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5화. 생각해 보니 잘못했네. (5)
현종이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셨다.
“하여…….”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화산까지 뛰어갔다가 오느라 안색이 다소 창백해진 당군악과 임소병에게로 자꾸만 시선이 쏠렸다.
“……허락 없이 화음을 떠나 외부에서 일을 친 이들에 대한 징계를…….”
“안 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당군악의 두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징계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맹주님! 과로 시작했다고는 하나, 결국 공으로 끝난 일. 그런 이들을 징계하면 맹이 어찌 되겠습니까!”
“그야…….”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정신 상태로는 아래에서 사패련이 치고 올라오고, 옆에서는 구파가 호시탐탐 노리고 드는 작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건 경우가 좀…….”
그때 숨을 헐떡이기 바쁘던 임소병이 부채를 스륵 펼쳤다.
본인이야 평소처럼 촤악 소리를 내며 멋들어지게 펴고 싶었던 것 같지만, 기력을 다 소진하여 손목에 힘이 안 들어가는 듯 소리에 영 매가리가 없었다.
“전장의 장수는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벌을 받지 않습니다. 오직 그 성과로 평을 받을 뿐.”
“……그것도 경우가 좀…….”
그리고 녹림왕, 눈 밑으로 얼굴 절반 가리지 마시오. 창백한 낯에 눈 밑이 시커머니 귀신 같소…….
“어쨌든 저는 녹림을 대표하여 반대합니다.”
“저 역시 사천당가를 대표하여 반대합니다.”
“은하상단도 반대입니다!”
어느새 달려와 동석한 황종의까지도 가세했다.
화음을 설계하는 데 있어 가장 많은 지분을 담당하고 있던 게 이 세 사람이다. 그들이 이토록 일제히 핏대까지 세우며 반대를 하니 현종도 영 마음이 불편했다.
이들이 이러는 이유를 그가 왜 모르겠는가?
청명이 놈이 사람 속을 뒤집어 놓고, 문파 꼬라지를 개판으로 만들어 놓는 거야 누구도 부정할 수 없지만…… 능력을 놓고 보자면 솔직히 평범한 책사의 백 인분을 한다.
과장이 아니라, 진짜 백 인분을 한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청명이 놈이 없어진 지난 열흘 동안 그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애초에 이 도시를 만드는 건 결국 저놈의 머리에서 나왔었다. 세상 누구를 가져다 놔도 이 일에 관한 한 저놈보다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이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청명을 징계하면 그 일거리를 남은 모두가 계속 떠맡아야 하는 것이다.
“거참.”
회의실 한쪽에 앉은 청명이 의자에 등을 있는 대로 축 늘어뜨려 기댄 채로 느물거렸다. 아까 처음 징계 이야기를 들었을 때 주둥이를 쑥 내밀고 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세였다.
“징계받겠다니까요?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세상의 이치라는데 뭘 이렇게 계속 막아 대요?”
임소병의 손이 달달 떨렸다. 눈빛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아마 지금 청명의 몸은 일흔여덟 개 정도로 갈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셨겠죠.”
안타깝게도 눈빛만으로는 사람을 죽일 수 없고, 입으로는 뜻에 반하는 말을 뱉어야 한다는 게 슬픈 현실이었다.
“사정 같은 건 없었는데?”
“있었을 겁니다!”
“아니, 없다니까?”
“있습니다! 무조건 있었습니다!”
임소병은 거의 피눈물을 쏟을 기세였다. 청명이 결국 안쓰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십시오! 사정이 있었다지 않습니까!”
“……울지 마시고 말씀하세요.”
“엄마…….”
희극이자 비극이었다. 모두가 그 처절함에 눈물 지었다.딱 하나 청명만은 쯧쯧 혀를 차고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무언가를 입가로 가져갔다.
“아이, 진짜 벌도 마음껏 못 받게 하시네. 사람이 이렇게 반성을 하는데, 합당한 처벌을 주셔야지.”
“청명! 여기가 어디라고 술을…….”
“마실 수도 있지요!”
“실로 호방하고 좋지 않습니까!”
“뭣들 하느냐! 안주를 내와라! 고급으로!”
훈계하려던 현종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세 사람을 나무라거나 할 생각은 조금도 들질 않았다.
당군악이 지친 얼굴로 말했다.
“맹주님.”
“……예, 부맹주님.”
“굳이 꼭 징계하시겠다면…… 저희 일을 좀 분담해 주시면 됩니다. 그럼 저희도 징계에 반대는 안 할…….”
“……크흠. 전시에 장수를 처벌하는 법은 없다는 여러분의 말씀 잘 이해했습니다.”
당군악이 도끼눈을 떴다. 하지만 현종은 슬그머니 그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도 나이가 있어 저렇게 일하면 죽는다. 무인이 일하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최근에야 알지 않았는가?
이 모든 광경을 조금 뒤에서 지켜보던 오검은 빠르게 눈짓을 교환했다.
‘……이게 맞냐?’
‘맞겠습니까?’
청명이 놈이 갑자기 태세를 전환하며 일단 스스로 매화동에 들어가자고 할 때는 미쳤나 생각했는데, 이게 이렇게 될 줄이야……. 대단하다기보다는 뭐랄까…….
‘마귀 새끼.’
‘저건 진짜 사람 아니야.’
윤종이 백천에게 작게 속삭였다.
“도사가 저래도 됩니까?”
“……자질은 참 좋지 않으냐?”
“예? 어째서입니까?”
“도사란 기본적으로 사람의 어려움을 알아야 하는 법이 아니더냐?”
“그렇……죠?”
“어떻게 저렇게 남이 어려워할 것만 쏙쏙 골라 때리지? 저것도 대단한 자질이지 않을까.”
……보통 그런 건 자질이라고 안 해요, 사숙…….
“하여튼 뭐, 말씀들 해 보세요. 지금 상황이?”
“끄응.”
청명의 물음에 당군악이 슬며시 앓는 소리를 흘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얼굴에서 순식간에 이렇다 할 감정들이 사라졌다. 일은 일이니까.
“화음의 정비는 대충 끝났네.”
“벌써요?”
“짓고 나누고 올리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니까. 그저 인력의 문제일 뿐이지.”
당군악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인력’
들은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알 것이다.
저 말의 이면에는, 어떤 일이든 인간을 갈아 넣으면 쉽게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뜻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유입되는 유민들의 수도 이젠 대폭 줄었고…… 남은 건 저 사람들이 화음에 적응해 사는 문제겠지.”
“총단은요?”
“짓고 있네. 그걸 총단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당군악의 눈가가 슬쩍 못마땅하게 실룩였다.
그의 관점에서는 지붕도 제대로 올리지 않은 커다란 전각을 겹겹이 쌓아 놓은 걸 두고 감히 ‘총단’
이라 부르기가 영 내키지 않았다.
막말로 그게 무슨 총단인가. 수용소지.
“총단에 합류할 이들은요?”
“해남은 지금 화음으로 오고 있다고 하니 며칠 걸리지 않을 걸세. 북해에 있는 빙궁의 주 전력 역시 내려오고 있다고는 하나, 워낙 거리가 있어 시간이 좀 필요하네. 그 외에 다른 중소 문파들도 합류를 원하고 있지만…….”
임소병이 끼어들며 설명을 이었다.
“가려 받고 있습니다. 어중이떠중이 다 받으면 개판 날 게 분명하니까요.”
“녹림처럼?”
“예! 바로 그렇……. 아니, 이 양반아! 녹림이 얼마나 사람을 가려 받는데! 산적도 아무나 하는 것 아닙니다? 일단 인상에서부터 얼마나 많이 탈락하는지 아십니까? 호구 샌님처럼 생긴 놈은 표범 가죽을 입혀도 고양이 된다고!”
“근데 왜 그렇게 개판이야?”
임소병이 두 눈에 핏발을 세운 채 부들부들 떨었다.
“끄으으……. 사람이 왜 사파가 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이미 사파요, 녹림왕.”
피식 웃은 당군악이 상황을 정리했다.
“처음에는 왜 이런 짓까지 해야 하는지를 이해 못 했습니다만, 막상 해 놓고 나니 알겠더군요. 총단이란 게 얼마나 중요한지.”
일단 총단은 눈에 보인다. 그리고 사람을 수용할 수 있다. 그 두 가지가 가져오는 상승효과는 당군악의 상상 이상이었다.
“뭐, 일단 내가 먹고 자는 곳에 정이 쌓이는 건 사람의 기본이니까요.”
“그래서 녹림이 오합지졸인 건가?”
“여기서 또 녹림이 왜 나옵니까! 녹림이! 끄륵…….”
“소소야. 저분 쓰러지시는데?”
“두세요, 사형. 약도 없어요.”
“…….”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저 사람은 진짜 약이 없어요. 절맥이잖아.”
조걸이 탄성을 흘리며 깔끔하게 수긍하는 와중에도 당군악은 말을 이어 갔다.
“거대 문파뿐만이 아닙니다. 천우맹의 명성에 끌려 합류한 중소 문파들도 화음에서 자리를 잡게 되면 확연한 소속감을 느끼게 될 겁니다. 그러면 정말…….”
당군악이 말끝을 흐렸다.
그가 본래 하려던 말은 ‘천우맹이라는 곳이 단순하게 일시적인 연합으로 끝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벌써 논하기엔 다소 성급하게 느껴져 말을 아꼈다.
그때 청명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거, 뭐 뻔한 말씀을. 남의 집에 세 들어 살아도 살다 보면 정드는 게 사람인데.”
“그걸 그리 잘 알면 좀 외관을 멋들어지게…….”
“됐고요.”
당군악의 얼굴에 한없는 우울감이 어렸다.
“저 꼬락서니들을 보면 세상이 다 당가에 손가락질을…….”
침전하는 당군악을 내버려 두고 임소병이 말을 이어 갔다.
“어쨌건 이걸로 구색은 다 갖췄습니다.”
“구색이라시면?”
“지금까지 천우맹의 가장 큰 문제는 중간이 없었다는 거지요. 고수 층을 받쳐 줄 만한 이들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더 단순히 말하자면, 절대적인 수가 항상 부족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수적 열세를 감당하며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잘해 왔지만, 한계가 있을 겁니다. 전쟁은 언제나 다수가 유리합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해남까지 다녀온 이들의 고개는 무섭도록 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하면 이제 중소문파들을 규합하면서 그 수를 맞출 수 있게 된다는 거군요.”
“우위를 잡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수 때문에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게는 되었지요. 그리고 그뿐만이 아닙니다.”
임소병의 눈에서 반짝이던 장난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군사, 두 번째는 보급,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보.”
“…….”
“군사를 위해 사방팔방에 흩어져 있던 아군들을 모조리 끌어모았고, 원활한 보급과 관리를 위해 화음에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개방의 협력을 이끌었지요.”
그 말에 새삼 모두가 청명을 돌아보았다.
“그 말인즉…….”
“예.”
임소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녹림의 수장이기도 하지만, 천우맹의 군사다. 그 천우맹의 군사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안정을 위해서는 조금 시일이 필요하겠지만 그건 말 그대로 ‘안정’
에 소요될 시간일 뿐.”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전쟁을 치를 준비는 끝났습니다.”
고요한 침묵이 대전에 내려앉았다.
임소병의 저 말이 모두를 실감케 했다. 이제 정말 피할 수 없는 전쟁이 그들을 덮쳐 올 거란 걸.
그때였다. 현종이 침중한 눈으로 임소병을 응시했다.
“녹림왕.”
“예, 맹주님.”
“그럼 이제부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오?”
임소병이 슬쩍 미소 지었다.
“글쎄요. 그걸 대답할 이는 제가 아닌 것 같군요. 애초에 이 모든 걸 시작한 분께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젠 모두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꽂혔다.
“총사.”
“네, 맹주님.”
“그럼 총사께 묻겠소. 이제부터 우린 무엇을 해야 하오?”
“그거야 너무 뻔한 일이죠.”
영 남일인 것처럼 늘어져 있던 청명이 천천히 몸을 앞으로 당겼다. 그리고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회의실에 난 커다란 창. 그것은 남쪽을 향해 뚫려 있었다.
모두 알고 있다. 그가 바라보는 곳이 어디인지. 거기에 누가 있는지.
“……대충 한 달쯤 됐을 거예요. 그 구렁이 새끼가 저기서 움직이지 않은 지가.”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구렁이 새끼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모를 이는 이곳에 아무도 없다.
‘벌써.’
정신을 차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전쟁을 준비하고 화음을 정비하는 데 그만큼 바빴기 때문이다.
“놈이 고작 구파와 우리를 분열시키겠다고 한 달을 보내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럼?”
“곧 오겠죠.”
청명의 눈이 차가워졌다.
“놈이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벼려 낸 비수(匕首)가.”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 패군 장일소가 한 달이라는 시간을 들여야만 했던 일. 그게 무엇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했다.
그 순간, 지금껏 침묵하고 있던 백천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우린 그 패군을 막아 내야 하는 거로군요.”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임소병의 시선이 남쪽으로 향했다. 그의 눈이 평소답지 않게 음울했다.
‘장일소. 뭘 꾸미고 있는 거지?’
* * *
짙은 피부색에 살짝 마른 몸, 얇은 입술에 짙은 눈썹. 거기에 강퍅한 느낌의 인상까지. 그는 그리 호감 가는 생김새의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생김새일 뿐이다.
그가 걸친 황금빛 옷과, 그 위로 새겨진 화려한 주홍 자수. 게다가 가슴 한중간에 그려진 선명한 태양의 문양까지 본다면 그에 대한 인상은 바뀌고 만다.
그의 눈빛은 수많은 이들을 발아래 두고 내려다보는 듯했다.
손에 거머쥔 것에 대한 자신으로 찬 자의 눈이 아니다. 그건 애초에 군림하는 게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이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이다.
그런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한낱 도적놈이…… 이 나를 부리겠다?”
사내의 오만하던 눈빛에서 어마어마한 광망이 뿜어져 나왔다.
“천면수사의 얼굴이 천 개라는 말은 들었지만, 목이 둘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거늘. 날 모욕하고도 감히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느냐?”
그러자 눈앞의 머리 긴 사내가 담담히 답했다.
“사람의 목이 둘일 수는 없지요. 하지만…….”
장발의 사내, 즉 변복한 천면수사는 왕좌에 앉은 남자를 꿰뚫는 듯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궁주님이 얻을 기회 역시 두 번은 아닐 것입니다.”
천면수사 담여해의 입가에 산뜻한 미소가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