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1화. 뭐 아세요? (1)
가슴 떨리는 말이었다.
당소소의 말을 이해하는 이에게도, 당장은 이해하지 못한 이들에게도 말이다.
하지만 분명히 전자에 속하는 당군악은 반응이 없었다. 표정에 한 점 변화조차 없이 그저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당소소를 빤히 응시할 뿐이었다.
“의료라.”
“네.”
“당가를 의원으로 써먹겠다는 것이냐?”
당소소가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그게 다는 아니에요. 단순한 의원이라면 의미가 없죠.”
“하면?”
“전장에서 제 몸을 스스로 지킬 수 있고, 부상자가 없을 때는 누구보다 든든하게 뒤를 받쳐 줄 수 있으면서, 나아가 사람까지 살릴 수 있는 그런 의원이죠.”
당군악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당장 반박을 하지는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버지가 주는 압박 때문인지, 아직 풀어놓지 못한 말이 많기 때문인지, 당소소는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화산에 입문해 숱한 전장을 누비며 느낀 거예요.”
“계속해라.”
“전장에 의원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미 당가는 전장에 있다. 사천당가는 적이 있는 곳에 가장 먼저 달려갈 테니까.”
“네. 맞아요. 당가는 적을 두려워하지 않죠. 하지만 지금 같은 형태로는 모든 전장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어요. 절대로.”
잠자코 듣던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소소가 확신 어린 어조로 말했다.
“저는 당가를 소수로 나누어, 각 문파나 작전을 맡은 이들과 동행시키는 게 사천당가라는 문파의 힘을 가장 크게 발휘할 방법이라고 확신합니다!”
심지어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는지 그녀가 첨언했다.
“독도 암기도 다 소진되어 남지 않는다 해도, 당가의 의술은 어디로 가는 게 아니니까요.”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가주님.”
당패가 다시금 당소소를 지지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 둘 말고는 누구도 감히 입을 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사안이 당가에게 얼마나 민감한 부분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청명마저도 입을 꾹 다문 채 당소소와 당군악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막힐 만큼 긴 정적 끝에, 마침내 당군악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은 생각이구나.”
긍정의 말에, 당소소의 얼굴이 일순 환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러나 성급해.”
“……아버지!”
당군악이 고개를 저었다.
“네 경험을 녹여 내어 당가에 적용해 보려는 시도는 분명 훌륭했다. 그렇게 보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가문을 조금씩 발전시킬 수 있다면, 당가는 언제고 예전의 위상을 되찾을 것이다.”
얼핏 긍정하고 칭찬해 주는 말로 들리나, 당소소는 그 말속에서 단단하고 견고한 벽을 느꼈다. 무슨 수를 써도 넘기 어려울 만큼 까마득히 높은 벽을 말이다.
“하지만 너는 너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다. 저들이 그 사선을 넘을 수 있었던 건, 네 의술이 훌륭했기 때문이 아니다.”
당소소가 말없이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바로 저들이 강했기 때문이지.”
“그건…….”
“의술이라는 건 쓰러진 이를 살려 내고, 다시 싸우게끔 해 줄 수 있지. 하지만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설령 화타라 해도 부상을 입고 쓰러진 이를 그 자리에서 곧장 일으킬 능력은 없어.”
당소소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단기 결전만이 전부는…….”
“끝까지 들어라.”
나직하고도 준엄한 목소리였다. 당소소는 거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결국 당가가 뒤에서 부상자를 치료하는 상황은 두 사람의 공백을 만들어 낼 뿐이다. 당장 칼질 한 번, 비도 한 번에 승부가 갈릴 상황에서조차.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이 말엔 당패의 얼굴도 굳어졌다.
“가주님. 하지만 그건…….”
“사패련과의 싸움이 여유를 두고 치를 수 있을 만큼 쉽더냐?”
“…….”
“생존율을 높이는 거, 물론 좋다. 하지만 그것도 이겼을 때나 유의미하다. 사패련과 싸움에서 패한다면 생존자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렇게 들렸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검을 쓰고, 암기를 던지고, 고통 속에 익혀 낸 독을 활용해 활약하고 싶은 마음은 무인으로서 당연한 것.”
당군악이 제 아들과 딸을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당연한 마음을 억누르고,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이들을 구하겠다고 결심하기란 쉽지 않았겠지.”
당패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당군악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음이면 됐다.”
비록 가주인 당군악의 방향과는 다르나, 이들의 방향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
“부족한 것을 채운다 해서 무조건 더 나은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다. 의원이 동행한다고 극적인 효과를 낼 수 있었다면, 사천당가는 이미 천하제일문파로 불리고 있었을 것이다.”
당패는 허를 찔린 듯 움찔했다. 아무래도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못한 듯했다.
“전쟁에서 중요한 건, 결국 상대보다 더 강한 힘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게 무력이든, 계책이든 말이다.”
당군악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누구든 자신이 본 걸 가장 강렬하게 인식하고 강하게 믿는다. 너희가 겪은 일은 너희에게 자연스레 길을 열어 주었겠지만, 한 사람의 시선과 한 문파가 보는 시선은 다를 수밖에 없지.”
이쯤 되면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다음에 당군악이 무슨 말을 할지.
그리고 가주로서 당군악이 내린 그 결정이 그리 틀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러니, 너희의 제안은 거부…….”
“틀려요.”
……하지만 한 사람.
처음 말을 꺼낸 당소소조차 애써 힘겨운 수긍을 하려는 와중에도 당군악에게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이가 있었다.
순간 현종의 얼굴에 당혹한 기색이 번졌다.
“이, 이설아!”
“틀려요. 그 말.”
장내에 자리한 이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파래졌다.
천우맹이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집단이기는 하나, 그래도 일개 제자가 한 문파 수장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건 보기 드문 일이다.
게다가 이건 단순히 천우맹의 안건이 아니다. 이 일에 대해 옳다 그르다를 논할 수 있는 건 오직 당가 사람뿐이다. 그렇기에 맹주인 현종조차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그, 그럼 안…….”
“소소가 있으니까.”
정작 유이설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당혹한 눈빛에도 전혀 압박을 느끼지 않는 듯 태연했다.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소소가 있으니까. 싸울 수 있어요.”
당군악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말인가?”
“음.”
그러자 유이설이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침묵했다.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다. 그녀가 느끼고 있는 바를 어찌 전달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다행히 고민은 길어지지 않았다. 굳이 그녀가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유이설이 대답 대신 옆으로 물끄러미 시선을 보냈다.
“…….”
그 시선을 받은 이가 움찔하고는 유이설을 마주 보았다. 이내 그녀의 의도를 읽은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저 역시 사매의 말에 동의합니다.”
“배, 백천아!”
“아니, 이놈들이?”
운암이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못했다.
만약 여기서 일이 터진다면 오늘은 ‘화산 백자 배의 난’으로 기억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난(?)의 당사자인 백천은 순식간에 태연한 신색을 되찾고 차분히 말했다.
“가주님께서는 전력을 높이는 게 이기는 방법이라 하셨습니다.”
“그렇네.”
당군악의 말투도 달라졌다. 아무리 그라도 백천을 당패나 당소소처럼 편히 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매가 하고자 한 말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있는 힘을……. 아니, 없는 힘마저 짜내서 싸워야 하는 상황을 몇 번이고 겪었습니다.”
“…….”
“그리고 그때 우리가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등 뒤에 소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기서 쓰러진다 해도 소소가 나를 치료해 줄 테니까요.”
당군악의 미간이 점점 더 좁아졌다.
“믿고 목숨을 맡길 이가 등 뒤에 있을 때 나오는 자신감은, 겪어 보지 않은 이들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그리고 얼마나 검 끝을 가볍게 만드는지 말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당군악이 살짝 냉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그게 정말 유의미했다면 당가는 천하제일문이 되었어야 옳네. 등 뒤에 의원이 있기로는 당가가 제일인 것을.”
“그렇지 않습니다.”
“음?”
“슬프게도 당가만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 자신감을 얻을 수 없는 문파 아닙니까. 내가 의원인데 다른 의원이 등 뒤에 있다는 게 뭐 그리 든든하겠습니까?”
당군악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논리고 나발이고, 이런 식의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으니 일순 궁해진 것이다.
“그리고 저는 사실 당가에게도 의원을 등 뒤에 두고 싸우는 점이 효과가 없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이는 얼핏 당가가 천하제일문파가 되지 못한 건 단순히 약했기 때문이라고 들릴 수 있다. 당군악이 눈살을 찌푸렸다.
“말을 조심하게.”
“아니요. 생각하시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당가는 의원을 뒤에 두고 싸우는 덕을 충분히 누리고 있지만 느끼지 못했을 거란 의미입니다. 사실 의술이란 능력은 평시엔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음?”
“평소 당가가 죽을 각오로 집단전을 치를 일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런 대규모 전쟁이 아니면 의술의 효과가 나오지 않을 겁니다.”
“아…….”
“그러네?”
조걸과 윤종이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가의 의술은, 말 그대로 목숨이 위험할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니는 힘이다.
“거꾸로 말하면 당가는 위기에 처했을 때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는 거겠죠. 그러니 가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전장에서 가장 강하다는 당가의 비밀이 꼭 독과 암기뿐만은 아닐 수 있단 소립니다.”
당군악이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흘렸다.
“으음.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네.”
“예.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자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당군악 역시 완강했다.
아니, 애초에 당군악은 완고한 사람이다. 특정 몇몇에만 유한 모습을 보일 뿐.
“자네의 말이 맞는다고 해도 고작해야 개인의 감상일 뿐이네.”
또다시 돌아온 거절의 말에 조걸과 윤종이 머리를 감쌌다. 유이설의 표정도 드물게 찌푸려졌고, 당소소의 입에서도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백천은 이 대화가 끝나지 않았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개인의 말이라…….”
그가 당군악을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하나 여쭙겠습니다.”
“무엇을 말인가.”
“사천당가의 역사에 당가 사람이 타문의 뒤를 보조해 준 적이 있습니까?”
“그건…….”
찾아보자면야 있긴 있다.
과거 마교대란에서 당가의 암존이 화산의 검존과 바늘과 실처럼 붙어 다녔다고 하니까.
하지만 암존은 전쟁 중 사망하여 그때의 일을 자세히 전하지 못했다.
“없지 않습니까?”
“일단은 그렇……겠군.”
“그럼 실제로 당가 사람을 등 뒤에 두고 목숨 건 싸움을 해 본 건 저희밖에 없다는 거로군요.”
차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저 오검 놈들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용하다 느껴질 만한 길을 걸어왔다. 오검이 돌연 삼검이나 이검쯤으로 바뀌었다 해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 험한 길이었다.
“심지어 가주님께서도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적 없지 않습니까?”
“자네의 말이 맞긴 하네만, 이건 당가의…….”
“저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데.”
백천은 무려 당군악의 말허리를 뚝 잘라 버렸다. 동시에 오검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겪어 본 우리가 도움이 된다는데, 왜 겪어 보지도 않은 분들이 그건 도움이 안 된다고 단언하시는 겁니까? 뭐…….”
“…….”
백천이 흐린 말끝이 ‘뭐 아세요?’임을 짐작한 모두가 흐뭇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저 미친 새끼…….”
청명이 넋 나간 얼굴로 흘린 그 말이, 이곳 모두의 심정을 절절하게 대변해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