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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30화 (1,531/1,567)

1530화. 이제 내 차례야. (5)

당가를 해체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가 여식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다른 문파의 장문인들과 오검은 물론이고 청명마저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 말았다.

“시, 시주⋯⋯. 돌으셨소?”

혜연까지 이렇게 말할 정도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당군악의 눈빛에는 황당함과 노기, 서글픔까지 모두 뒤섞여 있었다. 그런 시선이 현종과 운암에게로 돌아가자 두 사람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오, 오해십니다!”

“소소야!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불똥이라도 튈세라, 현종과 운암이 펄쩍 뛰었다.

당소소가 아무리 화산의 제자라지만, 그들이 이런 말을 시켰을 리 있겠는가? 정말로 그랬다면 자다가 인중에 대침이 꽂혀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허⋯⋯.”

당군악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떠나보낸 딸내미라지만, 어쨌거나 금이야 옥이야 업어 키운 딸인데 그 입에서 가문을 해체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늘 엄정하던 눈에 물기가 차오르려는 찰나, 당소소가 덧붙였다.

“과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정확하게는 당가의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말이에요.”

“체제를 바꾼다?”

이 말에는 흥미가 생긴 듯, 당군악이 당소소를 다시 바라보았다. 딸의 눈빛은 곧고 맑았다. 농담도, 그냥 던져 보는 말도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당가의 세가 약해진 것을 논함이냐?”

“아니에요.”

당소소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사천당가의 전력이 온전했더라도⋯⋯. 아니, 더 융성했더라도 해야 할 일이에요.”

“좀 더 정확하게.”

“당가는 전투에 큰 도움이 안 돼요.”

당군악의 눈이 꿈틀했다.

이는 딸이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는 발언이다. 전장에서 누구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당가의 힘을 평가절하하다니.

하지만 호통을 치려던 당군악은 이어진 소소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 같은 체제로는 당가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어요.”

현종이 우려 섞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소소야, 그건⋯⋯.”

“맹주님.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당군악이 현종을 말리며 말했다.

“제 여식이 그냥 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들어 보고 싶습니다.”

“으음.”

현종이 희미하게 침음성을 흘리며 물러났다.

당군악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당소소를 보았다. 생각해 보면 당소소만큼 안에서 보는 당가와 밖에서 보는 당가를 동시에 알 수 있는 이는 없다. 당가의 폐쇄성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웠던 만큼 뭔가 가치 있는 말을 해 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계속하거라.”

“네.”

당소소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물론 당가는 전장을 휩쓸 능력을 갖추었어요. 하지만 당가의 제일 큰 문제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두 명, 세 명이 한다는 거죠.”

“⋯⋯.”

“한 사람이 흩뿌리던 독을 두 사람이 같이 뿌린다고 해서 그 위력이 두 배가 되지는 않아요.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던지는 암기를 두 사람이 던진다고 해서 두 배로 멀리 가는 것도 아니죠.”

“으음.”

당군악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틀린 말이다. 위력을 높이지는 못해도 범위를 넓힐 수 있고, 거리를 늘리지는 못하더라도 더 촘촘히 공간을 채워 낼 수 있다.”

“네. 그것도 맞는 말이에요. 그런데 그게 정말 효율적인가요?”

“그게 무슨 말이냐.”

“설령 그게 모두 맞는 말이라고 해도, 문제는 여전해요. 범위를 넓게 점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독을 뿌려야 하고, 촘촘하게 암기를 박아 넣기 위해서는 더 많은 암기를 던져야 하죠.”

당소소의 얼굴에는 확신과 의지가 가득했다.

“그건 결국 독과 암기의 소모를 빠르게 만들 뿐이에요. 짧은 전투라면 모를까, 교전이 지속된다면 결국은 독도 암기도 바닥을 드러내겠죠. 그때 당가가 뭘 할 수 있죠? 뒤에서 구경하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어요.”

“그건⋯⋯.”

“저는 소소의 말에 공감합니다.”

당군악의 시선이 당패에게로 향했다.

그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해남을 탈출하며 저도 확실히 느낀 바입니다. 빠르게 결판이 난다면 당가는 세상 어느 문파보다 강한 위력을 보일 수 있습니다. 특히 여럿이 싸우는 전투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하지만 그 전투가 조금만 더 길어지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집니다.”

당군악의 눈이 싸늘해졌다.

당패는 당가의 소가주다. 소가주가 지금 나서서 사천당가를 폄훼하고 있다.

“소가주는 말을 조심해라. 당가는 그리 허술하지 않다. 당가의 선대들이 그런 문제를 과연 몰랐겠느냐?”

“예. 어떻게든 대비할 수 있었을 겁니다. 화로를 모조리 잃고, 독고(毒庫)를 상실하지 않았다면요.”

당군악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들의 말이 아픈 부분을 찔렀다.

“두 가지를 복원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랍니다.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전쟁이 이어지다 보면 분명히 독과 암기의 생산이 소모되는 양을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겁니다. 그때 당가가 과연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근본적인 한계와 상황적인 한계.

두 남매는 당가의 아픈 부분을 제대로 찌르고 있었다. 당군악의 입장에서는 실로 불편하고도 껄끄러웠다.

그럼에도 당군악이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가 섣불리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저 남매가 현 당가에서 가장 처절한 전투를 직접 겪어 본 당사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굳이 한 가지 이유를 더 추가하자면.

“너희끼리는 이미 생각을 나눈 모양이구나.”

“네.”

“그렇습니다.”

입매를 굳힌 당군악이 짧게 말했다.

“계속해 봐라.”

“당가가 명성을 떨치고자 한다면,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독과 암기를 충분히 준비하고 한 번의 전투에 투입될 때 남김없이 소모한 뒤에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독과 암기가 떨어진 당가를 다른 문파들이 굳이 잡아 두려 하지 않을 테니 명분도 충분할 것입니다.”

당군악의 눈썹이 꿈틀했다.

저 말인즉, 명분과 잇속만 챙기고 희생을 최소화하자는 뜻이다.

당가의 입장에서는 솔깃할 수 있으나, 동시에 다른 문파 사람들이 듣기에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이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당군악은 이런 문제에 대해 신경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애초에 사천당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니므로.

“그게 아니라면?”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당패가 단호하게 말했다.

“힘을 과시하는 것도, 기물에 의존하는 것도 아닌, 사천당가가 모두와 운명을 함께할 수 있는 길을요.”

당군악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화산과 함께 싸우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건가?”

그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장강에서 사천당가가 얼마나 강했는지. 화산과 손발을 맞춰 싸우던 당가가 얼마나 위협적이었는지를.

그러나 당패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더니 물었다.

“당가가 화산을 보조하기 위한 문파입니까?”

“⋯⋯.”

“가주님의 말씀대로, 화산의 뒤를 따른다면 약점을 줄이고 위력을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결국 사천당가라는 커다란 문파가 오직 화산의 보조만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소리가 될 뿐입니다.”

“음.”

“그게 천우맹에 얼마나 큰 부담이 되겠습니까?”

당군악이 당패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새삼스러운 마음 때문이었다.

당패는 사천당가의 위상을 끌어 올리는 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었다. 그 마음이 지나칠 때는 당군악의 패배를 두고 보지 못하여 청명에게 암습까지 가하지 않았던가?

그랬던 그가 지금 사천당가가 다른 이들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공만을 취하고 피해는 줄일 방법이 분명 존재하는데도 말이다.

그 변화에 마음껏 기꺼워할 수도, 아쉬워할 수도 없다. 당군악이 길게 숨을 뱉으며 입을 열었다.

“들을 건 충분히 들었다. 그럼 중요한 건 너희가 준비한 수겠구나. 어찌해야 한다고 보느냐?”

당패가 대답 대신 당소소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제부터는 당소소의 영역이다.

“가주님께서는 당가가 뭉쳐 있을 때 제힘을 발휘하는 문파라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말이 틀렸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본 당가의 진짜 강점은 바로 다재다능하다는 거예요.”

“다재다능?”

“네. 당가는 모든 걸 할 수 있습니다. 주위의 변화에 민감하기에 척후가 될 수있고, 암기를 통해 혼자서 수십을 지원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부상 입은 이들을 살릴 수 있어요. 당가 사람 하나가 붙는 것만으로 생존율 자체가 달라질 거예요.”

그 말에 크게 동의하는 건 바로 오검과 소문주들이었다.

그들은 이번 해남행에서 의원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실감했다. 과장 조금 더해서, 당패와 당소소가 없었다면 해남을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일행의 절반 이상은 강남 땅에 묻혔을 것이다.

아니, 전력을 보존할 수 없었으리라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몇몇을 제외하고선 살아 돌아오는 것조차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는 건?”

“당가의 인원을 나눠야 해요. 지금처럼 한곳에 뭉쳐서 문파 단위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넷에서 다섯 정도를 한 조로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전장에 나서는 이들을 지원할 수 있어야 해요.”

당군악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엇을 위해서지?”

“정예 무인의 기동성에 발맞춰 따라붙을 수 있는 기동의료(機動醫療)를 위해서요.”

당군악의 눈이 심유하게 가라앉았다.

“그게⋯⋯.”

뭔가 생각할 거리가 많은지, 그는 다시 입을 닫았다. 그렇게 한참의 고심 끝에 당군악이 고개를 들었다.

“당가를 쪼갠다는 것은 그 모든 이들에게 내 명령을 전달할 수 없게 됨을 의미한다.”

“네.”

“그건 다시 말해, 당가의 가솔들이 당가가 아닌 다른 이들의 명을 들어야 함을 의미하고.”

“네, 가주님.”

당군악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날카로워졌다.

“그 명을 내리는 이는 다름 아닌 타문의 가주들이고, 장로들이고, 또한 대주들이 될 것이다. 당가의 가솔이 소가주도 아닌 일개 대주의 명을 들어야 함을 뜻한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고 있느냐?”

“예.”

이번에 대답한 이는 당패였다. 당군악의 두 눈에서 노기가 넘실넘실 쏟아져 넘쳤다.

이건 어찌 들으면 당가를 해체하자는 말보다 더한 소리였다.

당(當)씨 성이 아닌 이는 철저하게 배척해 온 당가가 타문의 지시를 따르는 굴욕 아닌 굴욕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니까. 명령을 내리는 주체가 천우맹이라면 모를까,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해하고 있다라⋯⋯.”

노기는 곧 새파란 살기가 되어 흘렀다.

제 자식을 향해서 뿜어내는 살기. 이는 곧 지금 당군악이 한 아이의 아비가 아닌, 오롯이 한 가문의 가주의 입장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

“그 모든 걸 감수해야 할 이유를 말해라.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면 가문을 모욕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당군악으로서는 나름의 각오를 동반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대답은 맥이 빠질 만큼 쉽게 나왔다. 이미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확신하니까요.”

“무엇을?”

당소소가 당군악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한 점 흔들림 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당군악에게 오롯하게 전해졌다.

“이 당가의 움직임이 전장의 판도를 바꿀 거예요.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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