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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34화 (1,535/1,567)

1534화. 뭐 아세요? (4)

풀벌레 우는 소리가 돌연 낯설다. 어쩌면 이 상황이 낯설기 때문일지 모른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죽는다라.”

잠시 후, 그 침묵을 깨고 백천의 목소리가 담담히 흘러나왔다.

“검을 잡은 자라면 누구라도 각오해야 하는 일 아니더냐.”

흔들림 없는 말투로 내뱉은 건 지극히 당연한 정론이었다. 하지만 윤종은 그 정론을 정론으로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런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백천의 고요한 시선이 윤종을 살폈다.

이윽고 백천은 새삼 깨달았다. 이 속 깊은 사질과 그가 의외로 속을 터놓고 이야기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흠.”

백천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걱정해 줘서 고맙긴 하지만, 그리 정색할 것 없다. 나는…….”

그 순간, 윤종의 검집에서 매화검이 섬전처럼 뽑혀 나왔다. 웬만해서는 드리우지 않던 살기까지 가득 품고서 말이다.

파아아앗!

붉은 기운을 머금은 검이 단숨에 백천의 목까지 치달았다. 놀란 백천이 빠르게 검을 휘두르며 윤종의 공격을 강하게 쳐냈다.

카강!

검과 검이 맞부딪힌 순간 백천의 몸이 뒤로 쭈욱 밀려났다.

“무슨……!”

그러나 급작스러운 기습에 노기를 드러낼 틈도 없이 윤종의 검은 연이어 백천을 노리고 들었다.

일시에 사방을 점해 온다. 백천은 거대한 산악이 자신을 덮쳐오는 듯한 압박을 느꼈다.

파라라락!

백천의 검 끝이 신속하게 수십의 매화 검기를 흩뿌렸다. 구름처럼 피어난 붉은 꽃잎은 윤종과 백천의 사이를 벽처럼 가로막았다.

쿠웅!

그러자 윤종이 지체 없이 진각을 밟았다. 허리를 뒤트는 듯 꺾어 내고는 검을 단번에 횡으로 내그었다.

휘이이이잉!

강한 파공음과 함께 백천의 매화 잎들이 검기에 휩쓸리며 밀려났다. 때아니게 몰려온 태풍에 저항하지 못하는 매화처럼.

쿵!

윤종은 그렇게 열어젖힌 공간으로 빠르게 몸을 던져 백천의 머리 위로 검을 내리쳤다.

백천의 동공이 더없이 크게 확장되었다.

카아아앙!

위로 내뻗어진 백천의 검과 내리그어진 윤종의 검이 허공에서 강하게 충돌했다.

카가! 카가가각!

윤종은 백천의 검을 부러뜨릴 기세로 내리눌렀다. 백천 역시 지지 않고 이를 악물며 검을 밀어 내려 했지만, 윤종은 태산이라도 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둑. 우드득.

백천의 발이 점차 뒤로 밀려났다. 전신의 뼈가 비명을 질러 댄다. 아무리 용을 써도 무덤덤하게 짓눌러 오는 윤종을 이길 수가 없었다.

일그러진 백천의 얼굴과, 그 어떤 감정도 내보이지 않는 덤덤한 윤종의 얼굴이 교차한 검을 사이에 두고 맞닥뜨렸다.

그 순간 윤종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백천을 내리누르고 있음에도 여력이 남아 있다는 듯.

“화려하게 눈을 속여 봐야 힘이 실리지 않으면 껍데기일 뿐이다.”

투웅!

그 순간 윤종의 검이 백천을 밀어 냈다. 뒤로 몇 발짝이나 튕겨 나간 백천은 손에 든 검을 땅에 박아 넣고서야 몸을 멈추었다.

그런 그를, 윤종은 더 가늘어진 눈으로 응시했다.

“그렇기에 추구해야 할 것은 화려함이 아닌, 그 안의 진의(眞意)다.”

백천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윤종을 마주 보았다.

“……사숙께서 하신 말입니다.”

백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사질에게 밀렸다는 부끄러움도, 스스로에 대한 자괴도, 도를 넘은 윤종의 행위에 대한 분노도 아니었다. 그저…….

“몰라보게 강해졌구나.”

“제가 강해진 겁니까?”

“…….”

“사람들이 여전히 사숙을 애송이로 보고 있다면, 속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싸한 검기와 적당한 허세로 자신을 포장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숙.”

윤종의 차가운 눈이 백천을 꿰뚫는 듯했다.

“이제는 누구도 화산의 장문대리를 애송이로 보지 않습니다.”

백천은 침묵했다. 그 침묵이야말로 어떤 대답보다 확실한 긍정이었다.

“그러니 마주하는 모든 적이 전력을 다해 사숙을 죽이려 들 겁니다. 한 올의 방심도 없이 말입니다.”

“윤종아.”

윤종이 입술을 짓깨물며 백천을 노려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죽을 겁니다.”

한참 말을 잃기라도 한 사람처럼 침묵하던 백천이 한숨을 쉬었다.

“다들 알고 있느냐?”

“모르면 바보겠죠.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왜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느냐?”

윤종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사숙이니까요.”

너무도 많은 의미가 담긴 대답이었다. 백천조차 단번에 모두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백천은 굳은 표정으로 응시해 오는 윤종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그럼…… 너는 왜 굳이 이제 와 이러는 거냐?”

검을 잡은 윤종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질문이지만, 그가 해야 할 대답은 같았다.

“사숙이니까요.”

백천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래. 모르기에 말할 수 없는 게 아니다. 서로 알고 있기에 오히려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윤종이 차갑게 말했다.

“물러나십시오.”

냉기가 묻어나는 말을 뱉은 것은 윤종이지만, 그 말에 베인 듯 눈을 일그러뜨리는 것 역시 윤종이었다.

“사숙이 죽는 꼴 같은 건 누구도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흠.”

백천이 자세를 바로 하더니 납검했다. 먼 화산의 봉우리를 넘겨다보는 눈이 초연했다.

“곧 겨울이 오겠더구나.”

“……사숙.”

“차가운 겨울이 오면, 이 화산도 눈으로 뒤덮이겠지. 한철 매화로 가득했다는 게 거짓말인 것처럼.”

먼 곳으로 향했던 백천의 시선이 다시금 윤종에게로 향했다.

“어떤 꽃이든 결국은 지기 마련이다. 피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일이지. 하지만…….”

망설임 없는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질 걸 안다 해서 피지 않는 꽃 따위는 없다.”

“사숙!”

“오히려 질 걸 알고 있기에 더 필사적으로 피어나지. 그게 매화니까.”

윤종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굳이 몸을 던져서 질 필요는 없잖습니까.”

“…….”

“그냥 뒤로 물러나 적당히 요양하면 됩니다. 몸만 회복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럼…….”

격하게 말을 쏟던 윤종이 순간 멈칫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알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저 사람에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윤종이 모를 리 있겠는가? 제 실력을 잃은 백천이라도, 전력에 티끌만큼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전장이란 그 티끌 하나가 모자라 수많은 이들의 목이 달아나는 곳이다.

자신이 살기 위해 사형제를 위험에 빠뜨린다? 윤종이 아는 백천에겐 그런 선택지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사숙.”

“걱정할 것 없다.”

백천이 고개를 저었다. 느리지만 단호한 몸짓이었다.

“나 때문에 너희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알고 있으니, 결코 그런 상황은 만들지 않을 거다.”

“지금 그런 걸 두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끝내 윤종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화를 내는 윤종을 보며 백천은 오히려 작게 웃었다. 저리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구나 싶어서였다.

그 대상이 자신이라는 게 어떤 면에서는 서글펐고, 또 어떤 면에서는 뿌듯하기도 했다.

“화산에는 내가 필요하다.”

“…….”

“오만도 자만도 아니다. 그저 내가 해야 할 역할이 있는 것뿐이지.”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아직 너로는 안 된다. 알고 있잖느냐.”

“저는…….”

윤종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마음 같아선 백번이고 부정하고 싶은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언제고 백천의 역할을 이어받아야 할 테지만, 그건 말 그대로 시기가 불확실한 미래일 뿐이다.

지금 당장의 그는 결코 백천을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다.

“……결국은 전장에 가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으시겠네요.”

“아마 그럴 거다.”

윤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제 방식으로 사숙을 막을 겁니다.”

“윤종아.”

“말이 통하지 않으면 그 수밖에 없지요.”

몸을 획 돌린 윤종은 단숨에 백천에게서 멀어지며 산을 내려갔다.

백천은 그런 윤종의 등을 말없이 눈으로 좇았다.

아마 이곳까지 올라오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지 않을 수 없었겠지. 윤종이니까.

백천은 씁쓸한 눈으로 윤종이 사라져 간 공간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나와.”

부스럭.

그러자 수풀 한쪽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몰랐을 텐데.”

“감각은 죽었어도 눈치는 남아 있다. 중간에 벌레 소리가 한 번 끊기더구나.”

유이설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에 윤종이 백천을 기습했을 때, 놀라서 달려 나갈 뻔했던 게 들킨 원인이었다.

백천은 고개를 돌려 침음하는 유이설을 바라보았다.

“너도 막을 테냐?”

“심정 같아서는요.”

“막지는 않겠다는 거로구나.”

“같았을 테니까.”

유이설이 백천의 입장이었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는 의미다.

“……그래.”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말을 듣고 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한숨이 나오는 건 막지 못했다.

“……어렵구나.”

백천은 하늘에 떠오른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반쯤 구름에 가린 희끄무레한 달 역시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에서 내려가는 윤종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가슴속에 무언가 가득 들어찬 것 같다. 숨쉬기도 버거울 만큼 답답하다.

백천의 억지 때문이 아니었다. 그 억지를 들으면서 마음 한편에서는 그를 이해해 버리고 마는 자신에게 느낀 답답함이다.

아니, 어쩌면 무력함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만일 윤종이 백천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이런 갑갑한 상황은 겪지 않을 수 있었을 테니까.

이런 상황이 언제고 벌어질 수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막연하게 먼일일 거라 여겼다. 그 안일함이 지금의 상황을 초래했다.

만약 백천이 이번 전쟁 중에 죽기라도 한다면, 윤종은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의 후회 따위는 사소하다. 중요한 건 백천이 죽지 않는 것. 백천뿐 아니라 누구도 죽지 않는 것이다.

‘태상장문인…….’

저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현종을 찾았던 윤종은 아차 하며 얼른 고개를 저었다.

태상장문인이 개입한다면 백천을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는 일이 더 크게 번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태상장문인의 명으로 백천을 잡아 두는 것이 과연 이 사태를 해결하는 완전한 길인지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답답하고 먹먹하다. 사방이 꽉 막힌 듯했다.

마음은 조급하고 간절한데 해결할 방법이 없다.

그 순간, 윤종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는 하나였다.

‘청명.’

이해할 수 없는 건 백천뿐만이 아니다.

그 망할 놈이 왜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는지가 제일 이해되지 않는다.

윤종이 눈치챈 걸 청명이라고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윤종의 발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놈이라면…….’

들어 봐야 한다.

어째서 놈이 침묵을 고수하는지. 당장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이 상황에 왜 이 심각한 일이 남의 일인 것처럼 구는지. 왜…… 백천이 저런 몸으로 전장으로 나가는 걸 좌시하고 있는지.

어둠 속에서 윤종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놈이라면…… 뭐라도 답을 내어 주겠지.’

아니, 답을 내게 만들 것이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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