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0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5)
“가자! 일단 달려!”
“아니, 갑자기 왜 달립니까!”
“남들도 다 달리잖아!”
조걸은 다른 조에 뒤질세라 악을 쓰며 화음 밖으로 달려 나갔다.
“가는 방향이 같은 게 아닌데 왜 같이 달리냐고요!”
“알았으니까 달려!”
곽회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저 인간이 제발 조에 들어와 달라고 사정할 때, 그냥 두들겨 맞는 한이 있더라도 거절해야 했는데! 그놈의 정이 뭔지.
“그래서 우린 어디로 갑니까?”
“강소!”
“끄응…….”
곽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섬서에서 출발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먼 곳 중 하나다.
우연이라면 좋겠지만…… 그럴 리 없겠지.
“강소까지 어느 세월에……. 사, 사형. 어딜 갑니까!”
조걸은 구시렁거리는 곽회를 두고 단숨에 내달렸다. 앞서서 달리고 있는 윤종의 조를 향해서였다.
“윤종 사형! 사형은 어디입니까?”
“안휘.”
“역시!”
조걸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문제가 가장 심각한 곳이 바로 안휘다. 그러니 당연히 화산의 조 중 몇은 안휘로 배정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숙은요?”
“안휘다.”
조걸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우연인가? 아니면…….
“사형. 사숙은…….”
“걸이 너는 어디냐?”
“저요? 저는 강소성입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강소는 절강과 맞닿아 있다. 절강의 북쪽에 항주가 있다는 건 기억하고 있겠지?”
“예, 당연하죠.”
끔찍한 기억을 선사한 곳인데 잊을 리가 있겠는가?
“한 도시의 치안이 무너지면 그 영향은 연쇄적으로 퍼져 나가기 마련이다. 그래도 안휘에는 남궁을 따르는 문파들이 있기에 급격히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강소성의 상황은 분명 좋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혹시라도 마교의 잔당이 남아 있다면 문제는 더……. 걸아. 내 말 듣고 있느냐?”
조걸이 슬그머니 윤종에게서 멀어졌다.
“어디 가느냐?”
“아니. 가던 길 가시라고요.”
“너도 이제 사람을 이끌어야 하는 입장이니 이런 부분을…….”
조걸이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저런 인간을 걱정했을까?
“사고는요?”
“글쎄?”
“아, 그러고 보니까 소소는 조를 짜지 않은 것 같던데? 사고랑 같이 가는 겁니까?”
“아니다.”
윤종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소소는 지금 일개 조장으로 움직일 수 없는 입장이다. 아마 중간 연락책이 될 산채 하나에 자리를 잡고 의원들의 상황을 살필 거다.”
“아…….”
확실히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기동의료대를 창설한 건 당소소고, 이번 일에 그들을 투입한 것 역시 그녀이니 전반적인 관리 역시 직접 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다.
알고는 있지만, 순간적으로 당소소가 조금 멀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작은 조 하나를 짜는 데도 진땀을 빼야 했는데, 소소는 벌써 그 많은 이들을 통솔한다니.
“망신 안 당하려면 열심히 해야겠네요.”
그 말에 윤종이 피식 웃었다.
“그거 놀라운 말이로구나.”
“뭐가요?”
“네가 아직 망신당할 게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 말이다.”
“이 양반이 진짜!”
조걸이 구겨진 얼굴로 윤종을 노려보다 슬쩍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그…….”
“또 뭐?”
“청…명이는 혹시?”
윤종의 표정이 일순 가라앉았다. 모르는 이가 보기엔 그저 담담해졌다고 표현할 얼굴이지만, 윤종에게 익숙한 조걸은 그 표정에 흐르는 한 줄기 냉기를 놓치지 않았다.
“필요 없겠지.”
“예?”
“조 같은 건 말이다. 혼자서 능히 할 수 있는 놈이니까.”
“아, 아니, 사형. 무슨 말을 그렇게…….”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놈에게 조원 같은 건 도움이 안 돼. 어설픈 조원들을 붙여 봐야 발목이나 잡겠지.”
틀린 말은 아니다. 솔직히 조걸도 동의한다.
그럼에도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못한 건, 윤종의 목소리에 서린 묘한 냉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놈은 우리랑 다르니까.”
“사형?”
“먼저 간다.”
윤종은 조걸을 두고 앞으로 치고 나갔다.
“사형! 같이 갑시다!”
조걸을 등 뒤에 둔 채 달려가는 윤종의 얼굴이 그제야 슬며시 일그러졌다.
‘한심하네.’
자신에게 던지는 힐난이었다.
복잡해지려는 머릿속을 애써 털어 내며 앞서 달리는 이의 등에 시선을 고정했다.
‘사숙.’
백천의 등을 지켜보는 윤종의 눈은 어둑했다.
‘다들 그렇게 멋대로 굴 거라면…… 나도 그렇게 해 드리죠.’
마음속으로 단단히 각오를 굳힌 윤종이 다리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장관이로군.”
당군악의 말에, 청명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하지만 청명이 보기에도 그 말이 딱이기는 하였다. 십여 명으로 이루어진 조들이 천하 각지에 수십 갈래로 퍼져 나가는 광경은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니까.
“개방은요?”
“알아서 합류하겠다고 하더군.”
“느려 터져서는.”
청명이 툭 비난하자 당군악이 그를 힐끗 보았다.
“칭찬을 해 주어야 할 일이 아닐까?”
“진작부터 해야 했을 일을 이제야 하는 건데, 칭찬할 게 뭐 있어요? 그동안 하던 짓이 욕먹을 짓이었던 거지.”
당군악은 쓰게 웃었다.
이제까지의 개방이었다면 설령 도움을 주더라도 적당한 집결지에 거지를 적당히 모아 놓는 게 전부였을 것이다.
그들을 일일이 구분하고 나누어 파견하는 일은 모조리 천우맹의 차지가 되었을 테고.
하지만 새로이 방주가 된 홍대광의 일 처리는 달랐다.
화음에서 출발한 조들이 어디로 향하든, 얼마나 빨리 움직이든 그 종적을 알 수 있고 따라잡을 수 있으니 괜히 시간 끌지 말고 바로 움직여라.
‘대단한 자신감이지.’
어쩌면 청명의 말대로 진작부터 개방이 보여 주었어야 할 모습인지도 모른다.
“아. 그리고 각 성에서 사파들의 발호 위치를 최대한 빠르게 전달해 주겠다고 하네.”
“그거야 기본이죠. 뭘 생색내듯 말하지? 하여튼 간에 거지 놈들.”
급기야 청명의 얼굴에 짜증이 어리자 당군악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다만 유령문의 경우에는 이쪽에서 움직일 필요가 있겠지. 합류할 방법이 마땅치 않으니까.”
“고민할 필요 없어요. 몇 명씩 뽑아 성마다 보내라고 하세요.”
“성에?”
“네. 정확히는 산채에요. 유령문도 성마다 중간 기점으로 쓰고 있는 산채가 있잖아요?”
“확실히……. 그들더러 알아서 찾아가라 할 게 아니라. 인근의 산채에서 파악한 위치를 알려 주면 되겠군.”
“네.”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대부분 문제는 끝이 난다.
그는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루인가?’
아니, 하루도 아니다. 고작 반나절이다.
이 거대한 연맹이 의견을 취합하고 결론을 내린 후 편제를 다시 짜기까지 걸린 시간.
누군가는 그것도 느리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당군악은 알고 있다. 여러 가문, 여러 문파의 회합이란 것이 으레 어떤 꼴로 움직이는지.
반나절은, 경이롭다는 말로도 채 다 표현이 안 될 만큼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그리고…….
“산채를 중간기지 삼아 보급을 할 겁니다.”
재빠르게 다가온 임소병이 말을 건네자, 당군악이 물었다.
“보급 같은 게 필요하겠소? 그냥…….”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무인은 먹지도 않는답니까? 평소에는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격렬한 전투를 반복해야 하는 상황이면 허기가 질 수밖에 없습니다. 며칠 걸릴지 미지수인 일이니 더더욱 대비가 필요하지요.”
“으음.”
“그리고 보급은 꼭 저들만을 위한 건 아닙니다. 아무리 서둘러도 이미 늦어 버린 경우도 있을 터. 난민들을 위해서 곡식과 돈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다.
“중심이 되는 산채를 선정하고 가까운 상단과 연계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은하상단의 황 상단주께서 힘써 주실 겁니다.”
“그러는 게 좋겠소.”
당군악은 몰래 혀를 내둘렀다.
출발은 급히 했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준비를 마친 뒤 사람을 보내는 게 아니라, 보내 놓고 준비를 마친다. 녹림과 유령문, 상계라는 세 가지 축이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가능케 한다.
‘예전이라면……. 구파일방이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겠지.’
그들이 모자라고 부족해서가 아니다. 애초에 기반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무당은 하남의 남부에서 호북까지를 지배하고, 소림은 하남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다. 그리고 종남은 섬서를 완벽히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세 지역은 서로 연계되지 않는다. 당장 호북의 상단이 섬서를 오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지역과 지역의 연계는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천우맹의 방식은 다르다. 천우맹은 지역에 제한을 두지 않고 분야별로 전 중원을 오가는 게 가능하다.
녹림과 상계. 유령문과 개방.
천하를 아울러 거점으로 둔 이 네 세력이 있으므로.
“처음부터였나?”
“뭐가요?”
“아니, 아닐세.”
당군악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와 그걸 따져 봐야 무엇 하겠는가? 이미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청명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우리 쪽에서 신경 써야 할 건, 각 산채를 제대로 된 기지로 만드는 거예요.”
“확실히 하도록 하겠네. 개방의 지원을 받을 것이고, 우리 쪽에서도 따로 인력을 보낼 생각이네.”
임소병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끄응……. 어쩌다 산채가 정파 놈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다는 건 그가 가장 잘 아니 어쩔 수 없다.
“확실하게 해 주세요.”
“걱정 말게. 그 정도야…….”
“아니. 더 확실하게.”
“…….”
청명을 보는 당군악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마주친 청명의 두 눈은 어느새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연락망을 완벽하게 유지해야 해요. 내보낸 이들을 언제든 빠르게 거둬들일 수 있도록. 이게 장일소의 노림수라면 반드시 우리의 전력이 분산된 틈을 노릴 테니까요.”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지.”
확답을 받고서야 청명이 고개를 돌렸다.
가장 급히 달려가는 남궁세가의 사람들 뒤로 백천과 윤종, 조걸이 달려간다. 그 부근에는 종남에서 파견 온 이들도 있다.
“후!”
짧게 숨을 훅 뱉은 청명이 걸음을 성큼 옮겼다.
“그럼 무슨 일 있으면 최대한 빨리 연락 주세요.”
“자네도 가려는가?”
“야! 이리 와!”
키이!
청명의 말에 인근에 대기하고 있던 백아가 재빠르게 청명의 어깨를 타고 올랐다.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는지 까만 눈이 덩달아 비장했다.
“개방의 청구(靑鳩)가 느리다는 건 아닌데, 그래도 눈에 띌 때도 있을 테니까 정말 중요한 소식은 이놈 통해 전달해 주세요.”
“으음.”
당군악이 조금 떨떠름한 시선을 보냈다. 청명은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본단에 남아 있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닌데…….”
시선이 슬쩍 앞쪽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변수가 좀 있을 것도 같고 해서.”
당군악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을 정했으니 돌리지 않을 것이다. 그게 청명이니까.
“잡지는 않겠네. 대신 하나는 기억하게.”
“뭔데요?”
“이제 자네는 화산의 제자이기 이전에 천우맹의 총사네. 자네의 움직임 하나에 수백, 수천의 목숨이 달려 있네.”
당군악이 단호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그 무게를 절대 잊지 말게.”
청명이 당군악을 가만히 응시하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뭐 뻔한 말씀을.”
목소리가 얼핏 심드렁했지만, 살짝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그저 당군악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청명은 당군악의 생각이 깊어지기 전에 몸을 돌렸다.
“그럼.”
파아아앗!
몸이 단숨에 앞으로 쏘아진다. 빛살로 화한 그는 먼저 나아간 이들과의 거리를 삽시간에 좁혀 갔다.
당군악은 소매 안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다.’
여전히 마음속에는 정체 모를 불안이 일렁였지만, 당군악은 단호히 이를 외면하며 몸을 돌렸다.
그 역시 이곳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가세.”
당군악이 떨어지지 않는 발을 굳세게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