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533화 (1,534/1,567)

1533화. 뭐 아세요? (3)

“가문의 여식들을 대거 끌어들였다고?”

“끌어들인 게 아니라 지원을 받은 거죠.”

“……비슷한 말 같은데.”

“달.라.요.”

“그렇더냐?”

당군악이 헛웃음을 흘렸다.

당가의 무인들을 새로 편제해 의원으로 쓴다는 발상은 그도 했지만, 설마 거기에 당가의 여인들을 끌어들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그 일에 대한 평가와 앞으로 미칠 영향,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올 반발까지.

하지만 결국 그 모든 생각을 뚫고 당군악의 입에서 나온 말은 따로 있었다.

“잘하고 있는 것 같구나.”

순간 말문이 막힌 당소소가 당군악을 보았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쑥스러워진 당소소가 고개를 획 돌려 버렸다.

“원래 잘했어요. 아버지만 몰랐던 거지.”

“그런 모양이구나.”

“그렇게 순순히 인정하지 마시고요.”

“그럼 그러마.”

“……뭘 잘못 드셨어요?”

당소소가 황당하다는 듯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게, 그의 아버지는 딸에게 더없이 부드러운 사람이었지만, 또 동시에 가문의 일이 얽히면 다른 사람처럼 완고했다.

그런데 지금 당군악에게선 그 숨 막힐 정도의 완고함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라비가 고생하고 있죠.”

“당패가 말이냐?”

“네. 저야 그래도 화산이라도 등에 업어 볼 수 있는데, 오라비야 영 말하는 족족 씨알도 안 먹히니까. 소가주이긴 하지만…… 가주 될 날이 까마득하니 뭐가 되겠어요?”

“걱정할 것 없다.”

“네?”

“당패도 잘할 수 있을 거다.”

잔잔한 그 말에, 당소소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도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당군악의 얼굴에선 다른 뜻을 읽어 낼 수 없었다.

“……정말 이상하시네.”

“이상할 것 없다.”

당군악이 조용히 말했다.

물론 그는 안다. 여러 가지 문제야 당연히 있을 것이다.

의원이 아니라 무인으로서 활약하고 싶은 당가인들의 반발, 아직 까마득하게 어린 저들에게 주도권을 내어 주고 싶지 않은 장로들의 견제, 그리고 졸지에 같이 싸워 주던 당가를 등 뒤에 두고 보호하는 입장이 된 다른 문파들의 볼멘소리까지…….

그 모든 것을 걱정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하지만…….

“아, 참고로!”

“응?”

“나서지 마세요!”

당군악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당소소가 손을 내밀더니 무언가를 끊어 내는 시늉을 해 보였다.

당군악이 쓰게 웃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구나.”

“모른 척하지 마세요. 보나 마나 한 발짝 뒤에서 지켜보다가 뭐 잘 안 된다 싶으면 슬그머니 나설 생각이시죠? 말 안 듣는 가솔을 찍어누른다든가, 다른 문파에 압력을 넣는다든가.”

“내가?”

“아니에요?”

당군악은 딱히 부정하는 대신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당소소가 거 보라는 듯 혀를 찼다. 그러더니 당당히 말했다.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딱히 네 일을 덜어 주고 싶어서는 아니다.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갈 필요는 없어서지.”

“알아요. 하지만 아버지가 대신 해 주기 시작하면 전 언제까지고 아버지의 힘에 기대게 될 거예요.”

“으음.”

당소소가 단호히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인정받고 싶다, 홀로 서고 싶다, 그런 단순한 어린아이의 치기가 아니에요. 사람들이 저를 믿지 못하고 제 뒤의 아버지를 믿는다면 결정적인 순간에 반드시 문제가 생길 거예요. 그러니 저는 저들이 당군악의 딸 당소소가 아니라, 화산의 이대제자 당소소를 믿게 만들어야 해요.”

“믿게 만든다…….”

당군악이 당소소를 빤히 보다 입을 열었다.

“할 수 있겠느냐?”

“해내야죠.”

당군악의 미소가 짙어졌다.

“일단.”

“……네?”

“나는 믿는단다.”

당혹 어린 당소소의 눈과 부드러움이 듬뿍 실린 당군악의 눈이 허공에서 서로 얽혀들었다.

당소소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오늘따라 진짜 이상하시네.”

그녀는 고개를 획 돌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갈 거예요. 바쁘거든요.”

“그러려무나.”

“에이! 진짜!”

쑥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방을 뛰쳐나가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당군악은 빙그레 웃었다.

* * *

“죽겠다…….”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수련에 지쳐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상에 엎어진 조걸이었다.

사람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청명이 놈의 수련은 때때로 그마저도 버겁게 했다. 이미 겪을 만큼 겪어 보았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평소처럼 투덜투덜 불만을 늘어놓는 대신, 함께 방에 들어온 한 사람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느리고 섬세한 손길이 더러워진 검을 닦아 낸다. 그리고 입었던 무복까지 깔끔하게 다듬는다. 익숙한 동작과 함께 흘러나오는 나직한 독경 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절로 차분하게 만들었다.

‘참…….’

조걸은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같은 수련을 소화했으니 윤종이라고 해서 덜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걸과는 달리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빼먹지 않는다.

이건 무위가 높은 것과는 다른 의미의 ‘강함’이다. 조걸은 평생 감히 따라갈 수도 없는.

“뭘 그렇게 보느냐?”

시선을 눈치챘는지, 윤종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아뇨, 뭐…….”

조걸은 괜히 쑥스러운 마음이 들어 대충 얼버무렸다.

“싱겁기는.”

윤종도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검을 닦는 손을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서둘러 정비를 끝내고 조걸을 조금이라도 편히 자게 해 주려는 마음일 것이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조걸이 저도 모르게 한마디를 흘렸다.

“사형.”

“응?”

“그…….”

무언가를 말하려던 그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너답지 않게 왜 그러느냐?”

“불 끄고 얼른 잡시다. 뭘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내일 되면 어차피 다시 더러워질걸.”

“항상 말했지만, 자신을 갈고닦는다는 건 더러워진…….”

“아악! 잔소리! 안 들린다! 안 들려!”

“…….”

윤종이 가느스름한 눈으로 조걸을 돌아봤다. 하지만 조걸은 상상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는 듯 반대쪽으로 획 돌아누워 버렸다.

“저는 잘 거니까 사형도 얼른 주무십쇼.”

“……알았다.”

벽을 보고 누워 버린 조걸을 힐끗 본 윤종의 입에서 나직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사실은 알고 있다. 조걸이 무얼 물으려 했었는지.

‘불안하겠지.’

모를 리 없지 않은가. 하루하루 전쟁이 가까워지고 있다. 그 전쟁에서 모두 숱한 일을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조걸이 두려워하는 건, 그 전쟁에서 겪어야 할 고통이 아닐 것이다.

스릉.

손질 끝난 검을 검집에 밀어 넣은 윤종은 검을 제 허리에 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

조심스레 문이 닫히자 조걸은 윤종이 나간 문을 슬쩍 돌아보았다.

“……휴.”

입에서 그답지 않은, 깊고도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고요로 물든 밤.

화음에 마련된 숙소를 빠져나온 윤종의 발길은 화산으로 향했다. 이미 장문인을 비롯한 모두가 화음에 임시로 터를 잡고 있으니, 딱히 따로 화산에 오를 일은 없는데도 말이다.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그의 발소리만이 울린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화산의 험준한 산길을 오르는 윤종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얼마나 산을 올랐을까?

눈 감고도 오를 수 있는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 더욱 깊은 험지로 접어들었다. 산짐승들조차 피해 가는 곳. 깊고 깊은 화산의 골짜기.

어둠으로 짙게 물든 숲속을 한참 헤치고 나아간 윤종의 귀에 이윽고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파앗!

윤종의 시선이 울창하게 솟은 나무 위로 피어나는 매화를 좇았다.

어두운 산속에서 피어나는 생생한 매화. 그 광경은 화산의 제자인 윤종이 보기에도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윤종이 매화가 피어나고 있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잠시 후, 검 끝으로 화려한 매화를 피우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파아아앗!

티 한 점 묻지 않은 새하얀 무복.

이마에 두른 상징과도 같은 영웅건.

땅을 딛고 도약하고 검을 휘두를 때마다 휘날리는 검고 긴 머리.

화산에 익숙한 이들도 쉬이 발 들이지 않는 깊은 산중까지 들어온 백천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매끈한 턱선에선 땀이 방울방울 튀어 올랐고, 아랫입술은 꽉 짓깨물려 있다. 이것만 보아도 지금 백천이 얼마나 격렬하게 자기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는지 짐작 가능하였다.

그리고 그 순간.

파아아아아아아앗!

강하게 휘둘러진 검 끝에서 화려하고 풍성한 매화가 피어올랐다. 검푸른 숲이 한꺼번에 꽃을 피운 듯한 풍경이 붉게 번졌다.

이 광경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꿈에서 보아도 넋을 잃을 듯하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은 금세 환상이었던 것처럼 사그라들었다.

한철 붉게 피어났던 매화가 끝내 지고 마는 것처럼.

윤종은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백천은 그랬다. 타고난 재능으로 홀로 앞서가던 사람이었고, 차마 좇을 엄두조차 못 내게 하던 사람이다.

하지만 윤종은 알고 있었다. 백천은 그저 타고난 재능만으로 여기까지 온 이가 아니다. 몰래 이토록 노력한 시간이 없었더라면, 결코 지금의 백천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후우, 하아.”

차분하게 검을 갈무리한 백천이 상체를 살짝 굽히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오검 앞에서도 결코 보여 주지 않았던 모습이다.

그렇게 한참 숨을 고르던 백천이 얼굴에 흐른 땀을 훔치며 돌아보았다.

“왔느냐?”

윤종이 살짝 어색한 얼굴로 변명했다.

“……딱히 훔쳐보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백천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같은 무학을 익히는 사형제끼리 훔쳐보고 말고가 어디에 있겠는가? 윤종의 말은, 그가 남몰래 수련하는 모습을 억지로 찾아낸 건 아니라는 변명일 것이다.

“어떠했느냐?”

“화려하네요.”

백천이 몸을 바로 세우고 윤종을 똑바로 응시했다.

땀방울이 검에도 튄 모양으로, 검 끝이 유난하게 반짝였다.

“그뿐이냐?”

윤종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빠르고, 강렬하고…… 또 섬세하고.”

정도(正道) 그 자체.

백천의 검을 논할 때 정도를 빼놓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또 동시에 대담하고 강하다. 그러니 이해한다 해도 백천의 검은 따라 하기가 버겁다.

본디 같은 검법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그 결이 달라지는 법이다.

“그게 다냐?”

백천이 그답지 않게 윤종을 채근했다. 마치 조금 더 칭찬해 보라는 듯 말이다.

윤종은 그런 그를 빤히 응시했다.

항상 가느다랗게 반쯤 닫혀 있어 그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던 윤종의 눈이, 지금은 다소 서늘할 만큼 진중하게 백천을 직시하고 있었다.

어색할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백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알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지. 그래서 이렇게 남몰래 수련을…….”

“사숙.”

윤종의 목소리가 백천의 말을 잘랐다.

그러고도 잠시간의 침묵이 더 이어졌고, 윤종이 무거운 입을 뗐다.

차마 내뱉기 어려운 그 말이, 흡사 혀를 베고 나오는 듯했다.

“죽을 겁니다.”

어디선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겁게 적막하고, 또 어쩌면 서글프도록 고요한, 새벽처럼 서늘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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