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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43화 (1,544/1,567)

1543화. 그걸로 좋지 않으냐? (3)

장강.

“장로님!”

“이, 이런…….”

강변에 선 자오개 능삼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장강 위에 뜬 수십의 배가 보인다. 고작해야 수십이니 대단할 게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심지어 작은 쪽배, 어선 등을 비롯해 온갖 잡스러운 배를 다 동원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능삼이 당황한 이유는 단순하다. 그 수십이라는 숫자가 눈에 보이는 것만 헤아린 결과이기 때문이다.

장강은 넓다. 그리고 길다. 중원의 절반을 가르는 게 바로 장강이다.

그런 장강의 전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지금 떠 있는 배의 숫자는 과연 몇 척일까?

수백? 아니면 수천? 그도 아니면……?

자오개의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본단에는 보고했느냐?”

“가장 빠른 적첩으로 즉시 보고했습니다.”

능삼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보고를 했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겠는가?

대응할 방법이 없다. 강을 건넌 놈들이 네다섯씩 조를 짜 중원 전체로 퍼져 나가는 걸 어찌 막는단 말인가. 이 길고 긴 장강을 모조리 지킬 것도 아니고.

“대체 무슨 생각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병력이란 모아 놔야 의미를 지닌다. 소림은 명실상부 대단한 문파이나, 중원 전역에 걸쳐 그들을 하나씩 떨어뜨려 놓는다면, 제힘의 십분지 일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그걸 뻔히 알 사패련이 지금 자신들의 전력을 모조리 분산하여 강북으로 밀어 넣고 있다. 어째서?

“장로님!”

등 뒤에서 날아든 다급한 목소리에 능삼이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었다.

“우선 구파에 지원을 요청해라. 놈들이 뭍에 닿는 대로 공격한다.”

“하지만…….”

“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이들을 처리한다 해서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 거란 것쯤은.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으냐! 뭐라도 해야 할 것 아니야! 어서 가라!”

“예, 장로님! 알겠습니다.”

능삼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렇게나 무력할 줄이야…….’

까마득할 만큼 빽빽하게 몰려드는 배들을 보며 그는 직감했다.

이제부터 벌어질 모든 일은 그가 지녔던 전쟁의 상식으로는 결코 재단할 수 없으리라고.

* * *

달그락. 달그락.

숟가락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호가명은 느긋하게 죽을 먹는 장일소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굳이…….’

저 그릇에 든 건 누런 수수죽이다.

이곳이 본단이 아닌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보급이 부족한 상황도 아닌데 사패련의 련주가 수수죽이라니.

“……먹을 만하십니까?”

“흐음.”

장일소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숟가락을 내려놓더니 빙긋 웃었다. 환한 웃음을 드리운 그의 입에서 솔직한 감상이 흘러나왔다.

“더럽게 맛없구나.”

“그런데 굳이 왜…….”

장일소가 술병을 기울여 천천히 잔에 따랐다. 주향으로 입을 씻겠다는 듯 깔끔하게 술을 입 안에 털어 넣고는 말했다.

“글쎄. 때론 변덕을 부리고 싶을 때도 있는 거지.”

피식 웃은 그는 제 앞에 놓인 죽 그릇을 잠시 바라보다 슬쩍 밀어 냈다. 잠시 눈이 일렁이는 듯했지만, 금세 빈 그릇에 흥미를 잃은 모양으로 호가명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됐느냐?”

“지시하신 대로 시행했습니다.”

“잘했구나.”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이 영 건성이다. 호가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마 지금쯤 강북은 난리가 났을 것이다. 구파니, 천우맹이니 관이니 가릴 것 없이 말이다. 그런데 정작 그 혼란을 일으킨 장본인은 딱히 즐거움도 흥분도 내보이지 않고 있다.

저들은 상상이나 할까? 그들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를 갈아붙일 이가 지금 막사 안에서 느긋하게 죽이나 먹고 있다는 사실을?

“대응은 딱히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 이르기도 하지만…….”

호가명의 담담한 목소리에 확신이 어려 있었다.

“시간을 더 준다 해도 쉽사리 대응할 수 없을 겁니다.”

장일소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호가명의 생각은 흔들리지 않았다. 호가명이 저들의 입장이라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가장 좋은 건 마찬가지로 전력을 분산하여 강북 전체에 퍼트리는 것이겠으나, 그러기에는 또 목 아래 겨누어진 비수 같은 이곳의 전력이 마음에 걸릴 것이다.

“사람이란 그렇단다.”

“…….”

“측은지심이 있고, 남을 돕고 싶어 하지.”

장일소의 말에 호가명이 묘한 미소를 흘렸다.

“왜 그리 웃느냐?”

“글쎄요.”

모호한 그 웃음에 장일소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이런. 오해가 깊은 모양이구나. 나는 사실 정이 많은 사람이란다.”

장일소는 자신이 내뱉은 말이 웃긴 듯 깔깔 웃더니 말했다.

“그래. 나야 그렇다 치고, 보통은 남을 돕고 싶어 한단다. 하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지. 그 조건이 뭔지 아느냐?”

호가명이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자신에게 피해가 없을 때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장일소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설령 타인을 위해 목숨을 내걸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내 집이 불타는 걸 내버려 두고 남을 도우러 가지는 않겠지.”

“그렇지요.”

“겁이 나겠지. 자리를 비운 동안…… 우리가 그 집을 태워 버릴 수도 있을 테니까. 집뿐만 아니라 모든 게 잿더미가 될 수 있으니까. 이미 눈으로 확인했을 테고.”

호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 점창, 그리고 당가.

사천을 손에 넣는 건 분명 큰 의미를 지니는 일이다. 하지만 그 의미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평범한 이라면 사천이란 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에 기뻐할 테고, 현명한 이라면 사천을 손에 넣은 덕에 적들의 턱에 비수를 겨눌 수 있게 되어 즐거워할 테다.

하지만 장일소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가 사천을 손에 넣으며 얻은 가장 큰 것은 상대가 느낄 공포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구파일방의 아성이 무너진 순간, 구파는 물론이고 천우맹 역시 알게 된다.

그들 역시 한 번의 실수로 같은 꼴이 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결국 지금까지 장일소가 둔 모든 수의 기반은, 바로 상대가 저도 모르게 가슴속에 품은 공포심이었다.

“마음이야 들끓겠지. 가슴도 아플 거란다. 하지만 그게 정말 자신의 집을 불태우면서까지 해야 할 일인가에 대해선 갈등과 의심이 생길 거다.”

“하나, 계속 이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구파는 몰라도 천우맹은 분명…….”

“그렇겠지.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옆집에 난 불도 내버려 두면 우리 집까지 옮겨붙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지 않니?”

맞는 말이다.

그거면 된다. 그가 보낸 것들이 강북 전체로 퍼져 나갈, 그 잠깐의 시간. 그동안만 망설여 주면 된다.

애초에 사패련이 노렸던 게 바로 그거니까.

“감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란다.”

장일소가 빙그레 웃으며 다시 술을 잔에 따랐다.

“다들 얼마나 열심히 애써 주는지. 이제 우리가 꽤 친한 사이가 된 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도와줄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다. 확실히 정파라는 이들은 친절하다니까.”

구파의 수뇌부나 천우맹의 중진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어찌 반응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장일소를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죽이려 들겠지.

그러나 엄밀히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애초에 저들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사패련에서도 시도할 수 없는 수였으니까.

천우맹과 구파가 경쟁적으로 전력을 끌어모으고, 중소 문파들을 규합하지 않았더라면.

저 개방이 천하에 퍼져 있던 장로들을 모조리 불러들이지 않았더라면.

“하나, 다소 어폐가 있습니다.”

“음?”

“련주께서 그리하도록 만드신 것이 아닙니까? 덫에 들어간 짐승에게 감사를 표하는 사냥꾼은 없습니다.”

“쯧쯧. 못된 녀석. 이렇게 몰인정해서야. 그리고 오해가 하나 있구나.”

“어떤…….”

“개방에서 벌어진 일은 정말 내 예상외였다. 설마 그렇게까지 형편 좋게 움직여 줄 줄이야.”

장일소가 다시 생각해도 즐거운 듯 해맑게 웃어 댔다.

개방이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고 해도 이 계획은 어느 정도의 피해를 감수하고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또 마침 개방이 의외의 움직임을 보여 준 덕분에, 피해가 절반 가까이……. 아니, 그 이상 줄었다. 도시 하나는 모조리 불태우고 남을 전력이 고스란히 보존됐다.

“이제 기다리면 되겠군요.”

“그렇지.”

장일소가 나른한 얼굴로 금침에 몸을 기댔다.

저것은 그저 연극적인 몸짓일 뿐이다. 호가명은 포착했다. 나른하던 눈빛에 일순 굶주린 짐승과도 같은 번뜩임이 스치는 것을.

“선택은 저들이 해야지. 전력을 나눠 흰 목을 훤히 드러낼 건지. 아니면 거북이처럼 그 자리에 웅크린 채 온 세상이 불타는 것을 지켜볼 건지.”

“…….”

“정파라는 놈들은 으레 두 가지를 얻고 싶어 하지 않니. 하나는 승리. 또 하나는 체면. 그런데 그 승리와 체면이 서로를 갉아먹을 때 놈들은 과연 무슨 선택을 할지…….”

장일소의 눈이 요사스레 일렁였다.

“너도 궁금하지 않니?”

“…….”

“하하하하하핫!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의자까지 탁탁 쳐 가며 웃는 장일소를 보며 호가명은 들끓는 가슴을 의식적으로 내리눌렀다.

고작 여기에서 흥분해서는 안 된다. 이제 겨우 시작이다.

“감히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쯧쯧. 쓸데없는 겉치레는 빼라는 데도 참 말 안 듣지.”

장일소가 온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호가명은 그 눈빛에 외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저 눈빛에 안주하여 스스로를 경계하고 의심하지 않게 되는 날이, 그의 쓸모가 다하는 날이다.

“저들은 여전히 강대합니다.”

“알지.”

장일소가 나른한 눈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기분만 내다 얻어맞지 말자는 소리겠지?”

“송구하지만, 예. 그렇습니다.”

“쯧쯧. 송구할 소리면 안 하면 될 것을.”

장일소는 영 기분을 잡쳤다는 듯이 혀를 찼다.

“가명아, 가명아.”

“예, 련주님.”

“네 말이 맞단다. 하지만 강함에도 종류가 있잖니.”

장일소의 시선이 북쪽으로 향한다. 붉게 물들어 가는 대지가 그의 눈에 비쳤다.

“저건 강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비대하다고 하는 거란다.”

“비대라시면…….”

“모두 지켜야 하지 않니. 커다란 문파도, 작은 문파도, 심지어 칼도 못 휘두르는 얼간이들까지. 아, 또 모르지. 야수궁의 야만인 놈들과 마음 따뜻한 화산 분들이라면 한술 더 떠서 동네 개새끼까지 지키려 들지도.”

“…….”

“놈들에게는 눈에 닿는 모든 게 지켜야 할 곳이란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장일소의 얇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흰 이가 드러났다.

“모조리 짓밟고 물어뜯을 수 있는 곳이지.”

호가명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사패련……. 아니, 만인방에게는 지킬 것이 없다.

강북으로 몰아넣은 사파의 떨거지 놈들은 모조리 죽을 것이다. 애초에 그리 대단치도 않은 놈들을 삼삼오오 쪼개 놓기까지 했으니, 적을 맞닥뜨리는 족족 죽어 나가겠지.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놈들의 쓸모는 죽기 전까지 강북에서 난장을 피우는 것. 오직 그것뿐이다. 손에 쥐고 돌아오는 재물은 모조리 소유권을 인정해 주겠노라 약조했으니 더욱더 굶주린 이리 떼처럼 날뛰어 대겠지.

그것만으로도 강북은 쑥대밭이 될 터. 만일 고민하다 대응이 늦는다면 그 작은 불씨들은 지독한 불길이 되어 강북 전체를 태워 버릴 것이다.

“흐음. 대신 준비한 건 확실히 해야겠지. 연락은 왔더냐?”

“예.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대기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쯧쯧. 속 시커먼 놈이 말은 번듯하게 잘도 지껄이는구나.”

장일소가 고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그런 놈들이 좋아. 알기 쉬우니까.”

장일소가 느긋하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막사 밖으로 나오자 수하들이 바짝 긴장하며 얼어붙었다. 강북 쪽을 무심결에 본 장일소가 미소 지었다.

“궁금하구나. 놈이 어떤 수를 둘지 말이다.”

살짝 섬뜩한 그 미소를 보며 호가명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입장을 바꾸어 보아도 말입니다.”

“그렇더냐? 나는 알 것 같은데.”

“……예?”

“아니. 아니지. 의미가 없지. 방법을 알아도 시행할 수 없다면 방법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장일소의 입술은 오늘따라 유난히 피처럼 붉었다. 아주 작은 속삭임이, 호가명도 잘 알아듣기 힘들 만한 크기로 새어 나왔다.

“그 몸에 치렁치렁 묶인 사슬을 끊어 낸다면 내 목을 자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과연 그 사슬을 끊은 너를 너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재미있겠구나. 그래, 무척 재밌겠어.”

그의 색 옅은 눈에선 거친 열기가 일렁였다. 그 열기가 강북을 덮치기 시작한 불길보다 더욱 뜨겁고 잔혹하여, 장일소 자신마저도 남김없이 태워 버릴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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