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7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2)
당황한 사람은 으레 여러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딱 굳어 할 말을 잃기도 한다.
지금 회의실 안에 있는 이들이 꼭 그런 상황이었다.
‘뭐야?’
‘쟤가 여기서 왜 나와?’
‘종남?’
여기저기서 희미하게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나마 다행이라 할 만한 건, 모두 진금룡을 보느라 바빠 체통 없이 입을 쩍 벌린 현종의 얼굴을 본 이가 거의 없단 것 정도였다.
“그…….”
그때, 이 미치도록 어색한 충격을 깨 줄 이가 나타났다.
저벅. 저벅.
진금룡의 뒤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차갑다 못해 한기가 흐르는 진금룡과는 달리, 인상이 퍽 부드러웠다.
사내는 화산 사람들을 보며 반갑게 웃더니 현종을 향해 포권 했다.
“종남 말학 이송백이 맹주님을 뵙습니다.”
“헐.”
“이 소협?”
“반갑습니다, 화산 분들.”
이송백이 겸연쩍은 듯 웃었다.
“이렇게 빨리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진금룡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이송백이 찔끔하며 슬쩍 한 발짝 물러섰다.
“사적인 대화를 나눌 만한 자리는 아닌 것 같군요.”
“흠.”
진금룡이 다시 앞을 보기 무섭게 백천이 일갈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얼굴을 들이밀어?”
“사제는 너희와 같이 싸움박질까지 했다는데, 내가 못 올 이유가 있나?”
“이, 이 소협은 이 소협이고! 너는……!”
“너?”
진금룡이 오만하고, 서늘하고, 더불어 재수 없어 보이는 세 가지 효능의 미소를 지으며 백천을 쏘아보았다.
“화산 놈들은 버르장머리가 없는 게 문훈(門訓)이라도 되는 건가? 형보고 너라니.”
“누가 형이야! 너 같은 형 둔 적 없다!”
백천은 숫제 뒤로 넘어갈 기세였다. 윤종이 얼굴을 두 손으로 푹 감쌌다.
잠시나마 저 인간에게 존경심이 들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럽다. 어떻게 저 나이 먹도록 열 살 먹은 애들 드잡이하는 것처럼 형과 싸울 수 있단 말인가?
“왜 왔는데?”
“설마 내가 내 자의로 화음에 발을 들였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여전히 멍청하구나.”
“여기서 누가 널 부르는데! 어느 미친놈이 화음에 종남을 부르는데!”
“나.”
“…….”
“내가 불렀는데?”
“아.”
백천이 금세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쟤는 미친놈이 맞지. 그것도 예사 미친놈이 아니지.
그 모습에 진금룡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품위라는 건 대체 언제 가질 셈인지.”
그러자 청명이 툭 내던지듯 말했다.
“됐고. 그 재수 없는 면상 적당히 돌려 놓고 거기 어디 앉아.”
진금룡의 입꼬리가 못마땅하게 일그러졌다.
“재수 없는 얼굴? 생긴 건 네 사숙과 별다를 것 없을 텐데?”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
진금룡이 뭔가 인정한단 얼굴로 앉았다. 모두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쟤는 대체 왜 이 말에 납득하는 걸까?
현종과 당군악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이송백이 조심스레 건넨 사과에 현종이 격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불쾌할 리 있겠소이까? 그저 조금 당황한 것뿐이외다.”
“저희도 뭐라 말씀드리기가 민망합니다. 그저 빠르게 책임자를 화음으로 보내 달라는 전갈을 받고 바로 뛰어온 참이니까요.”
“……전갈을요…….”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예, 몇 번째 말씀드립니다. 제가 보냈어요.”
“……왜?”
“왜라뇨?”
청명이 진금룡을 향해 턱짓했다.
“전력이 부족하시다면서요. 지금 동원할 수 있는 전력 중에 종남보다 나은 곳이 있나요?”
……없지. 절대 없다.
굳이 ‘지금 동원할 수 있는’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아도, 종남보다 나은 전력 같은 건 천하를 다 뒤져 봐도 손에 꼽는다.
“그렇긴 한데…….”
현종이 말끝을 흐리며 눈을 끔뻑였다.
왜 허락도 없이 종남을 불렀냐는 등의 말 따윈 하고 싶지도 않다. 애초에 저 망할 놈이 허락 없이 일을 저지른 게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문제는 저들이 다른 문파도 아닌 종남이라는 점이다.
종남은 당당히 구파일방에 속해 있다. 아니, 속해 있단 말로도 부족하다. 구파일방의 기둥 중 하나로 봐야 하는 문파다.
한데 그런 이들이 청명이 보낸 전갈 하나 받고 천우맹의 본산인 화음으로 쪼르르 달려오는 건 아무리 봐도 이상한 상황 아닌가?
“생각보다 빨리 왔네?”
청명의 말에 진금룡이 으드득 이를 갈아붙였다.
“……일을 저지르는 것까지는 내 알 바 아니나, 집 안에서 불놀이를 하고 싶었다면 옆집에 불똥은 튀지 않도록 조심했어야지. 기본이 아닌가.”
“뭐라는 거야? 남의 집에 와서 불놀이하고 재물까지 빼 간 인간이 기본을 논하네?”
“……옛일이다.”
“근데 이 새끼가? 오늘 영영 뒈지고 싶냐?”
청명이 발끈해 일어나려고 하자 조걸과 당소소가 얼른 청명을 잡고 늘어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지금 사이가 서먹한 윤종마저도 일단은 청명을 잡고 늘어졌다.
“후욱! 후욱! 생각하니 또 열받네?”
아니……. 그렇게 열받아 할 거면서 쟤들을 왜 불렀냐고.
그때 말없이 사태를 지켜보던 임소병이 헛웃음을 흘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녹림왕?”
“그렇네요. 이거…… 그러고 보니 상황이 참, 우리 산채 갈아엎으려다가 옆 산에도 불 지른 형국이군요, 이게.”
“그게 뭔 말입니까?”
“우리가 화음에 천우맹의 총단을 만든 게 아닙니까.”
“그렇지요.”
총단이라고 해 봐야 마을. 아니, 도시의 형태에 가깝지만 어쨌든 총단은 총단이다.
“그 총단이 저 사패련의 제 일 목적이 된 상황이고.”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사패련이 화음을 치면서 종남이 있는 서안은 그냥 관광만 한 뒤 돌아가겠습니까?”
“……아.”
“그러네?”
“이미 사천을 치면서 눈에 띄는 대문파를 다 짓밟아 버린 전과가 있는 놈들입니다. 화음을 노린다면, 당연히 그다음 차례는 서안이 되겠지요.”
“아…….”
모두가 잠깐이나마 종남에 미안한 마음을 품은 순간이었다.
“쌤통이군.”
“…….”
“…….”
“걸아.”
“……예, 사형.”
“그냥 내가 장문인이 되는 게 낫지 않을까?”
“저도 심각하게 고민 중입니다.”
진금룡에게 주먹 감자를 날리는 백천을 보며 화산 놈들이 머리를 싸매었다. 화산을 흥하게 할 인재일지는 몰라도, 저 인간이 화산 장문인이 되는 순간 종남과의 관계는 끝장에 파국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임소병이 한숨을 쉬듯 말했다.
“놈들의 진격 방향에 따라서는 오히려 화음보다 서안이 먼저 공격받을 수도 있겠지요.”
진금룡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그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청명과 백천을 쏘아보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
“당장 종남산으로 와서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려도 모자랄 판국에…… 서찰 하나 던져 놓고 사람을 예까지 찾아오게 만들어?”
“어쩌라고?”
“그럼 꺼지시든가. 안 잡아, 안 잡아.”
청명과 백천이 동시에 마주 보며 낄낄 웃어 대었다.
천우맹의 다른 문주들은 조용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창피했다.
“이…….”
“하하하핫! 진정하십시오. 사형!”
진금룡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붉으락푸르락하자 이송백이 잽싸게 나섰다. 그리고 진금룡에게 심호흡하게끔 한 후 얼른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쨌든 저희 역시 그런 상황을 아는지라 장문인의 우려가 무척이나 큽니다.”
“으음.”
“그렇게 우려가 되면 직접 왔어야지, 애들을 보내? 아직 덜 급한가 본데?”
중요한 자리에 애들을 보냈다고 힐난하는 쥐똥만 한 애새끼가 여기에 있다. 이송백의 두 눈에서 영혼이 빠져나갔다.
“네가 할 말은 아냐.”
“……화산만은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양심 좀 있어라.”
그나마 그를 대변해 주는 오검이 있어 다행이었다.
“장문인께서도 직접 오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셨던 건 아닙니다. 다만…… 아시다시피 종남은…….”
“구파일방이지요. 아직은 확실히.”
“아직은이 아니라. 앞으로도.”
진금룡이 싸늘하게 선을 그었다.
“예. 그렇지요, 그럼요.”
진금룡의 살벌한 반응에 임소병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송백은 없는 말솜씨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사, 사형께서는 평소에도 같은 말을 해도 다소 험하게…….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오해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천우맹이 싫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의미입니다.”
오검은 알 수 없는 서글픔을 느꼈다.
‘어디서 많이 보던 광경인데.’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구나.’
‘저쪽도 고생이네.’
이송백이 식은땀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여하튼 종남의 입장은…….”
“거두절미하고.”
“예.”
청명의 말에 이송백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본론을 꺼냈다.
“천우맹과 한배를 탈 수는 없지만, 섬서로 쳐들어올 이들에 대해서는 공동전선을 펼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웃기고 있네.”
청명이 피식 웃었다.
“협상도 급이 맞는 이들끼리 해야지. 여기 모인 문파가 몇인데, 종남 따위가 대등하게 협상하려고 해?”
“종남 따위?”
진금룡이 눈을 부라렸다. 백천이 재빨리 나서서 청명을 나무랐다.
“청명아! 표현을 조심하거라. 종남 따위가 아니라, 어디 종남의 이대제자 따위라고 해야 옳다.”
“아, 그런가?”
청명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진금룡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대체 이것들은 뭘 처먹고 자랐기에 이렇게까지 겁대가리가 없는 건가?
그리고 이곳의 모두는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진금룡이 보기에도 하나같이 쟁쟁한 이들인데, 왜 이 천둥벌거숭이들이 설치는 걸 가만히 내버려 두는 거고.
“공동전선이라…….”
당군악이 턱을 가만히 매만지다 입을 열었다.
“그 말은, 사패련이 화음을 공격해 올 때 종남이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예. 다만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반대의 경우는 생각할 것도 없다.
아무리 종남이 밉다지만, 눈앞에서 사파의 공격을 받는 걸 내버려 둘 수는 없을 테니까.
현종과 당군악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거…….
“저희는…….”
“개소리하지 마시고.”
그 순간 청명이 재빨리 둘의 말을 잘라 버렸다. 아직 요구할 게 더 남았으니까.
“그러려면 못해도 종남의 절반 이상은 화음에 와 있어야 한다고 전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막상 사패련이 화음으로 쳐들어왔는데 너희가 손가락 빨고 구경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있어?”
“종남이 그럴 문파로 보이는가?”
“아니. 너희들은 손가락 빨고 구경만 한 게 아니라 같이 와서 불도 지르고 도둑질도 했잖아. 양심도 없는 새끼들아. 생각하니 또 열받네, 이 새끼들!”
“아, 진정 좀 하라고!”
“이럴 거면 왜 불렀냐고!”
“검에 손대지 마라! 내가 말했다. 검에서 손 떼라!”
청명이 난동을 부리고 주변에선 그를 진압하는 동안, 진금룡은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으니 그냥 외면해 버리는 모양이었다.
뻔뻔하고 우스운 태도지만, 무조건 부정부터 하던 과거에 비하면야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이송백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급히 온 터라 저희에겐 그걸 결정할 권한까지는…….”
“그렇게 하지.”
하지만 진금룡은 이송백의 말허리를 툭 잘라 버렸다.
“오래 말 섞고 싶지 않으니까 제안대로 하겠다.”
“사형. 그건…….”
“내 권한으로 그 정도는 가능하다. 불쾌한 화산 놈들의 얼굴을 마주 봐야 하는 건 짜증 나지만 그건 우리가 참아 주지.”
“터진 입이라고, 저게.”
백천이 발끈했다. 청명은 현종과 당군악을 보며 씨익 웃었다.
“어때요? 그럼 얼추 해결된 겁니까?”
현종과 당군악의 얼굴이 순간 복잡 미묘해졌다.
상황이 이리될 줄 알고 부르진 않았을 텐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종남과 연합할 생각을 한 거냐? 지금 화음에 종남을 들이는 게 과연 옳은 거냐?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실타래처럼 엉켰지만, 결국 이 순간 해야 할 대답은 오직 하나다.
“좋다!”
“허락하지!”
화산과 종남의 임시동맹이 전격적으로 체결되었다.
영원히 없을 것 같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