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8화. 이제 내 차례야. (3)
바뀐 화음은 활기로 넘쳐났다.
본디 피난을 간 이들이 가난에 허덕이는 이유는 먹을 것, 잘 곳, 일할 곳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화음에서만큼은 그럴 일이 없었다.
도시의 기본적인 틀을 갖추는 데 동원되었던 인력이 수련이라는 본업으로 돌아가며, 도시 내 대량의 업무 공백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당군악과 황종의는 그 빈자리를 난민들을 고용해 일을 시키는 것으로 보충했다.
먹고 잘 곳이 생긴 것만으로도 안도하던 난민들에게 일자리까지 주어진 판이었다. 당연히 많은 이들이 기뻐하며 성심성의껏 맡은 일을 행했다.
그중 황종의가 가장 신경 쓴 일은 개간. 땅을 골라 농토를 만드는 일이었다.
개간이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대뜸 산을 깎아 논밭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 적당한 평지를 물색해야 하는데, 설령 기름진 땅을 찾는다고 해도 그곳을 작물이 자랄 수 있는 땅으로 만드는 데만 수 해의 노력이 들어가는 법이다.
심지어 개간에 있어 신경 써야 할 부분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농사를 지을 땅만 얻는다고 모든 게 해결된다면 화전을 일구는 이들이 그리 가난하게 살 리 있겠는가?
사람이 땅을 차지하면 그곳에 살던 짐승은 터전을 잃고 밀려나고 만다. 그러나 짐승들 역시 영역이 뚜렷하니 다른 짐승의 땅에는 함부로 발을 들이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결국에는 자기가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호시탐탐 노릴 수밖에 없다.
짐승과 사람 간의 터전이 뒤섞이고 경계가 모호해지면 항상 사고가 일어난다. 그게 세간의 상식이고 진리다.
그런데⋯⋯ 그 당연한 진리가 이 화음 땅만은 피해 가고 있었다.
“⋯⋯계속 저러고 있는 건가?”
“신경 쓰지 마시라던데.”
“어, 어떻게 신경을 안 쓰는가?”
“그건 그렇긴 한데.”
땅을 고를 때마다 여전히 자갈과 나무뿌리들이 뽑혀 나온다. 이를 정리하던 농민들은 계속 무언가가 신경 쓰이는 모양으로 떨떠름하게 한쪽을 흘끗흘끗 돌아보았다.
매끈하게 빠진 유선형 몸체. 역삼각형의 날렵한 얼굴과 언뜻언뜻 보이는 날카로운 이빨. 거기에 석탄이라도 바른 것처럼 검고 윤기 흐르는 털.
한 마리의 검은 표범이 나른하게 엎드린 채 오후의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표, 표범이 저리 검을 수도 있는가?”
“흑표라고 하지 않는가? 못 들어 봤는가?”
“말로만 들었지⋯⋯.”
평안한 호북과 섬서 땅에 살던 이들이 두 눈으로 흑표를 보는 건 평생에 한 번 있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 지금 이 광경은 섬서가 아닌 오지에 사는 이들에게조차 드문 광경일 것이다.
“그러니까 왜 저러고 있냐고?”
“못 들었나? 저게 일이라네.”
“일?”
“자네도 알지 않나. 원래 이렇게 땅을 개간하고 나면 부지불식간에 늑대나 표범 같은 놈들이 달려들어 사람을 물어 가는 거.”
“그렇지. 하긴, 내 친구 놈의 아버지도 그렇게 가셨네. 그때는 대호였다는구먼.”
“아는군. 그럼 우리가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지?”
“그렇⋯⋯.”
대답하던 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당연히 그런 일이 몇 번은 터졌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이곳에선 그런 일이 벌어졌단 소식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여긴 산짐승이 없나?”
“허허.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야, 이 친구야. 여기 섬서네, 섬서! 호북 놈들이 섬서에 짐승이 없다고 하면 섬서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겠는가? 여기에 사람도 발 못 들이는 높은 산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
“그렇지. 그게 맞는데⋯⋯.”
“저 짐승들이 여기를 지키고 있어서 다른 짐승들이 얼씬을 못 한다더구먼.”
“진짜? 무, 물론 범상치는 않아 보이는데, 이 넓은 곳에 저런 짐승들이 한 마리씩 버티고 있어 봐야⋯⋯.”
“쯧쯧. 아무것도 모르는군. 보통 짐승이 아니라 영물이라네. 남만야수궁에서 데리고 온 짐승이래.”
“아⋯⋯.”
“그래서 원래는 천우맹 분들 빠진 틈을 타서 날뛰었어야 할 짐승들이 얼씬을 못 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게 그렇게 된 거였구먼⋯⋯. 그럼 뭐야? 짐승들이 우릴 지켜 주고 있다고?”
“그런 셈이지.”
“허어⋯⋯.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물론 짐승이 사람 지키는 일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당장 개만 해도 집을 지키고, 말이 제 주인을 지키기 위해 적을 가로막았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오니까.
하지만⋯⋯ 뭔 놈의 표범이⋯⋯.
바로 그때였다.
컹! 컹컹!
어디선가 맹렬하게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 개 소리가⋯⋯.”
그리고 그 순간, 나른하게 누워 있던 흑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흠칫 놀라는 사람들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재빠르게 산 쪽을 경계하듯 자세를 잡았다.
컹! 컹컹!
개 짖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싶더니, 이윽고 수십 마리의 개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응? 저, 저게 뭔가?”
“보면 모르나? 개 아닌가, 개.”
“아니! 개인 걸 누가 모르나? 난데없이 갑자기 웬 개새끼들인가 하는 거지.”
물론 들개 무리야 어디에든 있을 수 있겠지만, 하나 괴이한 점이 있었다.
아무리 사나운 들개라 해도 표범이 보이면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야 마땅할 텐데, 저 개들은 되레 이곳으로 맹렬히 달려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컹! 커엉!
거친 개 소리(?)와 함께 달려온 놈들은 이내 표범의 앞쪽에 일제히 멈춰 섰다. 그 와중에도 흑표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경계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그리고⋯⋯.
크릉.개들이 좌우로 물러났다. 그 사이에서 무언가가 아장아장 걸어 나왔다.
“⋯⋯조, 족제비? 두 발로 걸어?”
“뭘 걸치고 있는데, 저거?”
개들 사이에서 느릿하게 걸어 나온 족제비는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흑표를 바라보았다.
까딱.
그러더니 작은 앞발을 까딱거렸다.
경계 자세를 취하고 있던 흑표가 바람처럼 족제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입에 족제비를 물고 목을 비틀어 버릴 듯했다!
“저! 저런!”
하지만 이내 펼쳐진 광경은 실로 괴이했다.
벼락처럼 달려간 흑표가 제 앞발 길이만 한 작은 족제비 앞에 납작 엎드린 것이다.
키이!
족제비가 뒷발로 땅을 강하게 밟았다. 그러자 흑표가 찔끔하여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렇게 한동안 흑표를 향해 마치 잔소리를 하듯 삿대질해 대던 족제비가 다시 울음을 날카롭게 내자 흑표가 부리나케 제자리로 돌아갔다. 털을 바짝 세운 채 사방을 경계하는 모습이, 나른하던 아까와는 완전히 달랐다.
키!
영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저은 족제비가 지켜보겠다는 듯 흑표를 한번 노려보고는 쪼르르 멀어졌다.
컹! 커엉!
호위하듯 둘러싼 개들이 재빠르게 족제비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본 이들이 멍하니 한마디씩 내뱉었다.
“⋯⋯여긴 뭐 하는 동네여, 대체.”
“섬서는⋯⋯ 호북이랑은 많이 다르네.”
“⋯⋯섬서라 그런 걸까요?”
“그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이들이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들이 일을 끝내기까지, 흑표는 단 한 번도 자세를 풀지 않았다.
격동하는 화음 내에서 바쁜 삶을 살고 있는 건 난민들뿐만이 아니었다. 난민들이 살 기초를 다져 주었던 무인들은 이제 그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바쁘게 사는 중이었다.
다만 그 방식이 다소⋯⋯ 특이했다.
화음 내 청화객잔(靑華客棧). 이 객잔은 아직 완공되지 않은 식당을 대신하기 위해 천우맹이 통째로 세를 내 버린 상태였다.
그 내부에선 화산 무복을 입은 이들이 동그란 탁자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있었다.
오후 수련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해야 할 시간이다. 긴장이 풀리며 자연히 가장 시끌벅적할 시간이건만, 탁자에 둘러앉은 모두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무언가를 붙든 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으⋯⋯.”
정적을 깬 건 조걸의 신음이었다. 부릅뜨고 있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제 손에 들린 헝겊을 눈빛으로 태워 버릴 듯 노려보다가 이내 굳게 결심한 듯 반대쪽 손에 든 바늘을 세차게 헝겊을 향해 쏘아 냈다.
푸욱!
“아아아아악!”
“조용히 좀 해라, 걸아.”
“아니, 저 새끼는 뭐가 문제야. 왜 바느질할 때마다 제 손가락을 찌르지?”
“수련 취지를 생각하면 맞는 행동 아닙니까?”
“거, 묘하네⋯⋯.”
조걸이 씩씩거리며 피로 얼룩덜룩한 헝겊과 바늘을 탁자 위에 내팽개쳤다.
“씨,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냐고!”
“걸아, 시끄럽대도!”
“아니⋯⋯!”
날아드는 타박에 조걸이 반박하려 고개를 획 돌렸다. 하지만 순간 움찔하며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마에 두른 영웅건을 위로 한껏 올려 흘러내린 앞머리를 갈무리한 백천이 양갓집 규수 뺨치는 자태로 꼼꼼하게 바느질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평온히 자수라도 놓는 줄 알 것이다. 그만큼 태연자약해 보였다.
“네가 못하는 걸 남 탓으로 돌리지 마라.”
“나만 못합니까, 나만?”
성난 조걸이 반대쪽에 앉은 유이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사고 좀 보십쇼! 저러다가 손가락이 없어지게 생겼습니다.”
그도 그럴 게, 유이설의 열 손가락은 모두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유이설은 무표정하면서도 묘하게 뚱한 얼굴로 짧게 말했다.
“괜찮아. 나는.”
“안 괜찮아요! 안 괜찮다고! 이러다 검 잡는 데 지장 있으면 어떻게 할 겁니까? 사고 손가락이 어떤 손가락인데!”
“네가 그렇게 사매를 생각하는지는 미처 몰랐구나. 여하튼⋯⋯ 마지막으로 말한다. 시끄러우니 앉으라고.”
“끄으으응!”
조걸이 다시 털썩 의자에 앉았다. 물론 의문이 가셔서는 아니었다.
“아니, 이걸 왜 우리가⋯⋯.”
“걸아. 자꾸 그렇게 구시렁대면 연무장으로 보내 버린다?”
윤종의 말에 조걸이 황급히 입을 닫았다. 그러다 이내 떨리는 눈으로 백천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죠?”
“소소 밑에서 배우기 싫으면 닥치고 해라.”
“⋯⋯눼.”
그렇게 일상적인 조걸의 난이 진압되었지만, 이 상황에 고통받고 있는 건 조걸뿐만이 아니었다.
“아악! 내 손가락!”
“쯧쯧. 바늘에 내력 과하게 넣지 말라니까.”
“그게 말처럼 쉽냐고! 평생 손에 뭐 쥐었다 하면 쑤시고, 베고, 잘라 댔는데!”
“⋯⋯사파 새끼처럼 말을 하냐?”
“아야!”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비명이 울렸다. 백천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이거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사숙.”
“뭐가 어렵다는 건지.”
“아무래도 사숙은 이게 적성에 맞는 것 같습니다.”
“의술이?”
“아뇨. 자수요.”
“이 새끼가?”
눈을 부라리는 백천의 시선을 피하며 윤종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바느질하는 건 별로 어려울 게 없는데, 바늘에 내력을 넣어서 신속하게 한다는 게 말이 쉽지⋯⋯.”
“어쩐지 소소가 바느질하는 게 신기에 달했다 싶었더니.”
내력을 넣은 바늘로 무언가를 꿰뚫는 건 쉽다. 하지만 내력을 불어넣은 바늘을 어딘가에 정확하게 딱 반만 박아 넣는 건 굉장히 어렵다.
칼 같은 내력 운용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이런 연습을 한다면 당가의 암기술이 천하제일일 수밖에 없겠네요.”
“그래, 그렇겠지. 소소가 검을 빨리 익힌 것도 이해가 가는구나. 검도 섬세한 내력 운용이 필요한 무기니까.”
“그렇죠.”
이는 즉, 이 쓸모없어 보이는 수련 과정이 검을 더욱 날카롭게 해 줄 거란 뜻이다. 하지만 백천은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아악! 손톱! 나 손톱 뚫렸어! 피!”
“반창고! 반창고!”
뭐⋯⋯ 딱히 그럴싸한 이유가 있어선 아니다. 그냥 이놈들이 고통받는 게 나름 즐거우니까.
“사태를 이리 만든 놈은 대체 어딜 가서 아침부터 안 보입니까?”
“⋯⋯또 어디서 혼자 술이나 푸고 있겠지.”
“이리 일을 벌여 놓고 말입니까?”
“뭐 그놈이 언제는 그런 걸 신경 썼느냐?”
윤종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백천 역시 치미는 한숨을 참을 수 없었다.
이 모든 사태의 시발점이었던 며칠 전 회의 시간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