넘실거렸다. 그의 한쪽 팔엔 탈진한 아이가 안겨 있었다.
‘언제……?’
분명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어떻게 갑자기 나타나 그의 도를 막아 냈단 말인가?
그러나 깊이 생각할 시간 같은 건 주어지지 않았다.
“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알았다. 양민들이 내는 소리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주위를 둘러보니 수하들이 어디선가 나타난 이들에게 힘도 쓰지 못하고 주살당하고 있었다.
“이 개 같은 새끼들 같으니!”
“이게 인두겁을 쓰고 할 짓이냐!”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검을 휘두르는 무인들의 가슴팍에는 매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문양이 눈에 들어온 순간 종효의 발이 머리보다 먼저 움직였다.
‘달아나…….’
하지만 그의 발보다 더 빠른 것이 있었다.
푸우욱!
종효가 숨을 들이켰다. 본능적으로 들어 올렸던 손이 어느새 검에 꿰여 있었다.
지독한 고통이 엄습했지만, 그래도 본능 덕에 머리가 꿰뚫리는 건 막아 내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깨달았다. 이게 더 나은 결과는 아니었다는 것을.
“끄…….”
그의 우수를 뚫은 검이 곧장 그의 얼굴을 향해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힉!”
종효는 황급히 멀쩡한 좌수까지 동원해 검날을 움켜잡았다.
푸욱!
시린 검기가 둘러진 검은 그의 좌수마저 여지없이 베며 그의 얼굴로 밀고 들어왔다.
“으, 으헉!”
차츰 뒷걸음질 치던 종효는 검에 꿰인 채 주저앉았다.
바로 코앞에 검의 첨단이 놓여 있었다. 이젠 그의 얼굴에 공포가 어린다.
누군가가 멀리서 이 광경을 보았다면, 포승에 양손이 묶인 죄인이 참형을 당하는 광경이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사, 살…….”
“……나는.”
그때, 생각보다 앳되고 차분한 목소리가 종효의 귀에 스쳤다. 그는 그제야 자신에게 검을 겨눈 이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아까의 그 곱슬머리 검수가 아니다.
가느스름한 눈매에,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 위로 작은 관을 쓴 사내였다.
전형적인 젊은 도사의 모습이지만, 눈빛만은 더없이 차가워 도사란 생각이 도무지 들질 않았다.
“난 사실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녀석의 방식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뭔, 뭔 소리지…….’
“죄를 지은 이는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지만, 그 벌이 지나치게 잔혹한 것은 결국 힘 있는 이의 분풀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으니까.”
공포와 고통으로 일그러진 종효의 얼굴에 의문이 스친다. 무슨 말인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벌을 내리는 입장에 서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드는군. 단순한 죽음만으로 네가 저지른 죄의 대가를 모두 치를 수 있을까? 사람의 목숨은 고작해야 하나일진대, 네가 죽인 이의 수는 그 곱절의 곱절을 훌쩍 넘기겠지.”
잠시 멈추었던 검이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히, 히익!”
종효는 제 손을 꿰뚫은 검을 필사적으로 움켜잡았다. 끔찍한 소리와 함께 손을 인두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들었지만, 이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저 젊은 도사는 종효의 절박한 몸부림 따위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듯 천천히 검을 움직였다. 지독하도록 느리게, 하지만 확실하게.
“사, 살려…….”
“알고 있다. 도인이 해야 할 일은 진혼(鎭魂). 억울하게 죽은 이를 보살피는 것이지, 악한 이를 벌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분명 도사의 본분에서 벗어나 있지.”
젊은 도사의 눈은 분명 종효에게 향해 있지만, 어쩐지 그 너머의 다른 것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 사람의 생명을 끊기 직전임에도 그 사실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종효는 이자가 너무도 두렵고 무서웠다.
“흐……. 으으! 아악!”
푸욱!
결국 검이 피부를 가르며 머리로 파고들었다. 피가 철철 흘렀고, 내내 자비라고는 없던 종효의 두 눈에선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제발! 제발 살려 주십…….”
그러나 검은 여전히 평온하게,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끄르륵…….”
결국, 머리를 꿰뚫은 무심한 검이 땅까지 푹 박혔다.
짧게 경련하다 축 늘어진 시신을 물끄러미 보던 윤종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더러운 게 묻은 것처럼 피를 단번에 털어 내었다.
“여기서 썩거라. 넌 땅에 묻힐 자격도 없으니까.”
눈빛보다 더 시린 말을 남긴 윤종이 시신을 두고 몸을 돌렸다.
“사형…….”
그러자 조걸이 걱정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놈들은?”
“조금 전에 다 제압했습니다. 저기…….”
조걸이 가리킨 곳을 보니 사형제들이 항복한 놈들을 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윤종의 눈이 꿈틀했다.
“뭐 하는 거냐?”
“예? 일단 제압을…….”
“압송이라도 하게?”
매서운 힐난에 조걸이 당황했다.
“아, 아니, 그렇다고 저항하지 않는 이들을 죽일 수도 없지 않습니까?”
윤종은 말없이 포박된 이들을 쏘아보았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지체하는 동안 또 한 사람이 죽는다. 저딴 놈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동안.”
“사, 사형.”
검을 든 윤종이 그들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순간 불길한 느낌에 조걸이 황급히 따라붙었지만…….
“사형!”
파아앗!
윤종의 검은 이미 허공을 격했다. 그리고 끌려오는 사파인들의 단전을 단번에 깨부수고, 팔다리 힘줄을 끊어 놓았다.
사파인들을 붙잡고 있던 사형제들이 일순 움찔했다. 그리고 조걸마저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끄아아아악!”
고통을 이기지 못한 사파인들이 피거품을 물며 혼절했다. 눈을 떴을 땐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삶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조걸의 얼굴에 황망함이 스친다. 물론 우려했던 것처럼 목을 베어 버리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그래도 이건…….
“입을 틀어막아.”
“사, 사형?”
“죽이지 않을 거라면 입을 놀리지 못하게 해 둬라. 이들을 정리해야 하는 건 남은 이들이니까.”
이대제자들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있다면 이들을 말끔히 처리하고 이동하겠지만, 지금 그들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애초에 이곳에 온 것도 다들 목적지로 가는 길에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합리적이고도 깔끔한 명령이라고 볼 수 있다.
그저…… 지시한 이가 다른 이도 아닌 윤종이라는 게 마음에 걸릴 뿐.
“사형. 하지만…….”
“그만.”
윤종이 조걸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그리고 조걸의 품에 안긴 아이를 잠시 말없이 물끄러미 보았다.
이내 그는 쌀쌀하게 몸을 획 돌렸다.
“일 다경 내로 정리해라. 바로 이동한다.”
“그, 그럼 부상자를 돌볼 시간이…….”
“응급처치만 해. 살 사람은 살 것이다.”
“아니! 그게 무슨…….”
“다른 이들이 죽는 건 괜찮더냐?”
윤종의 차가운 말에 조걸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정리해.”
“……예.”
윤종이 멀어졌다. 그 등을 빤히 보던 조걸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사형.’
합리적이고, 또 신속하다. 이견을 달 여지가 없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 모든 손속이 이 순간 윤종이 가장 꺼려 하는 이와 무척이나 닮아 있는 건.
심지어…… 멀어지는 저 등마저도 말이다.
윤종의 등을 지켜보는 조걸의 눈이 불안한 듯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