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8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3)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모인 이들의 면면이 주는 무게감이 대단한 만큼 꽤 길게 이어지고도 남았을 회의지만…….
“아, 할 말만 하라고! 할 말만! 그래서 돼요, 안 돼요?”
상황은 다급하고 시간은 촉박했다. 항거할 수 없는 이 두 가지 요소가 회의 중 응당 오가야 할 겉치레를 모조리 박살 내 버렸다.
“문파 단위로 움직여서 지금 상황에 대응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적들이 강북 전체로 퍼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어떻게 하자는 말씀이시오?”
“우리도 나뉘어야죠! 저들만큼 잘게!”
칠십이 개 산채를 이끄는, 그렇기에 거꾸로 문파를 칠십이 개로 쪼개는 데는 거부감이 없는 임소병이 대전제를 던졌다.
“그건 무리수입니다. 저들이야 발 닿는 곳마다 난장 피우면 끝날 일이지만, 우리는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하지 않습니까! 중원 전체에 퍼진 이들이 무슨 수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장일소의 움직임에 대응하겠습니까?”
“안 되는 이유를 찾지 말고 안 되는 걸 되게 할 방법을 찾으라고!”
“아니, 그러니까 뭘 어떻게…….”
“서로 연락하는 데 문제가 있으면 연락할 인간을 붙이면 그만이지! 개방 본단에 연통 넣어서 지원받아요! 각 조에 거지새끼 한 놈씩 붙이면 되지!”
“아!”
“개방도만으로는 즉각 대응이 어렵습니다.”
“열 개 조를 한 지역으로 보낸다고 생각하고 중심이 되는 조에 유령문도를 배치하지. 그럼 전서구가 아닌 인편도 활용할 수 있을 거네.”
“백아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빠른 영물들도 있네. 그걸 활용하는 것도 괜찮겠군.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영물과 궁도 하나가 함께 움직여야 하네.”
“아무리 그래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절강까지 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섬서에서 절강은…….”
“산채 중 적당한 몇 곳을 골라 임시지휘소로 만들면 됩니다. 지역마다 하나씩 임시지휘소를 만들고 일 차 보고를 받아 지시를 내린 후, 천우맹 본단으로 이 차 보고하는 체제를 만드시지요.”
당군악과 맹소, 그리고 임소병은 한 문파의 수장 자리를 골패(骨牌) 노름으로 딴 게 아님을 증명하듯 순식간에 필요한 요소들을 채워 냈다.
그리고 그들의 노련함과 젊은이들의 패기가 더해진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각 조에 이번에 교육한 의원들을 대동시켜야 해요!”
“으음, 벌써 말이냐?”
“무조건요.”
“하지만 필요한 교육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텐데.”
“의술에 끝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백배 나을 테니 아쉬워도 어쩔 수 없어요. 처음부터 배우는 이들보단 당가 사람이나 의술을 알던 이들을 우선적으로 배치하면 될 거예요!”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의견을 나누면 더 좋은 방도가 나올지 모르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짧은 실랑이를 나눌 시간조차 아깝다.
“그럼 그렇게 하지. 지금 당장 개방과 유령문에 상황을 전하고 지원을 요청하시오.”
“예, 부맹주님!”
당군악이 단호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어느 문파가 갈 것이오?”
“남궁입니다!”
“해남이 갑니다!”
“자, 잠시만요. 빙궁은 마땅히 지원해 드릴 만한 구석이 없으니, 이건 당연히 저희 빙궁을 보내 주셔야죠!”
젊은 문주가 이끄는 문파들은 하나같이 그 혈기가 대단했다.
하지만 당군악은 냉철했다.
“녹림왕!”
“네.”
“선별하시오.”
“남궁도 해남도 안 됩니다.”
“녹림왕!”
남궁도위가 발끈하여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임소병은 그런 그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어느 문파가 강한가, 어느 문파가 더 간절하고 의욕이 있는가 따위는 지금 중요하지 않습니다. 각 조는 많아 봐야 십여 명으로 구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중시해야 할 건…….”
“조장이로군.”
“네.”
임소병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 있는 조장의 수만큼 조가 구성될 겁니다. 해남과 남궁에는 인력이 부족합니다.”
“비, 빙궁은요?”
“지리도 모르는 이들이 어떻게 조를 이끕니까?”
“아…….”
설소백이 안타까운 얼굴로 탄식했다. 임소병이 말을 이었다.
“화산과 당가를 중심으로 십여 개 조를 짜고, 각 문파에서 한두 개의 조를 추가적으로 지원받는 게 옳습니다.”
당군악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과 당가는 천우맹의 중심이다. 그 두 문파가 이번 파견의 중심에 선다면 당연히 화음의 방비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종남의 지원까지 받게 된 이상 이 이상의 방안은 없다. 자명한 사실이었다.
“맹주님.”
대충 정리가 끝나자 현종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럼 그리…….”
“그럼 종남도 한 개의 조 정도는 지원해도 되겠습니까?”
순간 모두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굳은 얼굴로 비장하게 선 이송백이 있었다. 진금룡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 입 다물어라, 이송백.”
“이 소식을 들으면 종남에서도 반드시 나서려는 이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을 이곳에 묶어 놓느니 차라리 제 뜻을 펼치게 두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네가 그러고 싶은 건 아니고?”
진금룡이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봤지만, 이송백은 대답 없이 침묵했다. 진금룡의 입가에 찬 비웃음이 어렸다.
“화산을 욕할 처지도 아니었군.”
“사형.”
“마음대로 해라. 머저리 놈을 사람 만들겠다고 설치는 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지. 머저리는 머저리답게 굴면 돼.”
비난과 힐난, 비웃음이 모두 어린 말이었지만, 이송백은 되레 환히 웃었다. 이 성격 나쁜 사형을 잘 알기에 그 속에 숨어 있는 허락의 뜻을 알아들은 것이다.
“하면 종남도 함께하겠습니다.”
당군악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러니까…….’
화산에 당가에…… 남궁과 해남, 거기에 종남까지.
그 다섯 문파가 각각 조를 짜면 의료대와 개방이 따라붙고, 유령문과 녹림이 지원한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뭐 이런 끔찍한 잡탕이.”
엉망진창이다.
애초에 연맹이라고 할 수도, 문파라고 할 수도 없는 구성이다. 그냥 가능한 인원을 되는 대로 쏟아붓고 제멋대로 잘라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명이 그런 당군악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씨익 웃었다.
“이게 가장 합리적인 결과라는 건 분명해 보이는데요?”
한 번씩 저 웃는 입을 좌우로 콱 당겨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당군악이 끄덕였다.
“거기에 ‘이 촉박한 시간 내에 마련 가능한 방안 중’이라는 말이 붙는다면…… 인정하지.”
한숨을 푹 내쉰 당군악이 현종을 돌아보았다.
“맹주님.”
“승인하네.”
현종은 단 한 치의 주저함 없이 대답했다. 그가 지금 해 줄 수 있는 건 쓸데없는 허례를 줄여 주는 것밖에 없다.
“다만, 조를 짜는 데 있어서 그 힘이 약해서는 안 될 것이네. 피해를 줄이자고 하는 일에 되레 피해를 입을 수는 없으니.”
당군악이 날카롭게 모두를 훑어보았다.
“잘 들으셨는가?”
“예.”
“그럼 조는 어떻게 짜면 되겠습니까?”
백천의 물음에 당군악이 차게 대답했다.
“그걸 왜 내게 묻지?”
“예?”
“나서고 싶은 이는 알아서 조를 짜 오게. 적절한 사람을 모아 제 밑으로 끌어들이는 것 역시 조장의 능력일 테니.”
그 말에 몇몇 이들의 얼굴이 결연해졌다.
“한 조의 수는 최소 다섯. 거기에 개방도와 의원, 상황에 따라서는 야수궁의 궁도가 따라붙을 걸세. 다섯은 넘되 다 하여 열은 넘지 않도록 짜 오게. 한 사람이라도 많을수록 위험이 줄어든다는 것을 잊지 말고.”
“예!”
“기다리지 않겠네. 조건은 둘. 내가 인정할 만큼 충분한 전력을 갖추었을 것. 그리고 신속할 것. 먼저 오는 순서 대로 먼저 심사해 승인 여부를 결정하고, 내가 생각한 조의 수가 다 차는 순간 그 뒤는 심사도 없이 탈락일세.”
당연한 말이다.
종남의 지원을 받았다고는 하나, 화음의 전력을 대책 없이 마구 뺄 수는 없다.
그러니 최대한으로 허락한다 해도 내보낼 수 있는 전력은 삼 할을 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안에 대해서만은 그 어떤 협의도, 조율도 받지 않을 것이었다. 당군악의 진지한 얼굴을 보며 모두가 짧게 대답했다.
“예, 부맹주님!”
“가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걸이 획 제 사형제들을 돌아보았다.
“우리는 고민할 것 없……! 엥? 사, 사형? 사숙?”
하지만 그를 제외한 오검은 이미 몸을 돌려 회의실을 뛰쳐나가고 있었다.
“아니, 사형! 어딜 가는 겁니까?”
“당연히 조를 짜러 간다.”
“우리끼리 짜면…….”
조걸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힘을 집중시킬 때가 아님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강한 사람이 있다면 한데 모이기보다는 조장의 역할을 하는 게 훨씬 이득이다. 양민들을 위해서라도.
하지만 그건 다시 말하자면…….
“……내가 조장?”
그를 믿고 목숨을 걸어 줄 이를 최소 다섯은 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
조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사, 사형! 같이 갑시다! 사형 조에 저 좀 끼워 주십시오! 사형!”
* * *
아침을 맞은 화음은 들쑤신 벌집처럼 난리가 났다.
“사형! 저 데리고 가십시오! 저!”
“사파 놈들이랑 싸우러 간다면서요! 제가 안 가면 누가 갑니까?”
강북으로 파견될 이들을 모집한다는 소식에 천우맹 전체가 들썩이고 있었다.
불길하다며 슬그머니 엉덩이를 빼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잘 벼려 놓은 검을 즉시 챙겨 들고 나섰다.
“한 조 더 합시다!”
“전력이 강해야 한다지 않는가? 두 조면 된다!”
“남궁이 안휘에 가는 건데 고작 두 조가 말이나 됩니까? 무조건 한 조 더 해야 합니다.”
그 와중에도 문파 간의 이해관계가 얽혀들었다.
“사고! 저 꼭 데리고 가십시오!”
“사매! 저를 잊지는 않으셨겠죠? 응?”
“스님! 저번에 제가 고기 챙겨 드렸잖습니까?”
“어허! 나는 술 드렸어, 술! 고기야 대충 짐승 때려잡으면 나오는 건데 당연히 술이 훨씬 중하지! 애초에 이 양반은 혼자서도 종종 사냥 나가시잖아?”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오신 겁니까, 스님?”
손쉽게 다섯을 채우고 더 몰려드는 지원 때문에 누구를 뺄지 한참 고민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나, 나랑 같이…….”
“히이이익!”
“사, 사숙! 저하고 같이!”
“퉤엣!”
……조걸처럼 사람을 구하는 데 한참 고생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수많은 조가 실시간으로 조직되어 가는 건 확실했다.
“다섯이요?”
“그래.”
“조금 더 많은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사형 생각이 그러시다면. 걱정 마십시오. 반 각이면 됩니다.”
“그거면 되겠느냐? 다섯을 모으는 게 쉽지 않을 텐데.”
“뭔 소리십니까, 사형? 반 각이나 걸리는 건, 같이 가겠다는 놈 중 나은 놈을 선별하는 데 걸리는 시간입니다. 그냥 마구잡이로 끌어모으면 숨 한 번 쉬기도 전에 채울 수 있습니다.”
“……그래?”
“참나. 사형은 한 번씩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화산의 장문대리가 가는 건데 당연한 일 아닙니까!”
백상의 말에 백천이 쓰게 웃었다.
“그래. 어쨌든 서둘러 다오.”
“예!”
백천의 지시를 받은 백상이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백천이 한숨을 작게 내쉴 때였다.
“멍청한 건 불치로군.”
움찔한 백천이 뒤를 돌아보았다.
동경을 보는 것처럼 익숙하지만, 또한 한없이 낯선 얼굴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차피 탈락할 조따위 뭐 하러 만드는 거지?”
“시비 걸러 왔으면 꺼져. 상대해 줄 시간 없으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동생아?”
진금룡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그 반대란다.”
“뭐?”
“조장으로서의 너는 쓸모없지만, 조원으로의 너는 아직 쓸모가 있지. 어떠냐? 내 조에 들어오지 않겠느냐?”
백천의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