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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27화 (1,528/1,567)

1527화. 이제 내 차례야. (2)

실내는 어둑어둑했다.

몇 개의 등잔불로는 채 다 밝힐 수 없는 널찍한 방 안, 한 사람이 정중앙에 좌정해 있었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아직 앳됨이 가시지 않은 얼굴, 몸에 걸친 자줏빛과 누런빛이 섞인 가사는 그가 동자승임을 짐작케 했다.

그러나 들릴 듯 말 듯 작게 독송을 이어 가는 아이의 표정은 실로 엄숙했다. 앳된 얼굴과 사뭇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사바하.”

계속해서 독송하던 동자승의 두 입술이 천천히 닫혔다.

굳게 닫혀 있던 두 눈이 천천히 뜨이자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이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한없이 깊고 검은 눈이었다.

그 눈이 앞에 세워진 벽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그 벽에 그려진 기이한 문양으로.

법륜(法輪). 수레바퀴의 형상을 띤, 불법의 상징.

독경을 마무리하려는 듯 조용히 육자진언을 외운 동자승은 길게 숨을 내쉬고는 작은 입을 열었다.

“그리 기다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자 그의 뒤쪽에서, 혹여 수행을 방해라도 할세라 숨죽인 채 시립해 있던 노승이 조심스레 방 안에 들어섰다.

노승은 소년의 앞쪽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자리를 잡으며 앉았다. 감히 정면을 마주하고 앉을 수 없다는 듯 말이다.

“스승이여.”

좌정한 노승이 경건히 합장해 동자승에게 예를 표하더니 걱정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

“시간이 늦었습니다. 아무리 스승이셔도 그 몸은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으니, 수양에 힘쓰시다가 괜히 몸이라도 상하실까 저어됩니다.”

“⋯⋯.”

“잊지 마십시오, 스승이여. 그대는 등불이십니다.”

말없이 듣고만 있던 동자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을 끼쳤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그저⋯⋯.”

“등불은 흔들려도 불법은 흔들리지 않을진대, 제 수양이 아직은 얕아 저 등불처럼 일렁이는 모양입니다.”

노승이 입을 다물었다.

수양이 얕다. 일견 맞는 말이다.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아이가 수양할 시간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건 동시에 완전히 틀린 말이기도 하다. 세상 어디에도 이 작은 소년보다 수양이 깊은 비구(比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어린아이야말로 이 포달랍궁의 궁주인 대활불이기 때문이다.

노승이 말했다.

“그저 잃은 것을 되찾을 뿐입니다.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이전에도 그랬고, 그 이전에도 그랬듯 스승께서는 다시 깨달음을 얻으실 것입니다.”

그 말에 대활불, 달뢰라마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겠다는 듯했다.

“한데⋯⋯.”

노승, 반선라마가 가만히 달뢰라마의 표정을 살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스승의 입에서 나온 말이 석연치 않았다. 아직 완전하지는 못하다 해도, 지금 대활불의 수양 역시 그는 감히 헤아릴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깊을 터다.

그런 대활불을 뒤흔드는 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반선라마의 표정에서 그 마음을 읽은 모양으로, 달뢰라마가 입을 열었다.

“잠시 스친 인연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인연⋯⋯.”

“예.”

반선라마 역시 달뢰라마의 뜬구름 잡는 듯한 말에서 그 의미를 읽어 냈다.

“중원의 도인들을 말씀하심입니까?”

달뢰라마는 이번 역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중 하나를 말씀하심이군요.”

그제야 달뢰라마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선라마는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청명이라 했던가.’

언젠가 초원에서 마주쳤던 중원 도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중 유독 기억에 남는 자는 자신을 청명이라 칭한 어린 도사였다.

확실히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의무를 다하기 위해 평생 수련한 그의 법안(法眼)이 말해 주었다.

달뢰라마와는 그 결이 다르나, 어쨌든 평범한 이들과는 확연히 무언가가 달랐다.

그래서 노승 역시 그들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역시 반선라마의 기준일 뿐이다.

그가 겪은 삶과 달뢰라마가 겪은 삶은 다르다. 달뢰라마는 사람이지만 부처이고, 부처이되 사람이다. 그러니 달뢰라마가 보는 세상은 그가 보는 세상과 사뭇 다를 터.

그런데 그런 달뢰라마에게도 그의 존재는 특별한 것일까?

“스승⋯⋯.”

“그렇습니까?”

“예?”

뜬금없는 질문에 노승이 되묻자 달뢰라마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저 잃은 것을 되찾는 것뿐이라 하셨지요. 과연 그렇습니까?”

사뭇 무거운 목소리였다. 반선라마는 감히 대답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나이되 내가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나이며 또한 내가 아니지요.”

“⋯⋯스승이여.”

“내가 한차례 겪었던 일이고 얻었던 것이라 해서 다시 얻음이 수월하지는 않을 터입니다. 궁구하면 궁구할수록 멀고 깊은 게 불법 아니겠습니까.”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한번 저질렀던 어리석음을 다시 저지르지 않을 수 있다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

“하지만, 라마. 그 말은 곧 나의 길이 온통 해서는 안 될 일로 뒤덮여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마다 내게는 보입니다. 내가 저질렀던 숱한 실수와 그 끝에 이어진 고해(苦海), 인간사의 후회⋯⋯.”

반선라마는 감히 그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말을 들으며 짧게 진언을 외었다.

달뢰라마가 말했다.

“그럼에도 제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모든 것이 결국은 불도로 이어진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스승이시지요.”

“하나 그렇지 못한 이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스승⋯⋯.”

“옴 마니 반메 훔.”

앳된 달뢰라마의 입에서 여섯 자의 진언이 흘러나왔다. 안타까움과 씁쓸함, 서글픔과 기원이 담겨 있었다.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이하여⋯⋯.’

돌아갈 길이 없구나.

삶이 고해이고 인연이 슬픔인 이유는, 그 얽히고설킨 실타래에서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옳음이 목을 죄어 오기도 하고, 때로는 악행이 자신을 구원하기도 한다. 그 진탕 같은 삶 속에서 한 줄기의 길을 발견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너무 걱정 마십시오, 스승.”

“⋯⋯.”

“스승께서도 말씀하셨잖습니까. 그는 자신을 태워 스스로 주변을 밝히는, 초와 같은 이라고.”

달뢰라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을 표현함에 있어 이보다 나은 말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러니 그 역시 잘 이겨 낼 것입니다. 걷는 길은 다를지언정, 그 역시 깨달음을 구하는 존재. 자신을 태울 용기가 있는 이가 아닙니까?”

“옴 마니 반메 훔.”

달뢰라마는 가타부타 말없이 진언을 외었다. 이내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입술 새로 연신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달뢰라마가 독송에 들어갔으니 반선라마도 조심스레 일어나 방을 빠져나갔다. 수양을 절대 방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혼자 남아 끊임없이 독송하는 달뢰라마의 마음은 깊은 불법이 아닌 먼 중원을 향하고 있었다.

‘자신을 태우는 것이 자신의 의지라면 공양.’

너무도 고통스럽고 힘겨운 길이나, 그렇기에 보시 중 으뜸으로 칭해지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이다.

‘하지만 그 불을 붙이는 게 자신이 아니라면⋯⋯ 그건 그저 형벌일 뿐인 것을.’

감긴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해야.’

바라고 기원할 뿐이다.

그가 ‘인연’이란 두 글자의 의미를 너무 뒤늦게 깨닫지 않기를.

그 인연이 그에게 너무 아픈 가시가 되지 않기를.

❀ ❀ ❀

짙은 향내가 낡은 도관 안에 번져 나갔다.

흰 연기를 흘리며 타들어 가는 향을 말없이 응시하던 청명이 느리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모두의 눈을 피해 오랜만에 들른 옥천원이다. 화산 역대 장문인들의 위패를 모신 조사전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자주는 못 들렀네요.”

뭔가 진중하게 말을 이어 가려던 청명이 아무래도 영 어색한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너무 뭐라고 하지는 마세요. 내가 노는 것도 아니고. 사형도 알잖아요, 내가 요새 얼마나 바쁜지.”

사실 청문을 보기 위해 굳이 이곳까지 들를 필요는 없다.

장문사형은 그와 함께 있으니까. 청문 역시 위패가 있는 곳이 아닌 그가 있는 곳에 머물길 원할 테니까.

설령 선계에 있더라도 그의 시선만큼은 텅 빈 화산의 전각보단 그와 화산의 제자들에게로 향해 있을 것이다.

이를 알면서도 청명이 굳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어쩌면 청문 때문이 아니라 자신 때문인지도 몰랐다.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잖아요. 위험한 일 했던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청명이 피식 웃고는 청문의 위패 쪽으로 다가섰다.

지척에 머물면서도 오랫동안 들르지 못했다. 위패에 희게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청명은 청문의 위패를 들어 조심스레 먼지를 닦아 내고는 살짝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사형이 살아 있었으면 분명 나를 말렸겠죠.”

당연하게도, 위패는 말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말 안 들어요. 사형 말대로 했다가 한 번 말아먹어 봤거든요. 지금 돌이켜 보니까 사형이라고 항상 옳은 건 아니었던 거죠.”

청명이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아마 청문이 살아서 이 말을 들었다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펄펄 뛰며 달려왔을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한없이 자상하지만, 청명만 보면 노발대발하던 양반이니까.

“그러니까 잔소리 작작 하시고 사람 좀 믿어 보세요. 내가 이제 나이가 몇인데. 사형만 나를 애로 보는 거지.”

짧게 혀를 찬 청명이 허공에 흐릿한 문양을 어지러이 그려 내는 연기를 빤히 보았다. 하다못해 연기라도 어떤 대답을 돌려주길 기대하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의 말은 결국 대답 없이 홀로 이어졌다.

“카악! 나도 안다고! 진즉에 잘했으면 좋았겠지. 이전에도 이만큼 했으면 안 그랬겠지. 그러니 지금이라도 이렇게 발바닥에 불나도록 뛰어다니면서 사는 거잖아요. 한번 겪어 봤으니까. 하여튼 이 양반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청명이 청문의 위패를 향해 주먹 감자를 먹였다.

그렇게 한참 씩씩대던 청명의 얼굴이 점차 누그러졌다. 씁쓸한 기색이 드리워졌다.

알고 있다.

끊어진 건 다시 잇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저 그리워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을.

후회가 가장 슬픈 까닭은, 아무리 후회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기 때문임을.

“또 올 테니까⋯⋯ 그때까진 먼지 뒤집어써도 좀 참아요. 애들 저렇게 고생하는데, 선조라는 양반들이 같이 고생도 하고 그래야지. 어디 비바람 피해 가며 호의호식하려고.”

낄낄 웃어 댄 청명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하지만 한 발짝 채 내딛기도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그의 시선 끝엔 옥천원 바깥의 화산 전각들, 그 너머의 화산, 그 아래에 터 잡은 수많은 이들이 있다.

그가 이은 모든 것이 이곳에 있다.

한번 겪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 온 결과가 이곳에 있다.

과거의 그에게도 있었던 것. 하지만 남김없이 잃어야 했던 것.

그의 입매가 결연하게 굳어졌다.

“이번에는⋯⋯ 잃지 않을 테니까.”

청명이 단숨에 옥천원을 벗어나 달려 나갔다.

짙은 향내만이 그가 떠난 자리에 오래도록 아련하게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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