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532화 (1,533/1,567)

1532화. 뭐 아세요? (2)

‘왜? 내가 뭐 못 할 말이라도 했냐?’라고 묻는 듯, 백천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한껏 기대었다.

천우맹을 대표하는 각 문의 문주들이 모여 있는 걸 생각한다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자세다.

하지만 사람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쓸 수 없었다. 그들의 시선은 모조리 다른 곳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게…… 벌어져 있다.

늘 강건하게 꾹 다물려 있던 당군악의 입이 바보처럼 헤 벌어졌다. 자다가 머리 위로 운석이 떨어지는 걸 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이다.

당군악의 저런 표정?

장담컨대 딸인 당소소는 물론이고 당군악의 부모조차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 희귀한 광경을 두 눈으로 본 이들의 가슴에는…… 공포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당군악의 소매에서 온갖 독 바른 암기가 쏟아져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조걸이 제일 먼저 의자를 잡고 백천의 곁에서 슬금슬금 물러났다.

‘아…….’

그러다 움찔하며 곁눈질했다. 윤종이 호통을 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서였다.

하지만 그 순간 조걸이 본 것은 이미 저만큼 멀어진 윤종의 등이었다.

‘사형?’

아니, 그만큼 사형제 간의 의리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시더니…….

끼긱!

그 순간 반대편에서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어느새 백천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유이설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더워서.”

“…….”

“진짜로.”

“…….”

이건 절대 배신이 아니다.

사람이 이만큼 사고를 쳐 놓으면 수습할 방법도 없다.

당장 당군악이 현종 앞에서 백천을 패 죽이겠다고 달려들어도, 현종은 ‘허허. 그깟 침으로 사람을 어찌 찔러 죽이겠습니까? 제 검을 쓰시지요.’하고 매화검을 풀어 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이가, 심지어 당소소조차도 필사적으로 당군악의 눈치를 살피는 와중에도 당사자인 백천만은 만사 귀찮다는 얼굴로 당군악을 똑바로 마주 보고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팽팽한 대치 끝에.

“……겪어 봤으니 더 잘 안다는 건가?”

“예.”

“흐음.”

당군악이 비도 대신 말을 날렸다.

“하아…….”

“후욱.”

“끄으응.”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안도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혜연은 연신 불호를 외며 인세에 지옥이 펼쳐지지 않았음을 진심으로 감사했다. 아마 지금 그의 눈에는 당군악이 관음보살쯤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눈에 거의 아수라로 보일 게 분명한 백천이 입을 열었다.

“사천당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담컨대, 천하에서 사천당가를 가장 인정하는 곳이 화산일 겁니다.”

“그렇…….”

당군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종의 목소리가 작고 빠르게 끼어들었다.

“장문대리의 모든 발언은 개인의 의견이며 화산의 공식적인 입장과 다를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다시 말문이 막히고 만 당군악이 멍하니 현종을 보았다.

현종은 목이 삐뚤어지기라도 한 듯 먼 창밖만 바라볼 뿐, 당군악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 그렇……겠지. 장문대리.”

당군악은 생각했다.

언젠가 화산이 다시 불에 타는 날이 온다면, 그건 마교의 짓이 아니라 그의 짓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백천이 말을 이었다.

“당가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건 제가 아니라 오히려 가주님이십니다.”

“……내가?”

당군악의 눈에 의문이 스쳤다. 백천은 그를 보며 단호히 답했다.

“예. 소소의 말은 틀린 게 없습니다. 당가는 소수라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고, 그들이 등 뒤에 서 있을 때 우리는 두 배는 더 열심히 싸울 수 있습니다.”

“음…….”

“소소의 제안이 당가의 방식에 맞지 않는다면 거절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소소의 말이 틀렸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건 오히려 저희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건…….”

백천의 시선이 당소소와 당패에게로 향했다.

“지옥과도 같았던 그곳에서 우리의 목숨을 지켜 준 이들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오검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찌 보면 조금쯤 도발적이어 보일 수 있는 시선으로 당군악을 응시했다.

그 시선 속에서, 당군악은 속에서 울컥 알 수 없는 감정이 치미는 걸 느꼈다.

뿌듯함? 대견함?

아니다.

순간적으로 당군악을 휘감은 감정은…… 다름 아닌 분노와 증오였다.

평범한 이라면 발끈하여 그 분노를 여과없이 저들을 향해 쏟아부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당군악은 평범한 이가 아니었다.

그는 화를 내는 대신, 순간적으로 자신을 휩쓸었던 그 감정에 당혹했다. 의문을 품었다.

이토록 분노할 일인가? 순간적으로 살의가 일 만큼?

그리고 이내 그는 제 감정의 원인을 알아내었다.

이건 저들이 그에게 ‘대항’했기 때문에 울컥하여 인 감정이 아니다. ‘저들’이 대항해서 치민 감정이다.

쉽게 풀어 말하자면…….

‘이제는 아이가 아니로구나.’

새끼 늑대가 큰 늑대의 다리를 물고 늘어지면, 큰 늑대는 새끼 늑대를 핥아 주거나 다치지 않을 만큼 가볍게 물어 훈계한다.

하지만 더는 새끼가 아닌 늑대가 다리를 물어 오면, 그때는 둘 중 하나가 굴복해야 끝나는 싸움이 벌어진다.

사람 역시 다를 바 없다.

이전에도 저들과 논쟁하는 일은 왕왕 있었다. 그런데도 이번에 그의 감정이 이토록 사뭇 다른 건, 지금의 자신이 저들을 대등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장문대리.”

“예.”

“지금 장문대리의 그 말은 사질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아닙니다.”

백천이 뒷말을 듣지도 않고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사숙으로서 나선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나선 것입니다. 당소소는, 그리고 당 소문주는 제게 있어 당연히 존중해야 할 무인들입니다. 그 신분 때문이 아니라, 능력으로 말입니다.”

오검과, 심지어는 청명마저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당소소의 눈가가 붉어졌다.

당군악은 이 광경을 두 눈으로 가만히 보았다. 입가가 살짝 꿈틀댔다. 그가 같은 눈높이로 인정한 이들이, 그의 딸과 아들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는 건…….

“마지막으로 묻겠네.”

“예.”

“천우맹 내에서 가장 많은 전투를 겪어 본 이로서, 해남에서부터 이곳까지의 역경을 뚫어 낸 이로서, 그리고 화산의 장문대리로서 저 둘의 주장을 어찌 생각하는가?”

“…….”

“당가가 그 길을 선택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보는가?”

백천의 눈빛이 조금 더 또렷하고 선명해졌다.

“당가의 일은 감히 제가 논할 것이 아닙니다.”

“……그런가?”

당군악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백천이 덧붙였다.

“하지만 만약 제가 사천당가의 가주라면, 훗날 당가를 이끌어야 할 이의 경험과 의견을 무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소소를 염두에 두고 물은 것이나 답은 당패를 내세워 돌아왔다. 하지만 상관은 없다. 당소소와 당패 모두 의견을 모았으니 말이다.

당군악의 표정이 무거웠다. 모든 이들이 말없이 바라보며 그가 내릴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군악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잠깐 향했다.

말 많고, 시끄럽고, 언제 어디서고 나서기를 좋아하는 이다.

그런 그가 이 이야기가 시작된 이후 단 하나의 의견도 내지 않았다. 그저 팔짱을 끼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오검의 등 뒤에서 말이다.

당군악이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나는…….”

* * *

“아악!”

조걸이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또다시 손가락 끝에 바늘이 푹 박혔다. 윤종은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엄살 좀 그만 부려라. 칼이 배를 쑤셔도 신음 한 번 안 내던 놈이.”

“끄응. 이거랑 그거랑 아픈 영역이 다르다니까요?”

“……평생 당가는 못 이기겠네.”

“예?”

“아니다.”

윤종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당군악은 결국 당소소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전쟁 이전까지 시험해 보고 여의치 않을 시에는 바로 되돌리겠다는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어쨌든 사실상 승인과 다름없는 말이다.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일 아닙니까?”

조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윤종을 보며 말했다.

“아니, 한 문파를 잘게 쪼갠다는 건 결국 가주의 명령이 일일이 하달될 수 없다는 소린데, 그건 당가 사람들의 목숨을 타문의 지시에 맡긴다는 거잖습니까.”

“그런 셈이지.”

“사형이라면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

“대단한 일이지요! 사형은 설 소궁주의 명에 따라 죽을 수 있습니까?”

“소궁주께서는 훌륭하신 분이니, 그 명에 당연히…….”

“한 총관이면요?”

윤종이 입을 다물었다. 대신 눈썹이 꿈틀대었다.

“아니, 한 총관도 아니고 빙궁의 대주 중 한 명이라면 어쩌실 건데요?”

“끄응.”

결국 앓는 소리와 함께 윤종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네 말도 맞다. 확실히 이전까지의 방식대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

“그렇죠?”

“그러니 당가주님께서 대단하신 것 아니겠느냐? 그걸 두말없이 받아들이셨으니까.”

“……지금이라도 철회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바느질하기 싫어서 하는 말은 아니고?”

우물쭈물하는 걸 보니 맞는 모양이었다.

“꾀부리지 말고 부지런히 해라. 똑바로 못 하는 놈들은 신의단(迅醫團)에 끌고 간다는 소소 말 기억하지?”

“……걘 대체 뭘 먹고 커서 그렇게 인정사정이 없나 몰라요.”

“독 먹고 컸지.”

“아…….”

신의단. 당소소와 당패의 의견을 바탕으로 임시 설치된 천우맹의 단독 기구다.

지금 당소소는 장로급을 제외한 당가의 무인들과, 의술 및 신법을 익힌 당가의 여식들을 모아 편제를 나누고 교육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물론 명목상 신의단의 단주는 소가주인 당패이고, 실제 단주는 당군악이지만, 당소소는 화산에서 그렇듯이 신의단의 실세 역할을 톡톡히 하는 중이었다.

조걸은 여전히 억울했다.

“아니, 결국은 제 말대로 다 됐는데 우리한테 이런 건 왜 시키는 거랍니까!”

“이미 열 번은 말했잖으냐? 아무리 뒤에 의원이 있다고 해도, 싸우는 이가 간단한 응급처치를 제대로 할 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천양지차라고. 그것만 할 줄 알아도 열 명 중 세 명은 살릴 수 있다고.”

“끄으으응.”

조걸이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논리로는 이길 방법이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하긴 하는데, 아무래도 영 그의 성미에 안 맞는다.

“아니! 사숙은 이게 대체 뭐가 그렇게 재밌습니까?”

“……이거 은근히 하다 보면 중독된다.”

“대단한 규수 나셨네, 진짜!”

반면에 백천은 거의 물 만난 물고기나 다름없었다. 주변에서도 다 감탄하며 구경할 정도였다.

“이야……. 이거 봐. 간격이 정말 머리카락만큼의 차이도 없어.”

“촘촘한 거 보십쇼. 빗물도 거르겠네.”

“사숙. 매화 놓을 수 있습니까, 매화?”

“자수 아니라고!”

조걸은 너덜너덜한 제 천을 툭 내던지며 삐쭉거렸다.

“아니, 우리가 이거 잘해서 뭐 하냐고요. 검이나 잘 휘두르면 되지.”

“검을 잘 휘두르려면 해라.”

“예?”

윤종이 쥐고 있던 헝겊을 펼치며 내려놓았다. 그의 바느질 역시 백천의 것과 비슷하게 한 땀, 한 땀이 촘촘하고 균일했다.

“내가 가만 지켜보니 이걸 잘 못 하겠다고 악을 쓰는 놈들에겐 공통점이 있더구나.”

“……무슨 공통점이요?”

“성질 급하고, 과격하고, 정해진 투로보단 제 마음 뻗치는 대로 검 휘두르기를 더 좋아하는 놈들.”

“어?”

“그래, 맞다. 너 같은 놈들.”

윤종이 혀를 찼다.

“이건 실력 이전에 인내심의 문제다. 그리고 검 역시 다를 게 없지. 빠르고 강하게 휘두르고 싶다는 충동을 이겨 내고 억제하지 못하는 검은 사파의 검일 뿐이다.”

“…….”

“더 강해지고 싶다면, 검을 억제하는 법부터 익혀라.”

“맞는 말이다.”

백천마저 윤종을 거들고 나섰다.

“바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놈들이 검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겠느냐?”

“…….”

“검이든 바늘이든 화산 검수의 손에 들린 이상 완벽해야 한다. 그러니 다들 구시렁대지 말고 최선을 다해라. 그게 너희와 내 목숨을 살릴 테니까.”

“예!”

“명심하겠습니다, 사숙!”

백천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헝겊을 보려다 문득 시선을 틀었다. 눈에 걸리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벌떡 일어나 옆 탁자로 다가갔다. 눈에 걸렸던 건, 거의 걸레짝 같은 헝겊이었다. 말 그대로 엉망진창인.

“이건 누구 거냐?”

“……어, 그게…….”

“바른대로 말해라. 어느 놈이 이따위로 바느질했어! 내가 검술을 하듯이 정교하게 하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 어떤 놈이냐!”

“사숙. 그게 말입니다.”

“똑바로 말 안……!”

“그, 그거 청명이 겁니다, 사숙.”

“…….”

어린애가 장난으로 죽죽 그어 댄 듯한 헝겊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백천은 말없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얌전히 다시 바느질을 시작했다.

* * *

“어떠냐?”

“아아아악!”

놀란 당군악이 움찔하여 뒤로 바짝 물러났다.

그냥 어떠냐고 물은 것뿐인데, 그의 귀엽고 예쁜……. 하지만 때때로는 아비인 그조차도 껄끄러운 딸내미가 발작을 일으켰다.

“왜 말을 안 들어 처먹냐고! 왜!”

“…….”

“아니, 자기들이 의술을 더 알면 그게 뭐 어쨌다고! 전장에나 나가 봤나? 칼 날아오는 와중에 사람 치료해 본 적 있나? 하여튼 이놈이고 저놈이고 한마디 못 해서 죽는 병에라도 걸렸나, 주둥이를 가만히 못 놔두고!”

그래도 가문의 오빠들이고 언니들인데 이놈 저놈에 주둥이는 좀 그렇지 않으냐…….

……라는 말을, 당군악은 마음속으로만 해 보았다.

“어려운가 보구나.”

“어렵죠!”

탕!

당소소가 바닥을 거세게 내리쳤다. 그러더니 눈을 이글이글 태우며 외쳤다.

“하지만 해야죠!”

“……흠.”

“쉽자고 하는 일이 아니라, 해야 해서 하는 일이니까요! 지금 제가 골치 아픈 게 죽어 가는 사람 앞에 두고 우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실로 단호하고 의지로 가득한 말이었다. 의욕적인 딸을 보며 당군악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내 딸답구나.”

가주이자, 아버지로서 한 말이었다.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