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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45화 (1,546/1,567)

1545화. 그걸로 좋지 않으냐? (5)

조걸은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익숙한 윤종의 얼굴이 아니다.

항상 옅은 미소를 짓고 있어서 마냥 사람 좋아 보였는데, 얼굴을 굳힌 지금은 서늘함마저 느껴졌다. 차마 그 앞에서 쉬이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윤종아.”

조걸 대신 백천이 한숨처럼 윤종을 불렀다. 설득해 보려는 것이다.

“불가합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임소병의 단호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임소병은 냉랭한 얼굴로 윤종을 노려보았다.

“윤종 도장은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계신 겁니까?”

“물론입니다.”

“아니, 이해 못 하신 것 같습니다.”

임소병이 서슬 퍼런 목소리로 일갈했다.

“지금 천우맹이 움직이는 건, 사패련이 가장 원하는 바입니다. 지금 적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 주겠다는 겁니까?”

“…….”

“우려되는 마음은 압니다. 하지만 지금 움직이는 건 절대 좋은 수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화음을 지키는 겁니다.”

모두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음에는 우리의 전력과 지켜야 할 것이 모두 모여 있습니다. 우리가 전력을 분산시키는 순간, 패군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을 공격할 겁니다. 실낱같은 틈이라도 비집고 들어와 산산이 부수려 들겠지요.”

“그렇지.”

당군악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전력을 뺄 수 없습니다. 그게 단 한 사람이라고 해도.”

임소병의 표정은 드물 만큼 차가웠다. 그 어떤 논리든 호소든 일절 듣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느껴졌다.

공식적인 직함이 없다고 해도, 그는 명백히 천우맹의 군사이다. 또한 녹림이라는 거대 문파의 우두머리다.

화산의 일개 이대제자가 감히 맞상대할 수 있는 이가 아니다.

게다가 지금 녹림왕은 필요하다면 힘을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기세였다. 한 연맹의 향방이 고작해야 사형제 간의 미묘한 다툼 때문에 일그러지는 것을 좌시할 순 없다.

그러나 그 모든 압박을 받으면서도 윤종은 여전히 담담했다.

“그게 제가 가지 않아야 할 이유입니까?”

“예.”

“그건 제가 가지 않아야 할 이유가 아닙니다. 천우맹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이유지요.”

“윤종 도장.”

“언제까지 이곳만 지키면 되겠습니까?”

윤종의 조용한 목소리가 침묵뿐인 공간에 울렸다.

“사람이 죽고, 마을이 불타고, 한 해 동안 피땀 흘려 일군 것을 모조리 약탈당하는 이들이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데,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겠습니까?”

“…….”

“칠 주야입니까?”

“도장.”

“아니면, 한 달입니까?”

“장일소는 반드시 움직입니다. 그때면…….”

“그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모든 곳에 남아나는 게 없어지더라도 이 화음만 지키겠다는 뜻입니까?”

임소병이 입을 닫았다.

장일소는 움직인다. 그에게는 확신이 있다.

하지만 그 확신을 타인에게 납득시키기란 불가능하다. 세상엔 만에 하나라는 게 있고, 무엇보다 그가 장일소의 움직임을 완전히 읽을 수 있다고 말하는 건 그저 오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윤종이 말을 이었다.

“이유를 물으셨습니까?”

“…….”

“그럼 대답해 드리지요.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판에 박은 듯한 말이다. 임소병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도장. 그런 뻔한 말을…….”

“뻔한?”

윤종의 목소리가 싹 일변했다. 날카롭고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윤종은 청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가 대답해라.”

“사형!”

당황한 조걸이 말리려 들었지만, 윤종은 시선조차 주지 않고 청명만을 쏘아보았다.

“내가 하는 말이 뻔한 것이더냐?”

청명은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대답해.”

윤종이 다시 재촉하고서야 청명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녹림왕의 말에 틀린 건 없어.”

“…….”

“안타까운 마음은 이해해. 사형은 그런 사람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움직일 때가 아니야. 차라리 개방이나 유령문을 이용해 사람들을 화음으로 끌어모으는 게 나아. 이곳은 비교적 안전하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윤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네 대답이냐?”

“사형.”

조걸은 어떻게든 중재를 해 보려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조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고, 심지어는 둘 사이에 끼어들었던 임소병도 이번엔 잠잠했다.

임소병이 침묵을 택한 건, 지금 이 일이 단순한 사형제끼리의 감정싸움이 아님을 느꼈기 때문이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윤종이 나직이 말했다.

“궁금해지네.”

단호하고도 싸늘한 질문이었다.

“그럼 왜 지금껏 구파를 그리도 욕해 왔느냐?”

“윤종아!”

백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건 선을 넘은 발언이지 않은가. 하나 청명은 백천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딱 잘라 답했다.

“비교할 걸 비교해. 우리가 지금 우리만 지키자고 이러고 있는 게 아니잖아.”

“그럼 누구를 더 지키지?”

“화음에 있는 모두. 그리고 강북에 있는 양민들. 모두…….”

“강남은?”

“뭐……?”

윤종이 차갑게 일갈했다.

“강남에 있는 이들은? 가장 고통받던 이들은 바로 그들일 텐데?”

“뭔…….”

청명은 저도 모르게 황당한 소리 그만하라고 막말을 하려다 삼켰다.

지금 강북을 논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왜 강남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기억하고 있어?”

“……무엇을?”

“장강에서 우리가 만인방에 패하고 강남을 통째로 내놓는 조약을 맺었을 때, 우리는 사흘 밤낮 잠을 못 이뤘다.”

장강참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모두가 얼굴을 굳힌다.

청명 또한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괴로워했던 건, 패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가 없는 곳에서 강남의 수많은 이들이 어떤 고통을 받을지 알았기 때문이지. 그들을 지켜 내지 못했다는 자괴감은 사파에게 패했다는 패배감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끔찍했어.”

몇몇 이들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공감할 이야기였다.

“청명이 네가 가장 잘 알 거다. 그때 가장 힘들어했던 건 다름 아닌 너였으니까.”

청명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눈빛만은 한없이 어둡게 가라앉고 있었다.

“한데…….”

윤종이 모두를 슬쩍 돌아보고는 다시 청명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지금은?”

“…….”

“고통스러우냐?”

지독한 침묵이 대전 안에 내려앉았다.

“이상한 일이지. 그들이 겪는 고통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전쟁을 앞둔 지금은 그때보다 배는 심해졌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강남의 사람들이 받을 고통에 신경을 쓰지 않아.”

“윤종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윤종은 심지어 현종의 말마저 잘라 버렸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힘이 부족하니까.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그러니 참을 수밖에 없었지. 그런데…….”

윤종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그런가?”

입가에 냉소가 어렸다.

명백히 자조 섞인 웃음이나, 지켜보는 이들에 대한 비웃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만큼 윤종의 말이 모두의 가슴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서 물러났다. 그러니 강북만은 확고히 지키고자 했지. 그런데 이제는 강북 사람들이 고통받는 걸 다시 외면해야 한다고. 왜?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조걸은 저도 모르게 청명의 눈치를 살폈다. 그 어떤 표정도 없는 얼굴에선 도무지 생각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강남을 내어 주고, 강북을 내어 주고, 또 힘이 모자라면 화음마저 내어 주겠지? 그 뒤에는? 그러고도 힘이 부족하면 어쩌실 생각이지? 그때는 천우맹이고 뭐고 화산만 지킬 거냐?”

“윤종아!”

“이상하지요.”

윤종이 현종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이를 지켜보던 조걸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윤종이다.

유이설과 더불어 화산에서 가장 현종을 믿고 따르는 윤종이 지금 현종을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다.

“다 맞는 말입니다. 무엇 하나 틀린 게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그 옳은 말이 지금껏 우리가 그리도 극렬하게 틀렸다 외치며 부정했던 것과 닮아 있지 않습니까?”

“사형. 이제…….”

“제가 아직 미숙해 그리 느낀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저보다 뛰어난 이들이니, 당연히 다른 생각이 있을 거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모두 모여 내놓은 결론이 결국은 ‘누가 죽어 나가든 거북이처럼 여기서 웅크린 채 기다리자’입니까?”

“사형!”

청명이 더는 못 들어 주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함부로 말하지 마. 여기에 양민들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지금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패하면…….”

청명이 순간 말끝을 흐렸다. 그러더니 이내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가 조금 전 하려던 말이 과거에 그가 들었던 말과 섬뜩할 정도로 같았기 때문이다.

청명은 그의 앞에서 이 같은 뜻을 설파하던 법정을 비웃고 힐난했다. 그때의 모든 말이 지금 청명에게 되돌아오고 있다.

자가당착.

지금 그들의 목을 죄어 오는 것은 그의 논리였고, 그의 협이었으며, 또한 그의 행적이었다.

천우맹을 여기까지 이끌고 온 모든 것이 지금 그의 선택에 서슬 퍼런 칼을 들이밀고 있는 셈이다.

“같은 생각을 해 달라고 하지는 않는다. 사람의 생각은 저마다 다르니까. 하지만 내게 그 선택을 강요하지는 마라.”

“뭘 위해서?”

잠자코 듣던 백천이 윤종을 노려보며 물었다.

“고작해야 너 하나다. 네가 가서 뭘 할 수 있다는 것이냐? 네가 말하는 그 협의로, 그 정당함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냐? 사람 몇 구하는 것으로 자기 위안이라도 삼을 셈이냐?”

“백천아, 말이 과하구나!”

현종이 다급하게 중재하려 했지만 윤종은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사숙의 말씀대로, 저 혼자로는 누구 하나 구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멍청한 짓에 불과하다고 손가락질이나 받을 수도 있겠지요.”

윤종이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증명할 수 있겠지요.”

“증명?”

“거짓이 아니었음을.”

윤종의 시선이 다시 청명에게로 향했다.

“지금껏 우리가 해 왔던 모든 게 그저 힘을 가진 자의 유희가 아니었음을. 우리가 내밀었던 손이 내 모든 것을 지킨 뒤에 선심 쓰듯 내미는 동정이 아니었음을.”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제 허리에 찬 검을 움켜잡았다.

“또한, 지금껏 우리가 행한 모든 일이 그 뒤에 돌아올 이득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설령 잃을 것밖에 없다고 해도 그 길을 걸어갈 각오가 있기에 내 손에 검이 들려 있음을!”

청명은 말이 없었다. 그저 윤종이 움켜쥔 매화검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시선은 매화검에서, 윤종이 입은 무복으로, 왼쪽 가슴에 새겨진 작은 매화로, 그리하여 마침내 윤종의 얼굴로까지 옮겨 갔다.

윤종이 청명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똑똑히 말했다.

“그게 지금껏 제가 화산에서 배운 것입니다.”

청명은 눈앞이 아득해진 사람처럼 눈을 내리감았다. 속눈썹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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