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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44화 (1,545/1,567)

1544화. 그걸로 좋지 않으냐? (4)

“불태워라!”

“남김없이 죽여라!”

장강 근처의 한 마을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난데없는 횡액에 소스라치게 놀란 양민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달아났지만, 마을을 덮친 이들은 두 눈을 광기로 번뜩이며 끝끝내 쫓아가 등에 칼을 꽂았다.

여기저기서 비명과 애원,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아아아악!”

“부인!”

제 아내의 가슴을 뚫고 나온 칼을 보며 한 사내가 슬픔과 분노로 비명을 질렀다. 악을 쓰며 악도들에게 달려들었지만, 분노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대들이었다.

서걱!

단번에 목이 달아나고 만 남편의 시체가 힘없이 고꾸라졌다.

“강북 놈들은 겁대가리가 없나?”

목을 대번에 쳐 낸 사내, 이곤(李堒)이 칼에 묻은 피를 털며 낄낄 웃어 댔다.

그의 주변엔 아비규환이라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 광경이 펼쳐져 있다. 불타는 집들과 사방에서 흩뿌려지는 피, 그리고 비명을 내지르며 이리저리 달아나는 사람들.

이곤은 느리게 입술을 핥았다.

‘오랜만이군.’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고, 눈이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사파가 지배하는 강남에선 이런 일이 흔하게 벌어지지 않냐고 묻고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장일소는 사파들이 양민들에게 손을 대는 것을 철저하게 금지했다.

물론 인정이 넘쳐 그런 건 아니다. 양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사패련의 배를 불릴 이들이라 그런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 대가를 나누지 못하는 계급 낮은 사파인들의 불만은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곳, 강북에서는 아니다.

주야장천 감시하는 사패련의 눈도 없고, 지시를 어겼다고 손목을 자르고 배에 달군 인두를 쑤셔 박아 버리는 그 짐승 같은 만인방 놈들도 없다.

무엇 하나 참을 필요 없이 마음껏 날뛸 수 있다는 의미다.

“퉤! 거지새끼들도 아니고, 집에 곡식 자루 하나 없네.”

그와 함께 조를 짠 몇몇은 눈이 벌게져선 재물을 찾아다니고 있다. 그러나 이곤은 재물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상식적으로, 이런 시골에서 땅이나 파먹는 놈들에게 무슨 대단한 재물이 있겠는가?

“위로 더 올라가면 돈깨나 쥔 놈들도 나오겠지.”

“흐흐. 정말 강북에서 얻은 것은 우리가 가져도 되는 거겠지?”

그의 조원은 상부의 말을 완전히 신뢰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패군의 이름으로 약조했으니 의심하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이곤은 어쨌든 그런 약속이나 재물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

설령 모든 게 거짓이었다고 해도, 숨 막히는 강남을 지키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적당히 죽였으면 이동하지.”

“좋지.”

마을을 전소시킨 이들이 북진하기 시작했다.

이곤은 얼굴에 튄 피를 소매로 거칠게 훔쳤다. 실로 오랜만에 맡은 피 냄새다.

그의 눈이 점점 더 짙은 광기로 물들고 있었다.

* * *

“방장!”

법계가 황급히 문을 열어젖혔다.

“자, 장강 곳곳에 사패련이 상륙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지그시 감겨 있던 법정의 눈이 느리게 뜨였다.

“최대한 지원을 요청하고 있지만, 중소 문파들이 대부분 호북과 섬서로 몰려 있는 터라 장강을 완전히 틀어막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이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해도 장강을 막는 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 길고 넓은 장강을 사람의 힘으로 어찌 다 감시한단 말인가?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어, 어떻게든 수를 내야 합니다!”

“음.”

하지만 다급한 법계의 외침을 제대로 듣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울 만큼 법정의 안색은 평온했다.

“확인해 보았느냐?”

“예?”

“내가 확인해 보라 한 것 말이다.”

잠시 마른침을 삼킨 법계가 입을 뗐다.

“그게…… 정확히 확인된 바는 아니나, 지금 상륙을 시도하고 있는 이들의 무위는 그리 높지 않은 것 같습니다.”

법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석(死石)이란 말이구나.”

“방장! 물론 저희에게는 잡졸에 불과한 이들이지만, 양민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벌써 몇 개의 마을이 불탔다 합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입니다. 대책이 필요합니다!”

다급한 마음에 법계가 언성까지 높였다. 그러나 법정은 느리게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예? 그게 무슨…….”

“장가계의 만인방이 움직였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너도 알고 있지 않더냐?”

순간 법계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장강에서 난동을 부리는 사파는 고작해야 잡졸. 아니, 사파보다는 차라리 흑도(黑道)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게 걸맞을 무뢰배에 불과하다.

장강이 비어 있는 틈을 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고는 있지만, 제대로 된 전시였다면 그저 머릿수나 채우고 이렇다 할 전력도 되지 않을 것들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사패련의 제대로 된 전력은 지금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가 저들을 상대하겠다고 움직이는 순간 사패련이 북상할 것이다. 뻔한 일이 아니더냐?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 된다.”

“하, 하지만, 방장. 그랬다가는…….”

“그래. 피해가 크겠지.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법계가 동조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라도 법정이 다른 지혜로운 판단을 내려 주기를 바라면서.

“하나, 어쩔 수 없지.”

“…….”

“죄 없는 이들이 입어야 할 피해는 가슴 아프지만, 우리가 사파에게 패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강북 전체가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저 강남처럼.”

“……방장.”

“참아야 한다.”

법정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목소리로 딱 잘랐다.

“놈들이 노리는 것은 우리가 흔들리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적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어서는 안 된다.”

“어,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법계가 입술을 깨물며 항변했다.

“놈들의 의도가 우리를 묶어 두고 강북을 황폐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방장께서 틀렸을 수도…….”

“법계!”

순간 언성을 높인 법정이 차가운 눈으로 법계를 쏘아보았다.

“부처께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온갖 마구니의 미혹을 물리치셨다. 흔들리지 말거라.”

“…….”

법계는 입술 안쪽을 질끈 깨물었다.

틀린 말이 아님을 알고 있다. 만인방을 내버려 두고 잡졸에 지나지 않는 이들을 상대하는 건 멍청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그들이 무학을 익힌 이유는 무엇인가?

장강 너머의 환란을 이 악물고 지켜보던 때와는 또 경우가 다르다. 이번에는 마음만 먹으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양민들을 도울 수 있다. 살릴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 모든 고통을 외면해야 한단 말인가?

“방장. 그렇다면 차라리…….”

“아니 될 말이다.”

하지만 법계가 말을 채 뱉기도 전에 법정은 고개부터 저었다. 이미 법계가 할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패군이 그런 걸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다. 우리가 장가계로 가는 순간, 분명 그가 파 둔 함정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아미타불.”

법정이 나직이 불호를 외었다.

“한없이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다. 만일 만인방이 이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저들 역시 강북에 밀어 넣은 전력을 의미 없이 소모한 꼴이 된다. 장일소가 그 꼴이 될 때까지 지켜보기만 하겠느냐?”

“…….”

“반드시 움직인다. 반드시. 이건 인내심 싸움이다. 저들이 움직이면 우리는 반드시 적을 격멸할 수 있다.”

“방장…….”

“마음속의 미혹을 걷어 내거라. 우리가 흔들리길 바라는 적들의 간계에 놀아나지 말거라.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도 자리를 유지하고 움직이지 말라는 지시를 전달해 두거라.”

“…….”

“어서.”

“……예, 방장.”

법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느 때와 달리 움직임이 둔중하고 느렸다.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나가는 그를 지켜보던 법정이 덧붙였다.

“법계.”

“……예, 방장.”

“한 시진이다.”

그러자 법계가 의문 어린 눈으로 돌아보았다.

“한 시진 내에 복귀가 가능한 거리까지만 허용하겠다. 그곳에 몰려든 사파들은 섬멸하는 것을 허한다. 타문 역시 같은 조건이라면 움직여도 좋다고 전하거라.”

“바, 방장!”

“한 시진 이상은 안 된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다.”

법계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그리 전하겠습니다.”

“가 보거라.”

“예!”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얼굴로 법계가 떠났다. 법정의 눈이 이내 침중해졌다.

‘달라질 것도 없는 것을, 저리 기뻐하는구나.’

아무리 절정에 오른 무인이라 해도, 두 시진 만에 오갈 수 있는 거리가 얼마나 되겠는가? 결국에는 호북 언저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 안의 사파들을 섬멸해 봐야 이 전쟁의 향방에는 눈곱만큼도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이를 알면서도 법정은 법계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예전이었으면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제는 법정도 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처럼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을.

그저 눈앞에 있는 사파들을 섬멸하는 것만으로도 저들의 마음에 들어찬 불만은 어느 정도 해소될 것이다. 그럼 그것으로 좋지 않겠는가?

법정은 조금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사실 그가 천우맹에 배운 것이다. 사람은 옳은 일을 할 때가 아니라,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만족을 얻는다는 사실 말이다.

“후우.”

깊게 한숨을 내쉰 그는 생각에 잠겼다.

‘패군…….’

과연 남들이 상상도 하지 못하는 수를 두는 이다.

하지만 충격은 예전 같지 않았다.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법정도 장일소란 작자가 항상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이제는 궁금할 뿐이다.

“어찌할 텐가, 화산검협.”

이런 걸 외통수라 하는 거겠지.

“그러니 말하지 않았는가? 언젠가는 그대의 말과 행동이 그대를 옥죌 것이라고.”

나직이 왼 불호가 무겁게 퍼져 나갔다.

“아미타불.”

* * *

“놈들이 살육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천우맹의 대회의실, 모인 이들의 얼굴은 더 굳을 수 없을 만큼 굳어 있었다.

“회녕(懷寧)과 지주(池州)에서 급보가 날아들었습니다.”

“……안휘인가.”

누군가가 뇌까리자 남궁도위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깨물었다.

도하는 장강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고, 그 도하가 가장 집중된 곳은 다름 아닌 안휘다.

‘우리가…….’

남궁세가가 부재한 데다, 남궁도위가 적극적으로 안휘의 중소 문파들을 섬서로 불러들이기까지 했다. 그 결과, 안휘는 말 그대로 무주공산이 되어 있다.

사패련은 그런 남궁도위의 움직임을 예상했다는 듯, 비어 버린 안휘에 거리낄 것도 없이 상륙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합니까, 녹림왕!”

마음이 다급해진 남궁도위가 격한 목소리로 임소병을 찾았다.

이대로라면 안휘는 말 그대로 지옥이 될 것이다.

아니, 안휘뿐만이 아니다. 이대로 지켜보기만 한다면 곧 천하가 불타오른다. 고작 몇몇 위치에서 문제가 생겼던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남궁도위의 절박한 목소리를 들으며 임소병은 굳은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잠시 후, 임소병의 시선이 누군가에게로 향하는 순간 모두의 시선 역시 그쪽으로 쏠렸다.

의자에 석상처럼 앉아 팔짱을 끼고 있는, 청명에게로 말이다.

무거운 눈빛이 쏟아지고, 청명은 차마 열리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비집어 열었다.

“우선은…….”

청명의 팔꿈치 뒤로 감춰진 손이 피도 안 통할 만큼 콱 쥐어졌다.

“장일소가 움직일 때까지…….”

“…….”

“조금만 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끼긱.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거친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종이었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청명을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안휘로 간다.”

“윤종아!”

그 말에 반응한 건 청명이 아닌 다른 오검이었다.

“사, 사형!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왜냐니?”

윤종은 만류하는 반응이 되레 이상하다는 듯 조걸에게 되물었다.

“사람이 사람을 구하러 가는 데 이유가 있느냐?”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듯 차분한 목소리가 시퍼런 비수처럼 모두의 폐부에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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