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5화. 뭐 아세요? (5)
야심한 시간임에도 청명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저녁부터는 본 적이 없는데요.”
다른 방에 물어도 다들 모르겠단 대답뿐이었다.
윤종은 혹시 몰라 천우맹 중진들의 숙소까지 살펴보았지만, 청명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물론 하루쯤 늦게 대화한다 해서 달라질 건 없다. 하지만 지금 당장 청명을 찾아내 이 답답함을 어떻게든 풀고 싶었다.
“도대체 이놈을 어디서…….”
아랫입술을 꾹 깨문 그때였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는데, 화산 제자들의 숙소 구석에서 무언가 하얀 것이 고개를 빼꼼 내민 게 보였다. 혹시 먹을 거라도 진상하려고 왔냐고 묻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하얗고 작은 생물.
윤종의 눈이 일순 좀 더 가늘어졌다.
“너, 청명이 놈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있지?”
작고 하얀 생물, 백아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금세 흥미를 잃은 얼굴이었다.
“사례는 하마.”
그제야 백아가 슬그머니 나섰다. 까만 코를 몇 번 킁킁대더니 따라오라는 듯 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갔다. 윤종은 얼른 그 뒤를 쫓았다.
새하얀 섬전이 화음을 가르고 나아간다. 새로 개간한 너른 평지를 넘고, 이내 그 뒤로 드러난 높은 산지까지 파고들었다.
‘대체 어딜 가는 거지?’
이 악물고 백아의 뒤를 쫓던 윤종의 숨이 살짝 가빠질 즈음, 백아가 달빛조차 잘 들지 않는 깊은 숲속에 도달하여 멈춰 섰다.
턱!
덩달아 멈춘 윤종이 이내 얼굴을 굳혔다. 저 앞쪽에서 거센 파공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고맙다.”
작은 목소리로 인사하고 백아에게 눈짓한 윤종이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리고 숲을 헤치며 성큼성큼 나아갔다.
잠시 후, 눈에 대단한 광경이 들어왔다.
콰아아앙!
하늘에서 쏟아진 붉은 검기가 땅을 푹 파는 거로도 모자라 바위를 으깬다.
도가의 활인(活人)을 완전히 배제하고, 적을 부수겠다는 의지만이 가득한 검기다. 검에 실린 위력보다 그 섬뜩한 살기가 윤종의 머리털을 삐쭉 곤두서게 했다.
콰쾅!
그의 바로 앞에서 검기가 폭발했다. 이윽고 주변을 뒤덮고 있던 자욱한 살기와 거친 검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후욱.”
그리하여 모습을 드러낸 건, 거친 숨을 뱉느라 오르내리는 청명의 등이었다. 수련이 얼마나 격했던 건지 온통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
윤종은 순간 이곳에 온 목적도 잠시 잊은 채 새삼스러운 생각에 잠겼다.
아마 조걸과의 대화가 아니었다면, 윤종은 지금쯤 자리를 정리하고 잠들어 있었을 것이다. 내일의 수련을 준비해야 하니까.
하지만 백천도 청명도 잠을 청할 시간에 자기 자신을 혹사하듯 몰아붙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듯 말이다.
백천을 쫓는 것은 자신의 상태일 터다.
그럼 청명을 쫓는 것은 무엇일까?
청명이 고개만 슬쩍 돌려 윤종을 돌아보았다. 열이 올라 증기를 뿜어내는 몸과는 달리, 눈빛은 섬뜩하리만큼 서늘했다. 윤종은 알 수 없는 압박감이 밀려드는 걸 느꼈다.
“뭐야.”
이윽고 청명이 가볍게 쯧 혀를 차더니 근처의 바위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거기 걸쳐 놓았던 무명천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훔친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윤종을 보았다.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왔어?”
평소처럼 가벼운 말투였다. 윤종은 저도 모르게 멈추었던 숨을 뒤늦게 내쉬었다.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까?
“무슨 수련을 이리 멀리까지 와서 해.”
“시끄럽잖아.”
“그렇긴 하다만.”
“게다가 화음 근처에서 수련하면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들 와서 구경해 댈 텐데, 어디 속 편하게 칼이라도 한번 휘두르겠어?”
“그도 그렇겠네.”
윤종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마 청명과 검 한번 섞어 보려는 인간들이 화음 밖까지 줄을 설 것이다. 그리고 그 선두에 남궁도위가 있을 거라고 윤종은 확신했다.
“아니, 근데 말 돌리지 말고 여긴 어떻게 알고…….”
그 순간 청명의 눈매가 확 가늘어졌다. 윤종의 뒤에 선 나무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백아를 발견한 것이다.
키이!
백아가 순식간에 나무 뒤로 머리를 감추었다.
“저 족제비 놈, 감히 주인을 팔아먹어?”
“…….”
“그래. 계속 그래라. 계속. 슬슬 겨울인데.”
그러자 나무 뒤에서 뭔가 칭얼대는 듯 키익, 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혀를 찬 청명은 다시 윤종에게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이 야밤에 이유도 없이 여기까지 찾아오진 않았을 거고.”
청명이 바위 위에 올려 둔 호리병을 잡아 들었다. 격한 수련 와중에 용케도 저 병이 무사했구나 싶다.
“사형?”
윤종이 말이 없자 청명이 불렀다. 윤종은 그런 그를 가만 보다 말했다.
“알고 있지?”
“뭘?”
“사숙 말이다.”
말을 뱉어 놓고 청명의 얼굴을 살폈다. 뭐라도 기색을 내보일 거라 생각했건만, 청명의 표정에는 놀라울 만큼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사숙이 왜?”
“……사숙의 몸 상태 말이다.”
윤종의 목소리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의뭉을 떠는 놈에게 짜증이 치밀어서인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어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 알 수 없었다.
“아아.”
목소리에 날이 선 걸 분명 알아챘을 텐데도 청명은 그저 심드렁했다.
“그거 말하는 거구나.”
“그래……. 알고 있지?”
“알아.”
청명이 태연하게 술병을 기울였다. 윤종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청명의 동작 하나하나가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눈에 거슬렸다.
“그래서? 그 이야기 하자고 이 밤에 찾아온 거야? 여기까지?”
“어쩔 셈이냐?”
“……뭘 어째?”
“무슨 생각이냐고. 계속 사숙을 저렇게 내버려 둘 거냐?”
청명이 말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윤종이 한숨처럼 말했다.
“사숙은 전쟁에 나갈 셈이다.”
“…….”
“평소처럼 선두에서 우릴 이끌려고 하겠지. 아니, 전쟁이 전쟁이니만큼 평소보다 더 위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을 거다.”
청명이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윤종을 마주했다.
“그럼 어떻게 될지 너도 알잖느냐?”
“사형.”
“사숙이 죽는다.”
윤종의 가느다란 눈 사이로 차가운 빛이 흘렀다.
“우리도 최선을 다해 사숙을 도와 보겠지. 하지만 이건 전쟁이다. 내 목숨도 지키기 어려운 판에 사숙까지 완벽하게 지켜 낼 수 있을 리 없어. 사숙이 그걸 용납할 리도 없고.”
“…….”
“알겠냐? 사숙은 이대로 전쟁에 나가선 안 돼.”
청명은 대답 없이 윤종의 말을 들었다.
“그러니까 생각한 게 있으면 더 시간 끌지 말고 이제 뭐든 좀 해라. 물론 늘 그래 왔듯, 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너도 알잖느냐. 내일 당장이라도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판이 되었다. 이제 더는 위험해.”
윤종의 목소리는 평소보다도 훨씬 진지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백천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설사 현종이라 해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을 가능성이 크다. 사지 근맥을 끊고 가두어도 부득부득 기어서 전장에 나설 이가 백천이니까.
그런 백천을 막을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오직 청명 하나뿐이다.
그리고 내심 다른 희망도 있었다.
어쩌면, 이 녀석이라면 단순히 백천을 막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몸 상태를 해결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놈이 백천을 이리 오래 방치했을 리 없다.
그런데 청명의 반응은 윤종의 예상과 다소 달랐다.
“쯧.”
짧게 혀를 찬 청명이 바위 위에 대충 던져 두었던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난 또 뭔 대단한 이야기가 있어서 여기까지 왔나 했더니.”
“……뭐?”
윤종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백천의 상태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어디 있단 말인가?
벗어 놓은 옷을 걸치고, 느긋하게 매듭까지 지은 청명이 심드렁한 눈길을 보냈다.
윤종은 청명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이미 생각해 둔 방도가 있다는 거지? 영약을 쓴다든가?”
“아니.”
“……어?”
“사형도 알 거 아냐. 사숙은 과하게 선천지기를 끌어 쓰다 탈이 났어. 그러니까, 기운을 담는 그릇 자체가 부서진 거지.”
“…….”
“영약을 써 봐야 밑 빠진 독에다 물 붓는 꼴밖에 안 돼. 계속 부어서 채우려면 아마 중원에 있는 영약을 모두 퍼다 먹여야 될 거야. 그래도 언젠가는 다 빠져 버리겠지. 밑 빠진 독이란 그런 거니까.”
단전이 깨졌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상황은 윤종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이라고 지금껏 마냥 손 놓고만 있었던 건 아니니까.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던 건 개봉에서였다. 굳이 백천에게 꺼내어 말하지 않았을 뿐, 이미 그들끼리는 당소소를 몇 번이고 추궁했었다.
- 저는 못 고쳐요. 그리고…… 이건 당가에서도 못 고쳐요.
무인으로서는 사형선고와도 같은 대답이 돌아왔더랬다.
- 완전히 깨진 게 아니라 금이 간 정도니 단번에 무학을 모두 잃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점점 잃어 가겠죠. 점점 더 빠르게. 아무리 애를 써도 돌이킬 수 없이.
짐작도 할 수 없다.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것들이 점차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가는 기분이 어떨지. 자신의 전부나 다름없는 것들이 더디지만 끊임없이 무너지는 걸 지켜만 봐야 하는 심정이 어떨지.
그럼에도 그들이 지금껏 참아 낼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다.
“알아. 하지만 너라면 무슨 방법이 있을 것 아냐?”
청명이 침묵했으니까.
그들이 눈치챈 것을 이놈이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청명은 개봉의 전투 이후로도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모두 믿었다. 이 도깨비 같은 놈에게는 그들이 상상도 하지 못한 신묘한 방법이 있을 거라고. 지금껏…… 그래, 지금껏 항상 그랬으니까.
하지만 청명에게서 나온 퉁명한 말은 윤종의 예상을 완전히 부숴 놓았다.
“없어.”
“……뭐?”
“방법 같은 건 없다고.”
윤종은 말없이 청명을 응시하기만 했다. 대답의 진위를 확인하려는 듯.
“나는 의원도 아니고, 연단가도 아냐. 거꾸로 묻고 싶네. 왜 나한테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데? 당가에서도 못 고친다는데.”
……이건 진심이다. 윤종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청명이 뱉는 말에 거짓 따윈 없다.
그 순간 윤종을 찾아온 건, 절망이 아니라 깊은 의문이었다.
“방법이 없다고?”
“그래.”
“정말 방법이 없단 거냐?”
“그렇다니까?”
윤종의 눈이 청명을 뚫어지도록 보았다.
“그럼…… 왜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는데? 사숙이 하루하루 어떤 심정으로 살고 있는지 뻔히 알고 있었을 놈이. 지금 저 사람이 어떤 각오를 하고 있는지 모를 리 없었을 놈이.”
“…….”
“왜 그걸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청명은 윤종을 빤히 보다 태연한 말투로 말했다.
“그럼 위로라도 할까?”
들끓는 노기도, 서릿발 같은 위엄도 없었다. 그저 담담하고 고저도 없는 그런 어투였다.
“너…… 지금 뭐라고……?”
“참 아쉬운 일이지만, 별수 없으니 그만 받아들이라고 조언이라도 해 줄까?”
윤종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걸 못 하니까 사형들도 지금껏 잠자코 있었던 거잖아.”
“너…….”
“애초에 이 모든 건 사숙이 내린 선택이야. 스스로 이런 결과를 몰랐을 리 없어.”
“……청명아?”
윤종은 귀를 의심했다. 지금 이놈이 뭐라 지껄이는 거지?
애초에 이 일이 왜 벌어졌는가? 왜 백천의 단전이 깨어졌는가?
왜 백천이 그렇게 무리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런데…….
“본인이 한 결정을 본인이 책임지겠다는데, 그걸 나한…….”
윤종의 손이 청명의 멱살을 콱 잡아챘다.
우드득.
탄탄한 무복이 뜯길 정도로 억센 손길이었다.
청명의 멱살을 움켜잡은 윤종은 제 손에 들어간 힘과 울분을 이기지 못해 부르르 떨었다.
“……너.”
화를 억누르느라 윤종이 아랫입술을 짓깨물었다.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차마 누르지 못한 분노, 그리고 슬픔이 목소리의 떨림으로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