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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29화 (1,530/1,567)

1529화. 이제 내 차례야. (4)

“공격이라니⋯⋯. 청명아, 너 설마⋯⋯.”

현종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청명을 보았다.

“에취!”

그 순간 청명이 크게 재채기하더니 코 밑을 슥슥 문질렀다.

“고뿔도 아니고, 갑자기 뭔.”

“⋯⋯.”

“에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뭐 머저리도 아니고, 공격하겠답시고 혼자 칼 들고 사패련에 난입이라도 할까 봐요? 장일소 모가지 따 온다고?”

“아니냐?”

“아니었나?”

“아니었다고?”

“근데 이것들이?”

청명이 눈을 부라리자 오검이 스리슬쩍 시선을 피했다.

한편 임소병은 접은 부채로 제 어깨를 느릿하게 두드리며 청명의 말을 곱씹었다.

‘거꾸로 올린 탑이라.’

틀린 말은 아니다. 그 탑이 너무도 거대하고 화려해서 느끼지 못했을 뿐, 사패련은 확실히 기형적인 세력이었다.

그간 천우맹에서도 같은 맥락의 걱정을 해 왔는데, 그게 바로 청명의 존재였다.

청명은 천우맹의 연결고리이며 화산의 근원이다. 그가 무너지는 순간 천우맹도 화산도 결코 이전 같을 수는 없을 터.

그렇다면 사패련은 어떤가?

장일소가 없는 사패련이 사패련일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천우맹보다도 심각하다.

청명이 없어진다 해도 천우맹은 그 껍데기나마 유지되겠지만, 장일소가 없어진 사패련은 사분오열이라는 말도 무색할 만큼 갈기갈기 찢어질 게 분명하다.

사패련이 그 위세를 떨치는 이 시기가 마치 거짓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생각해 보면 뻔한 문제였다. 그런데 이 뻔한 걸 제대로 짚어 낸 이가 지금까지는 없었다.

임소병이 입을 열었다.

“결국, 대국을 둬서는 못 이긴다는 말이로군요.”

그 말에 청명의 얼굴이 뚱해졌다.

“아니, 못 이길 것까진 없는데⋯⋯.”

“아아. 제가 표현을 잘못 골랐군요. 그럼 피해가 커진다, 이거지요?”

“그렇지! 그렇지!”

그제야 마음에 드는 듯 청명의 얼굴이 흡족해졌다. 임소병은 피식 웃었다.

“반상(盤上)을 사이에 두고 앉아서 수를 교환하는 방식으로는 패군을 이길 이가 드물 겁니다. 더구나 저쪽이 선수까지 잡는다면 천하의 국수라도 이기지 못하겠지요.”

“으음.”

여러 사람의 얼굴에 수심이 번졌다.

“그러니 이길 방법은 둘뿐입니다. 하나는 다 뒤집어엎고 바둑판을 놈의 대가리에 박아 버리는 것이고.”

“⋯⋯미치셨나?”

“정신 차리십시오, 녹림왕.”

임소병이 태연하게 부채를 촥 펼쳤다.

“다른 하나는⋯⋯ 놈을 반상 안으로 끌어내리는 거지요.”

임소병의 목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지자, 모두의 얼굴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장일소의 목숨.

그게 이 모든 것을 끝낼, 그리고 전 중원에 흐를 피를 조금이나마 줄이는 방법이다. 모두가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방법은?”

“저야 모르지요.”

당군악의 눈썹이 꿈틀했다. 임소병이 실실 웃으며 청명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는 이가 있는 것 같은데⋯⋯ 그걸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당군악이 슬쩍 침음성을 흘렸다. 현종이 그를 대신하여 물었다.

“어쩔 셈이냐, 청명아.”

“저도 몰라요.”

“에엥?”

“아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방법을 모른다는 게 아니라 어떤 수를 쓸지 아직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았다는 거니까.”

“어째서냐?”

“그야 뻔하죠. 놈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요.”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의외의 인물이 입을 열었다.

“놈의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한순간이라도 틈이 나면 물어뜯겠다는 말이로군. 맞나?”

“⋯⋯사숙은 화산에 괜히 온 것 같아.”

“응? 뭔 소리⋯⋯.”

“종남 옷 한번 입고 나면 지능이 상승하는 것 같은데, 그냥 차라리⋯⋯.”

“뭐, 이 새끼야?”

“낄낄낄.”

발끈하는 백천을 보며 청명이 장난스레 웃었다. 하지만 이내 그 웃음을 거두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비슷하기는 한데, 아니야.”

“아니라고?”

“놈은 그런 틈 같은 건 보이지 않거든. 틈을 보일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야. 만들어 내는 거지.”

“어떻게?”

“말했잖아. 그건 아직 모른다고.”

백천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들의 심정도 그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이걸 대체 어떻게⋯⋯.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때 임소병이 입을 열었다.

“검을 처음 잡은 아이에게 신공절학을 풀어 설명해 준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말해 봐야 어차피 우리는 이해 못 할 겁니다. 중요한 건 이해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믿을 수 있느냐겠죠.”

임소병의 날카로운 눈빛이 청명에게로 향했다. 그를 따라 모두가 청명을 응시했다.

이해하지 못해도 믿을 수 있는가⋯⋯.

“청명아. 할 수 있겠느냐?”

현종이 묻자 청명이 씨익 웃었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해야죠.”

“⋯⋯.”

“어떻게든.”

현종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스레 대답하고 있지만, 저 말 안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지 모를 그가 아니었다. 현종은 청명을 믿었다.

하지만 천우맹은 그 홀로 결정을 내리는 곳이 아니다. 청명을 제외한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른 분들께서는⋯⋯.”

“물으실 것 없습니다.”

당군악은 그 행위조차 불필요하다는 듯 말허리를 딱 잘랐다.

“애초에 믿었으니 이곳에 있는 겁니다.”

모두가 동감하며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에 관한 일이라면 일단 딴죽부터 걸고 보는 오검조차 말이다.

“결정 났군.”

조금의 이견조차 없는 반응이다. 의견이 모아졌으니 당군악이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우리가 뭘 하면 되겠는가?”

그 말을 들은 청명이 씨익 웃었다.

예의 그 불길한 미소였다.

❀ ❀ ❀

“⋯⋯집을 짓고 울타리를 올리는 일을 난민들에게 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그렇지. 그들도 계속 놀고먹을 수는 없으니까. 사람은 일로써 돈을 벌어야 안정감을 느끼지 않나.”

“당가가 새로 만든 공방에 사람을 고용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요.”

백천이 바느질을 이어 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천우맹 전체에 무기를 공급하기에는 공방의 인력이 부족하니까.”

“그렇죠.”

듣고 있던 조걸이 침침한 눈을 부릅뜨며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 이거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라니까요?”

“⋯⋯뭐가?”

“원래 당가 공방은 당씨 성을 가진 이가 아니면 망치도 못 잡는 곳입니다. 그런 공방 장인들이 숙련된 장인도 아니고, 망치도 못 잡아 본 사람들을 받아들였다는 게⋯⋯.”

성도에서 자란 조걸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뭐, 가주님이 시키셨으니까?”

“모르는 말씀 마십시오, 사형. 당가의 공방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그게 가주님 명만으로 될 일 같습니까?”

백천이 씁쓸하게 말했다.

“⋯⋯당조평 어르신의 유지가 이어진 것이겠지.”

“⋯⋯.”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하셨으니까. 그걸 가장 크게 느끼는 이들도 다름 아닌 당가 공방의 장인들이겠지.”

목소리를 높이던 조걸도 이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생각하면 그것도 이해 가능한 일이지.”

“그렇죠. 듣자 하니 은하상단에서도 난민들을 대량으로 고용하고 있다던데요?”

“개간한 땅도 나눠 줄 모양입니다.”

“공짜로?”

“⋯⋯난민들한테 뭔 돈이 있다고 돈을 받겠어요? 그 땅에서 나는 곡식을 임대료 조로 좀 받는 정도겠죠. 그래 봐야 돈이 되려나 몰라. 장문인 성격에.”

윤종이 쿡쿡 웃었다.

“곡식 받으러 다니는 양반들 일당(日當)이나 나오면 다행이겠지.”

“그러니까요.”

상가의 자제였던지라 이득과 손해에 대한 개념이 확실하고 예민한 조걸은 이 부분이 영 마뜩잖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백천은 다른 생각을 했다.

‘집이 지어지고, 농사지을 땅이 생기고⋯⋯ 거기에 일할 자리도 생겼다⋯⋯.’

거기에 화산이 땅 대부분을 관리한다. 그러면 그 땅에서 일하는 이들을 화산이 어찌 대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현종뿐 아니라, 현 장문인인 운암도 마음 약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니까.

“난민이라⋯⋯.”

“예?”

작게 중얼거린 백천이 피식 웃었다.

과연 저들을 언제까지 난민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난민이 화를 당해 떠나온 이들을 말한다면 언제까지고 난민이겠으나, 그렇게 잠시 떠나왔다 다시 돌아갈 이들을 말하는 거라면⋯⋯.

글쎄, 그 이름표는 곧 떼야 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돌아갈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잘 곳이 있고, 먹을 것이 있고, 일할 곳이 있다. 그런 곳을 두고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대체 어디까지 생각을 한 건지.”

“자꾸 뭘 그리 중얼대십니까, 사숙?”

“그냥 두십시오, 사형. 저희 어머니도 바느질하시면 꼭 한 번씩 저렇게 구시렁대셨⋯⋯. 아악! 얼굴에다 바늘 던지기 있습니까?”

백천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던진 바늘을 회수했다.

‘화산이 가진 가장 큰 약점 중 하나가 인접한 도시가 작다는 거지.’

예전에도 얼핏 그런 생각을 했지만, 개봉을 보며 확실히 이해했다.

당가는 성도를 끼고 있고, 무당은 무한을 끼고 있으며, 소림 역시 낙양과 정주라는 거대한 도시를 양쪽에 끼고 있다.

화산 역시 서안을 끼고 있긴 하지만, 더 가깝고 세력이 큰 종남의 세가 훨씬 강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해도, 이게 언제까지고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화산의 세가 조금이라도 주춤한다면 저 탐욕스러운 종남 놈들이 서안을 대번에 꿀꺽 삼켜 버릴 것이다.

그걸 막는다 해도, 결국 다른 문파들과는 달리 서안이라는 도시를 종남과 둘이 나눠 먹어야 한다.

‘영역이라는 건 단순히 차지하고 있는 땅이 아니지. 그 안에 있는 이들과 관계를 맺으며 돈을 만들고, 제자를 받고, 다시 제자가 세상으로 진출하는 통로가 된다.’

그 선순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문파가 산속에 처박힌 채 말라 죽게 된다. 이미 화산의 제자들이 모두 경험한 바가 아니던가?

이 부분을 늘 고려했던 백천은 장문인이 된 뒤 가장 먼저 서안을 확실히 차지하려 했었다.

그런데 설마⋯⋯ 여기에 도시를 아예 지어 버릴 줄이야.

이렇게 되면 화산에서 제대로 된 인재가 배출되지 않는 시대가 오더라도 화산이 망할 일은 없을 것이다.

“⋯⋯정말 여기까지 다 생각하고 저지른 일인지. 그냥 돈 되니까 저지른 일인지.”

“자꾸 뭐라고 혼자 중얼대는 겁니까?”

“돈 이야기 나왔잖냐. 청명이 생각하시는 거다.”

“아, 그렇네.”

“시끄럽다.”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장 이기지 못하면 모두가 끝인 싸움을 앞두고 수십 년, 수백 년 뒤를 준비한다⋯⋯. 이건 보통 미친놈이 아니었다.

그때 윤종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 이해하겠는데, 이거까지 우리가 하는 건 왜⋯⋯.”

“회의 때 못 들었느냐?”

“듣기야 들었죠.”

“사람을 죽이고 이기는 싸움을 할 거라면 안 해도 된다.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살아남는 싸움이라면 해야 한다.”

“⋯⋯.”

“나는 그 말에 공감한다.”

윤종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진 회의에서 나온 안건 중 가장 크게 받아들여진 것이 바로 의술(醫術)에 대한 문제였다.

“⋯⋯저는 진짜 소소가 미친 줄 알았어요.”

“나도 그 순간만큼은 청명이가 정상인으로 보이더라.”

그 자리에서 갑자기 일어선 당소소가 주장한 건 아주 명료하고 간단했다.

❀ ❀ ❀

“당가를 해체해야 해요.”

“뭐⋯⋯라고?”

“당가를 해체해야 한다고요.”

당군악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충격으로 체통이고 위엄이고 다 잊은 것이다.

그의 시선이 이내 청명에게로 향했다.

“⋯⋯저 아니에요.”

거짓말이 아닌지, 청명의 얼굴은 세상 억울해 보였다. 그제야 당군악이 다시 당소소를 보았다.

그의 딸이 드디어 정신줄을 놓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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