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9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4)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꺼져.”
“예의를 지켜라, 무식한 놈.”
“예의?”
백천이 사나운 눈빛으로 진금룡을 쏘아보았다.
“예의는 지킬 만한 놈에게나 지키는 거다. 화산 제자더러 종남 놈이 만든 조에 들어오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들어 주는 시늉이라도 하지.”
“안 될 이유라도 있느냐?”
백천의 눈이 한층 더 사나워졌다. 그러나 진금룡은 외려 그 반응이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조를 짜는 데 있어 그런 제약은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
“맹도도 아닌 내가 왜 너에게 이런 설명까지 해 주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네 잘난 천우맹은 이미 문파 구분이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인 듯하더군. 하면 화산 놈이 종남의 조에 들어오는 것도 이상할 건 없지 않나.”
“비켜.”
백천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진금룡을 지나쳐 가려 했다. 그러자 진금룡이 손을 뻗어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동생아.”
“꺼지라고 했…….”
“이 형은 지금 호의를 베푸는 거란다.”
부드러운 진금룡의 눈빛과 들끓는 백천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백천은 제 어깨를 잡은 진금룡의 손을 매섭게 뿌리쳤다.
“또 뭔 소리를 지껄이려고 호의 운운하는 거지?”
진금룡이 빙긋 웃었다.
“이해가 느린 건 꾸준하구나. 나는 지금 네게 걸맞은 위치에 널 배치해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백천의 입이 꾹 닫혔다.
“지금 다른 이들의 목숨까지 감당할 여력이 없을 텐데? 원치 않게 네 조에 합류할 이들 생각도 조금은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조장이 무능력해 죽어야 한다니, 너무 원통한 일이 아니냐.”
“이…….”
“아둔한 놈이지만 그래도 막냇동생인데, 뒷바라지 정도는 해 주어야 형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러니 쓸데없는 어리광은 그만 부리고 순순히 내 말대로 하거라.”
백천은 말없이 진금룡을 노려보았다.
진금룡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백천의 눈빛을 받아 내었다. 떼를 쓰는 아이를 내려다보는 어른의 얼굴 같았다.
그 얼굴이 한없이 백천의 신경을 긁었다.
하지만 백천은 더 대거리하는 대신 말없이 진금룡을 획 지나쳐 갔다. 뜻 모를 미소를 짓고 있던 진금룡이 그런 백천의 등을 향해 말했다.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말하려무나.”
백천은 끝끝내 대답 없이 진금룡에게서 멀어졌다.
백천이 사라질 때까지 그 등을 빤히 보던 진금룡은 이내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영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귀에 스쳤다.
“사형이야말로 너무 올곧게 서툴다고 생각하진 않으십니까?”
진금룡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그는 칼날 같은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쥐새끼답게 일을 삼아 엿듣고 다니는군.”
“제가 엿들은 게 아닙니다. 대로변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형이 너무 무신경하신 거죠.”
쥐새끼 취급을 당한 이송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기야, 다른 이들이라면 진금룡과 백천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 으르렁대는 곳 근처로는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테니 진금룡이 저렇게 나오는 것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그런 걸 따지기 전에, 동생과 관련된 일에서만 이성이 반쯤 사라지는 본인의 성격부터 따져 봐야 하지 않을까?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뭘?”
“그냥 걱정된다고 하시면 될 일 아닙니까?”
“내가? 저놈을? 말도 안 되는 소리.”
“부상 중인 동생이 전장으로 나갔다가 혹시 화라도 입을까 싶어 바로 옆에 두고 보호하겠다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잖습니까?”
물론 그 부상을 입은 어여쁜 동생이 종남의 원수나 다름없는 화산의 장문대리라는 건 많이 이상한 일이고, 종남의 장문인이 될 이가 문파 간의 입장이라는 중요한 사안을 아무렇지도 않게 거름통에 처박아 버린 건 더 많이 이상한 일이지만…… 어쨌든 지금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런데 꼭 그렇게 동생 분 속을 뒤집어 놓으셔야 했습니까. 좋게 말할 방법이 천 가지쯤은 되었을 것 같은데…….”
“착각을 해도 단단히 한 모양이군.”
“그럼 왜 갑자기 조를 만드시는 겁니까. 조금 전까지는 생각도 없으셨던 분이.”
진금룡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이송백을 흘겼다.
“쓸데없는 소리 지껄일 시간이 있거든 가서 검이나 한 번 더 휘둘러라. 네 아둔한 머리로 써 낸 삼류 각본에 발맞춰 줄 생각 없으니까.”
정말이지, 진금룡의 칼은 혀에도 달려 있다. 이송백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대체 진가 사람들은 어떻게 되어 먹었기에 저렇게까지 배배 꼬여 있는 걸까?
“그럼 단순히 놀리려고 하신 말씀입니까?”
“……놈이 사고를 치는 걸 막고 싶었던 것뿐이다.”
“사고요?”
“혼자 나가 뒈지는 거야 뭐라 할 수 없지. 다 큰 놈이니까. 하지만 다른 이들을 이끌고 나가서 패퇴하는 건 문제다. 놈이 제 상태를 속였기 때문에 생기지 않아도 되었을 희생자가 생기는 건 더더욱 그렇지.”
진금룡은 다시 생각해도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백천이 사라진 방향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아무리 제 발로 종남을 박차고 나갔다지만, 놈은 여전히 진가다. 놈의 멍청한 짓은 진가의 명성에 누를 끼칠 터.”
“그 일로 상처받을 동생이 걱정되시는 건 아니고요?”
진금룡이 일그러진 얼굴로 이송백을 노려보았다.
“화산 놈들과 어울리더니, 하는 짓도 닮아 가나?”
이송백은 한 발짝 물러서며 살짝 양손을 들어 보였다. 진금룡과 다툴 의사가 없다는 걸 명백히 표하는 것이다.
어쨌든 가족사에 말을 얹는 건 선을 넘은 게 맞기도 하고.
“저는 그저, 그런 방법으로는 일이 풀리지 않을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백천 도장을 설득하려면 사형께서 방법을 바꿔야 할 겁니다.”
말을 하면서도 이송백은 살짝 거머쥔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진금룡의 노기가 분명히 자신에게로 쏟아질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어진 진금룡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진금룡은 화를 내는 대신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설득이라…….”
한참 하늘을 보던 그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게 될 턱이 있나.”
“……예?”
“진동룡이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나?”
“…….”
“배알이 꼴린다고 집을 나가선 망해 버린 원수 집안에 의탁한 놈이다.”
“……아.”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어릴 때는 감정이 머리를 지배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저놈은 그 망해 자빠진 원수 집안의 꼴을 똑똑히 보고도 돌아오기는커녕 태연자약하게 그들을 구슬려 대제자 자리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이제는 심지어 그 집안의 장이 되려 하고 있어. 그게 어지간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짓 같으냐?”
이송백은 순간 아연실색했다.
그동안 딱히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확실히 진금룡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이게 뭔가……. 뭔가…….
“그런 놈을 설득한다고?”
진금룡이 코웃음 쳤다.
“애초에 그놈을 그냥 내버려 뒀을 것 같으냐? 얼러도 보고 타일러도 봤다. 심지어 원하는 게 있으면 들어주겠다고 사정도 해 보고 말 그대로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 본 적도 있다. 그런데 팔다리가 꺾인 상황에서도 차라리 죽이라고 하더군.”
이송백은 제 눈앞이 다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생각해 보면 굉장한 일 아닌가?
종남의 모든 제자를 제 성미에 맞도록 휘두르던 이가 바로 진금룡이다. 타고나길 누군가의 위에 서는 게 걸맞은 사람이다. 백천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이들도 감히 진금룡에게는 거스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백천은 그 힘없고 나약하던 시절에도 그런 진금룡의 압박에 결코 굴복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놈이 이제 와 새삼 내 말을 순순히 들을 리가 없지.”
“아니, 그럼 왜…….”
“쓸데없는 말을 했군.”
진금룡은 이송백의 의문을 자르고 평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곳으로 우선 몇이 오기로 했지?”
“본산에서 말씀이십니까? 장문인께서 혹시 몰라 바로 보내기로 한 이들 십여 명은 거의 도착했을 겁니다. 다만 천우맹과의 협의 내용이 전해지면 더 많은 이들이 올 겁니다. 그런데 그건 왜…….”
이송백이 말을 하다 말고 움찔했다.
아니나 다를까, 진금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 도착하는 녀석들을 둘로 나눠 한쪽은 내게 붙여라. 한쪽은 네가 이끈다.”
“사형, 정말로……?”
진금룡은 뻔한 의문에 대답해 주는 대신 이송백을 두고 자리를 떠났다.
* * *
“여기까지.”
“가, 가주님! 저희도……!”
“그만!”
당군악이 서릿발 같은 기세로 딱 잘랐다.
“사람을 빠르게 확보하는 것 역시 능력이라 했을 텐데.”
“으…….”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옳은 말이었다.
물론 사람을 모으는 데는 수많은 변수가 있지만, 애초에 전장에선 변수가 시시각각 숨 쉴 때마다 찾아온다. 더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사, 살았다.”
운명의 선이 그어지기 직전에야 겨우 살아남은 조걸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남들 다 갈 때 혼자 여기 남아 마당이나 쓸 뻔하지 않았는가.
“끄응.”
“조금만 늦게 올걸.”
“아! 그러게, 제가 소피 좀 보고 온다고 할 때 보내 주시지!”
하지만 그런 조걸에게 반쯤 끌려오다시피 한 화산 이대제자들의 반응은 영 좋질 않았다.
“아니, 이 새끼들아! 내가 그렇게 못 미덥냐?”
“예.”
“예.”
“예!”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말해 주면 안 될까?”
그를 제외한 나머지 오검은 몰려드는 지원자를 주체할 수 없어서 몇몇을 골라 내야 했는데…….
“왜 나만 이런 취급이지……?”
“사형, 진짜 모르십니까?”
“내가 어떻게 알아?”
“……이것도 병이지.”
이대제자들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선발된 이들은 모두 도열해라. 어서!”
“예!”
대연무장에 삼삼오오 뭉쳐 있던 조들이 당군악의 외침에 일제히 도열했다.
수는 그리 많지 않다. 화음이라는 도시 전체를 총단으로 쓰는 천우맹의 위상과 규모를 고려한다면, 고작해야 한 줌에 불과한 수였다.
하지만 그 면면은 부족한 규모를 채우고도 남았다.
‘……종남.’
도열한 이들을 쭉 둘러보던 당군악의 시선이 연무장 한쪽 구석에 선 종남에게로 가 닿았다.
‘설마 진짜로…….’
저들이 이리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예상도 못 했다. 실력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어도 언제나 철저히 자문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던 곳이 종남 아닌가?
종남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를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당군악이 뒤를 흘끗 보았다.
“맹주님.”
“예.”
현종이 당군악의 앞으로 나섰다.
모두에게 시선을 준 그는 나직하게, 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시가 급하니, 긴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천우맹의 맹주 현종. 권위를 내세우지 않기에 오히려 권위를 만들어 내는 이. 그를 바라보는 모두의 눈이 한없이 진지해졌다.
“하나만 기억하십시오. 지금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부모가 그대들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종의 목소리가 모두에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대들 역시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이며, 누군가의 형제이고 부모입니다.”
윤종이 눈을 살짝 감았다. 저 말에 어린 의미는 단 하나다.
“그러니!”
현종의 절절한 목소리가 퍼져 나간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십시오. 반드시!”
윤종이 양손을 모아 포권 하고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예!”
이윽고, 가슴에 저마다의 의기를 품은 천우맹도들이 떠오른 해를 등지며 천하 사방으로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