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1화. 그걸로 좋지 않으냐? (1)
개봉의 상황은 가관이었다.
홍대광의 얼굴은 숫제 새까맣게 죽어 가고 있었다.
“보고드립니다! 남경 인근에 사파가 출현했습니다. 수는 서른 이하로 추정됩니다!”
“한단(邯郸)에서 하오문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인근 문파를 공격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적의 수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급보입니다! 적습! 서주(徐州)에서 적의 습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가 왔습니다! 적의 정체와 수는 불명입니다!”
“이, 이런 미친…….”
앞에 펼쳐진 중원의 전도를 보는 홍대광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커다란 지도 곳곳이 붉은색으로 물들어 간다. 적이 습격해 왔다는 곳이 이 순간에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마치 장강 이북의 중원을 모조리 뒤덮어 버리기라도 할 듯이.
“방주!”
“시끄러워! 생각하잖아!”
홍대광이 버럭 소리치고는 입술을 짓씹었다.
‘대체 어떻게?’
피가 식는다.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홍대광을 말없이 지켜보던 풍영신개가 짧은 숨을 토해 냈다. 어린 새 방주이니 충분히 당황할 만하다. 그가 홍대광을 진정시키기 위해 막 입을 뗀 찰나였다.
“들어온 보고를 취합해라!”
홍대광의 입에서 신속하고도 또렷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할 것은 적의 수다. 적습을 받고 있다는 보고가 온 곳 중, 적의 수가 보고되지 않은 곳을 추려서 전서구를 보내라! 수단은 가리지 않는다! 특급이든 뭐든 있는 대로 동원해서 적의 수부터 파악해라! 당장!”
“예!”
“수가 파악되는 대로 상보각(想報閣)을 동원해 강북에 잠입한 사파의 분포를 알아내라!”
대답이 채 나오기도 전에 홍대광이 빠르게 지시를 추가했다.
“분석 결과를 기다릴 것 없이 적의 수가 파악된 곳을 우선하여 천우맹에 보고한다! 형식과 체계는 모두 무시해! 가장 빠르게 전달할 방법을 모조리 동원해 어떻게든 이 상황을 알려야 한다. 정보가 하나 추가될 때마다 무조건 전달해!”
“예!”
거지들이 일사불란하게 튀어 나간다.
“방주! 구파는 어찌합니까?”
“남는 전서구와 인력을 동원하여 그쪽에도 알려!”
“하지만, 방주. 개방은 이미 천우…….”
“이 거지새끼야! 사람 목숨이 오가는 판에 지금 소속이 중요하냐? 그 눈치로 어떻게 여태 빌어먹고 살았어!”
홍대광이 벌컥 화를 내니 사색이 된 거지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사과할 시간에 가서 뭐라도 해! 서둘러라! 한순간만 늦어도 돌이킬 수 없다!”
“예!”
그사이에도 홍대광이 보고 있는 중원의 전도는 계속해서 붉게 물들고 있었다.
‘빌어먹을…….’
홍대광은 개방의 방주이기는 하나, 솔직히 상보각에서 제대로 된 분석을 해 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애초에 개방이 그럴 능력이 있었다면 이만한 정보의 우위를 쥐고도 소림의 뒤치다꺼리나 하고 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 그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낱낱이 밝혀 전달하는 것. 대책은 그가 아닌 천우맹이 내릴 것이다.
“……어떻게 좀 해 봐라, 화산신룡.”
초조한 마음으로 꽉 깨문 아랫입술이 희게 질렸다.
* * *
연이어 날아드는 전서에, 현종이 넋을 놓은 듯 중얼거렸다.
“이, 이게…….”
너무 급작스럽게 사태가 터지니 일순 머리가 멈춘 것 같았다.
그때 당군악의 눈길이 빠르게 임소병에게로 향했다.
“녹림왕! 적이…….”
“잠시.”
하지만 임소병은 단호히 당군악의 입을 막았다. 손에 쥔 부채를 부러뜨리기라도 할 기세로 주무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까지 보고된 사실로 파악하자면, 장가계에 머무르고 있던 사파와 강남 내에 잔존해 있던 사파 세력이 대거 도강하여 강북으로 넘어온 걸로 보입니다.”
여기까지는 뻔한 내용이다.
“상황을 보아, 적은 대규모로 움직이는 대신 소수로 나뉘어 강북 전역에 퍼진 것 같고요. 이 상황에 대한 대응이 필요합니다!”
모두가 잠시 침묵에 빠졌다. 하지만 조걸만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외쳤다.
“아, 아니, 그게 가능합니까? 다 눈뜬장님도 아니고, 이만한 사파 놈들이 강북으로 들어오는 동안 아무도 몰랐다고요?”
“가능합니다.”
“벌어진 일을 부정할 생각은 아니지만, 전 당최 이해가 안 갑니다. 우리가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아니고서야……!”
“가능해.”
“청명아?”
의자에 앉아 굳은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던 청명이 입을 열었다.
“평소라면 어렵겠지. 강호인들의 수가 적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중원 전체에 퍼져 있는데 그 눈을 모두 피한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내 말이!”
“그래. 중원 전체에 퍼져 있다면 말이야.”
그 순간 조걸의 얼굴이 굳었다. 청명의 말뜻을 이해한 것이다.
“총사의 말이 맞습니다.”
아직 이해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임소병이 부연했다.
“장강 전체를 감시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지만, 설령 장강이 뚫린다고 해도 그리 큰 문제는 아닙니다. 총사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이런 전시에는 개방뿐 아니라 모든 무림인의 눈이 감시망이 되어 주니까요.”
몇몇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당연한 상식이 아닌가?
그들이 본 것은 가까운 대문파로 전해질 것이고, 그 대문파가 개방을 통해 천하에 퍼뜨릴 것이다. 이는 강호의 역사가 증명하는, 진정한 의미의 천라지망(天羅地網)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당군악이 임소병의 말을 받으며 이었다.
“그 강호인들이 모두 한곳에 집결해 있으니까.”
“정확합니다.”
천우맹과 구파.
그 두 곳이 서로 경쟁적으로 중소문파를 끌어들였다. 원래는 목숨과 교환해서라도 적의 종적을 밝혔을 만한 이들이 제 터전을 비워 버린 것이다.
임소병이 슬쩍 당군악을 일별했다.
“그리고…… 장강변에 사는 양민들조차 대거 이동해 버렸죠.”
당군악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는…….”
“다수가 아니니까요.”
“그건 무슨 말인가?”
“만일 침입해 온 적의 단위가 한 문파라면, 도강하든 사천을 통하든 강북 진입 자체를 감추기는 어렵습니다. 설령 한 문파가 아니라 한 개의 대(臺)나 각(閣)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열만 모였어도 들켰을 겁니다.”
임소병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했다. 묘하게 서늘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 수가 극단적으로 적다면, 설령 그곳이 적진이라 해도 들키지 않고 잠입할 수 있다. 그건 이미 우리가 증명한 일입니다. 패군 역시 확실히 알게 되었겠죠.”
“하지만 그건 해남행을 했던 이들이 뛰어났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닙니까?”
“아니요. 사파에게는 오히려 더 쉽습니다.”
현종의 물음에 임소병이 단언했다.
“강남은 정파가 발을 들일 수 없는 땅입니다. 아무리 변복해도 그 기운과 어색함을 완전히 감추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눈에 완벽히 띄지 않아야 하지요.”
“그렇겠지요.”
“하지만 강북에는 이미 사파가 존재합니다. 아니,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녹림이 있기도 하고요.”
그렇다. 현종은 얼굴을 굳히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설령 누군가가 삼삼오오 움직이는 적들을 발견했다고 한들, 그 사실을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강참변 이후 강북에선 그런 광경이 일상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타앙.
조걸이 또 의문을 제기하려 입을 연 순간, 청명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시선이 모이자 그는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습격해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일은 이미 벌어졌고, 남은 건 어떻게 대응할까지.”
모두 동의했다. 너무 놀라서 말이 길어졌지만, 청명의 말대로 지금은 이럴 여유가 없다.
청명이 임소병에게 턱짓했다.
“말해 봐. 어떻게 해야 하지?”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임소병의 말에 설소백이 화들짝 놀라 외쳤다.
“지금 우리는 저들을 막기 위해 모인 거 아닌가요? 그런데 움직이지 않는다니요? 이러는 와중에도…….”
“예. 양민들이 죽어 가겠죠.”
임소병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설소백의 말을 잘라 버렸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 그게 적의 의도입니다.”
“좀 더 자세히.”
“중원 전역에서 사파의 난이 벌어진 이상, 우리는 저들을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곳을 막아 내려면 당연히 힘을 쪼개고 쪼개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체계도 무너지겠죠.”
“…….”
“애초에 전력을 분산시키는 건 병법에서 최악으로 치는 일입니다. 특히나 이리 잘게 쪼갠 전력은 대규모 충돌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장일소가 이런 멍청한 짓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뿐입니다. 우리 역시 분산되라는 거죠.”
“으음.”
당군악이 침음성을 흘렸다. 임소병의 말이 이어졌다.
“놈들은 그 틈에 진격할 겁니다. 그때 우리의 체계가 무너져 있다면,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것은 사방에 흩어진 저 어설픈 놈들이 아니라 장가계에 머물러 있는 놈들의 주력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평소와 달리, 임소병의 목소리가 단호하기 이를 데 없다. 어설프게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말라는 협박에 가까웠다.
중진들이 모두 깊은 시름에 잠겼다.
“그리 오래 기다리게 되진 않을 겁니다. 장가계에 있는 사패련의 주력도 반드시 움직일 테니까요. 인내심 싸움이나 다름없습니다. 먼저 움직이는 쪽이 지는 겁니다.”
팔짱을 낀 청명이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내 집에 불이 났는데, 먼저 움직이는 쪽이 진다?”
“예.”
“그러다 타 죽으면?”
“찔려 죽는 거나 뭐가 다릅니까?”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짧게 충돌했다.
잠시 후, 물러난 건 의외로 청명이었다. 그는 의자에 파묻히듯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아 버렸다.
대신 백천이 입을 열었다.
“녹림왕. 아니, 군사.”
“말씀하시지요. 장문대리.”
“보고대로라면 사방천지에서 습격이 벌어지고는 있지만, 각각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합니다. 그러니 미끼에…….”
“그렇다면 우리도 극소수만으로 대응할 수는 없습니까?”
“…….”
“한두 문파만 따로 할애한다면…….”
“안 됩니다.”
백천이 무거운 기세를 흘리며 임소병을 뚫어지게 보았다. 하지만 임소병은 여전히 칼같이 단호했다.
“사패련의 주력이 움직이기 전까지는 어떤 대응도 하지 않습니다.”
“군사!”
“더 많이 죽는다니까! 모르겠습니까!”
결국 임소병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속으로 백천에게 동조하던 오검마저 움찔하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임소병은 잠깐 열이 오른 머리를 식히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결국 지금 침입해 온 놈들도 바다에 부은 소금 꼴이 될 겁니다. 지금이야 대단해 보여도 저만한 수로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 장문대리의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다.”
날카로운 눈으로 임소병을 마주 보던 백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이 옳든 간에 지금은 전시 상황이고, 군사의 직을 짊어진 임소병의 권위를 깎아내릴 수는 없다.
“알겠습니다.”
임소병이 손에 쥔 부채를 꽉 움켜잡았다.
“패군은 그리 느긋한 이가 아닙니다. 한번 움직인 이상 전보다 더 파괴적으로 움직이려 할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만 참으면 됩니다. 놈이 움직이는 순간 반드시 반격할 테니까.”
선언이자 맹세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가장 깊이 담긴 건…… 장일소에 대한 증오였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천우맹의 중진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보고드립니다! 개방에서 온 특급 전서입니다!”
“무슨 내용이냐?”
문을 박차고 들어온 건 곽회였다. 사색이 된 그는 쥐고 있던 첩지를 읽었다. 필사적으로 억눌러도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자, 장강 이남에서부터 사파가 대규모로 도하 중!”
“뭐?”
“배의 수는 수백 이상으로 측정 불가! 위치는…….”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숨을 멈추었다.
이윽고, 곽회의 찢어질 것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악양(岳阳)에서부터 상주(常州)까지. 자, 장강 전역입니다!”
회의실에 벼락이라도 떨어진 것 같았다.
“자, 장강 전역? 그게 사실이냐!”
“예!”
청명의 시선이 천천히 창 너머로 향했다. 세상에 자욱이 깔려 있던 어둠이 걷히며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청명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잘도…….”
아침을 알리는 붉은 여명이, 지금 청명의 눈에는 세상을 살라 먹을 불길한 화마처럼 보였다.
‘장일소.’
청명의 시선이 남쪽으로 향했다. 그 두 눈에선 지독한 증오가 들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