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4화. 생각해 보니 잘못했네. (4)
청명은 정말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털렸다.
조걸은 사람을 얼마나 오래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 있는지를 새삼 깨달았고, 윤종은 자신의 과오를 절절하게 반성했다.
당소소는 당가의 반성실보다 더 무서운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유이설은 현종이 거하는 집무실 천장의 얼룩이 일백하고도 서른두 개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번 사태 중 가장 끔찍한 꼴을 당한 이는 예상외로 청명이 놈이 아니었다.
“너어는 장문대리라는 놈이!”
슬쩍 앞에 선 마귀(?)들의 눈치를 살핀 조걸은 윤종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숙 귀에서 피 나는데요?”
“……귀에서만 나면 다행이네.”
웬만한 인간은 정신이 나가 버리지 않을까?
사람이 나이가 들면 잔소리가 많아진다더니. 지금 백천 앞의 세 노인은 예로부터 전해진 격언은 틀리는 바가 없다고 몸소 확인시켜 주는 듯했다.
물론 그들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말리지는 못할망정 동조를 해?”
“애먼 짓 못 하게 하라고 장문대리를 시켜 놨더니!”
“짐 싸서 나가!”
늘 위풍당당했던 백천의 몸은 어느새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사실 그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청명이 놈이 미친 짓을 계획하면 당연히 그가 막아야 하는데, 이번에는 대놓고 동조하며 협조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뭐? 진금…….”
백천이 움찔했다. 그 순간 현종이 벼락같이 손을 뻗어 현상의 입을 텁 틀어막았다. 현상이 의아하게 돌아보자 현종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혼을 내더라도 정도가 있는 법이지. 그 건(?)은 언급하지 말거라.”
현영까지도 숙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오히려 그 행동이 백천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는 걸…….
“으음.”
현종이 슬쩍 앓는 소리를 흘리며 서찰을 내려놓았다.
앞에 놓인 서찰은 두 개. 하나는 개방의 방주가 보내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방의 방주가 될 이가 보내온 것이다.
“……화음 분타주가 방주라니.”
“좀 그러시죠?”
“음?”
“사실 홍 아저씨가 좀 못 미덥긴 하잖아요.”
“니들이?”
“네?”
청명과 현종이 이해가 안 간다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정도면 됐지.”
“와, 태상장문인. 진짜 인간을 수용하는 폭이 넓으시네요?”
“적어도 화음 분타주는 몰래 빠져나가서 남의 문파랑 싸움 붙다가 그 본거지를 쫄딱 무너뜨리고 돌아오지는 않을 것 아니냐?”
“…….”
“화산에 그만한 사람 하나만 있어도 소원이 없겠다, 내가.”
그 말에 오검은 일제히 시선을 슬그머니 돌렸다.
“끄응.”
현종이 한숨을 푹 쉬고는 백천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개방이 천우맹에 들고 싶어 한다고?”
“예!”
“왜?”
“……예?”
“뭘 보고?”
현종의 두 눈에 어린 건 ‘너희들이 미쳐 날뛰는 걸 뻔히 본 인간들이 대체 뭔 생각으로 천우맹에 든다더냐?’라는, 실로 합리적이고도 당연한 의문이었다.
백천은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거기에…… 소림과 종남. 종남이라…….”
현종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파를 제외한 정도무림에서 그들과 가장 사이가 좋지 않은 문파는 둘이다. 하나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원수 종남, 또 하나는 새로이 급부상하는 신흥(?) 원수 소림.
그런데 이 황당한 놈들은 그 두 원수 문파 놈들과 힘을 합쳐 싸웠다고 한다. 상황만 보면 태상노군과 부처님, 공자님이 합동으로 박수갈채를 보내고도 남을 일이었다.
강호란 본디 은원의 땅이다. 원한을 맺으면 깊어만 갈 뿐, 중화되는 일은 흔치 않다. 그건 평생을 강호에서 살아온 현종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보세요?”
현종의 입에서 또다시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그걸 저놈이 한다, 저놈이. 강호에서 사고 치는 규모로는 제일이고, 원한 품은 자들에게는 가차 없기로 첫손에 꼽히는 놈이!
이걸 대체 어찌 해석해야 하는가?
“일단은…… 알았다.”
“예.”
“너희의 처분에 대해서는 따로 회의하여 알려 줄 터이니, 일단 숙소에 가서 근신하고 있거라.”
“예!”
한 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숙소 말고 매화동으로 보내 주랴?”
그 말에 오리주둥이처럼 튀어나와 있던 청명의 입이 언제 그랬냐는 듯 쏙 들어갔다.
“끄응.”
저러는 이유야 안 들어 봐도 빤하다. 어쨌든 결과를 놓고 봤을 땐 공을 세우고 돌아온 건데 왜 벌을 주냐고 심통이 난 것이겠지.
현종은 이제 입씨름할 힘도 없었다.
“……나가.”
“그런데…….”
“응?”
청명이 헤헤 웃었다.
“나가는 건 좋은데, 아직 징계가 확정된 건 아니니까 숙소 가는 길에 객점은 잠깐 들러도 되죠?”
“…….”
“아니, 급히 오느라 제대로 먹지를 못해 놔서. 딱 한 잔……. 아니, 딱 한 끼만 먹…….”
“나가아아아아아!”
황급히 도망치듯 빠져나온 모두가 굳어 버린 온몸을 풀며 한숨을 쉬었다. 청명이 투덜거렸다.
“거 영감님들 성격 진짜 나빠지셨네. 예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청명아. 그거 다 너 때문이야……. 사람이 양심은 있어야지.
“끄응, 사형. 무슨 벌이 떨어질까요?”
“……내 생각에, 이건 최소 매화동 보름치다.”
“그, 그렇게나요? 우리가 무슨 죄를 그렇게 저질렀다고?”
조걸과 윤종의 대화를 듣던 백천이 피식 웃었다.
“별거 없긴 하지.”
“그렇죠?”
“남들은 죽어라 일하는데 우리끼리 도망간 것. 허락 안 받고 섬서를 빠져나간 것. 그래 놓고 타문파를 사칭한 것. 구파일방 중 한 곳의 장로들과 싸움을 벌인 것. 남의 문파 총단을 깡그리 무너뜨리고…….”
“생각해 보니 잘못했네.”
“이래도 안 때려죽이는 걸 보면 확실히 태상장문인께서 도를 얻으신 게 분명합니다.”
“나 같으면 단근참맥 했다.”
“살려 주는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평생 화산 쪽으로 절하고 살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데가 화산이야, 멍청아!”
그런데도 고작 매화동 보름 근신이라니, 이 얼마나 자비로운 형벌인가?
그때 돌연 조걸이 이를 갈며 한 사람을 획 노려보았다.
“이 모든 과정에서 쏙 빠진 인간이 하나 있는 것 같은데?”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쏙 빠진 인간’
에게로 꽂혔다.
“아, 아미타불. 그, 그건…….”
“배신자.”
“치사한 인간.”
“땡중.”
“대머리!”
혜연의 민머리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이, 이건 제 잘못이 아니지 않소이까. 소승은 화산의 제자가 아니니……!”
“저, 저 봐라, 저거.”
“예전에는 그래도 순수한 맛이라도 있었는데, 이젠 숫제 박쥐 새끼가 따로 없습니다. 화산에 붙었다가 소림에 붙었다가.”
“문파를 골라 먹네. 저 인간은 부처님이랑 태상노군한테 쌍으로 처맞아야 해.”
“결국엔 남이라 이거죠. 그래도 저는 남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소소. 울지 마.”
혜연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억울했다. 맹주님이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더러 대체 뭘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혜연은 구태여 변명하거나 저항하지 않았다. 굶주린 승냥이들에게 사냥감의 사연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법이니까.
혜연을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물어뜯고 나서야 오검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제야 묘하게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여기가 화음이 맞나?”
“그런가 본데요?”
사별삼일이면 괄목상대(士別三日則更刮目相對: 선비는 헤어져서 사흘 만에 만나게 되면 눈을 씻고 다시 보아야 한다)요,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우리가 얼마 만에 돌아온 거지?”
“한 열흘 정도?”
화산의 제자들이 얼이 빠진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뭐가 이렇게나 달라졌지?”
화음은 이제 반쯤 도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당가주님, 은하상단주님, 그리고…… 녹림왕. 대체 열흘 동안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세상에…….
* * *
“청명 도장과 오검이 돌아왔다고?”
그들이 화음으로 돌아왔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화음 전체에 퍼졌다.
화음은 애초에 화산의 땅이다. 화산 제자들에 대한 소식이 퍼지는 건 당연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을 받는 화산오검에 대한 소식이니, 빠르게 퍼지지 않는 쪽이 더 이상했다.
그리고 그 소식은 화음에서 가장 깊고 어둡고 음울한 곳까지도 여지없이 전해졌다.
“……돌아왔다?”
“예. 조금 전에 들려온 소식입니다.”
당군악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 밑에는 짙은 음영이 내려앉아 있었다.
원래 무게감이 남다른 당군악이지만, 지금의 그에게서 느껴지는 건 거의 제왕지기에 가까웠다.
그의 두 눈이 점차 태양 같은 광망을 내뿜었다.
“돌아왔다……. 돌아왔다 이 말이로군.”
“예!”
“마침내…….”
뿌득,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가 그의 입술 새로 새어 나왔다.
“잘도…….”
“뭐?”
그때, 구석에 놓인 책상 위로 엎어져 있던 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바닥에 철푸덕 엎어졌다.
“아흑.”
다리가 풀리고 만 것이다.
정적이 흘렀다. 누구도 웃지 못했다. 당군악과 황종의는 그저 그 광경을 씁쓸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끄으으으…….”
턱.엎어졌던 임소병은 야윈 손을 덜덜 떨며 쭉 뻗어 책상을 움켜잡았다. 이윽고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은 말 그대로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크흐흐흐……. 드디어 돌아왔구나. 드디어…….”
아니, 정확히는 그 흉신악살의 고문을 아주 오래도록 받은 죄인 같았다. 죽을 날 받아 놓고 오늘내일하는 노인 같기도 했고…….
뭐가 되었든 살날은 확실히 며칠 안 남은 것 같은 얼굴로 임소병이 두 눈을 부릅떴다. 원독이 넘실거렸다.
“사람을 이 지옥에 떨어뜨려 놓고 도망간 것들이!”
“……죽여야지.”
“이번만은 격하게 동의합니다.”
당군악, 황종의, 임소병.
화음 개발에 있어 가장 핵심 삼인방인 셋의 눈에서 원념이 흘러넘쳤다.
당가, 상인, 녹림은 본디 물과 기름, 그리고 불과도 같아 서로 섞이기 힘들다. 하지만 이런 그들을 한데 섞을 만큼 그 원독이 대단했다.
어쩌면 이게 개방을 끌어들인 것보다 더 대단한 업적일지도 모른다.
“말도 없이 화음을 떠난 건 용서할 수 있다.”
“자리를 열흘이나 비운 것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임소병이 말을 받으며 으득으득 이를 갈았다.
“일을 있는 대로 벌여서 지나가는 길고양이 앞발도 아쉽게 만들어 놓고 지들끼리만 홀랑 빠져나가 그걸 우리에게 모조리 미뤄 버린 건 죽어도 용서 못 하지!”
이 정도면 엿을 먹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니, 엿 먹이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그게 더 문제다.
“열흘 동안…… 한숨도 못 잤습니다.”
“……밥도 일하면서 먹고.”
“……씻지도 못하고.”
세 사람이 동시에 이를 갈았다.
“내 맹주님께 고하여 반드시 일벌백계하겠네!”
“역시 부맹주님!”
“크으, 믿고 있었습니다!”
“징벌동에 적어도 두 달은 가둘 걸세! 이끼만 뜯어 먹게 해 주지!”
“이왕이면 뱀이랑 지네도 풉시다. 가지고 계시죠?”
“이를 말인가?”
두 무인이 과격한 계획을 세우는 와중에, 황종의가 불현듯 현실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저, 그런데 말입니다……. 그 양반들을 징벌동에 두 달이나 가두면…… 우리는 이 짓을 두 달이나 더 해야 한다는 뜻 아닙니까?”
“…….”
“…….”
“그리되면 되레 벌은 우리가 받는 것 같은데…….”
과로로 굳어 있던 두 무인의 뇌가 거걱거리며 돌아갔다. 잠시 후, 둘은 동시에 탄식했다.
“끄응.”
“어휴!”
“일단은 우리부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한은 일단 덮어 놓고 좋게 좋게 해결을…….”
그 순간 문밖에서 살짝 상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 상단주님!”
“무슨 일인가?”
“그…… 화산 분들 말입니다. 오검 분들요. 지금 화산에 오르고 계신답니다.”
“응? 화산? 화산은 왜?”
“듣자 하니 잘 다녀왔다고 조사동에 인사를 드리고.”
“드리고?”
“내려오기 귀찮으니, 그냥 매화동에 미리 들어가 있을 거라고 합니다. 며칠이나 있을지 정해지면 말해 달…….”
“뭐!”
“안 돼!”
“막아!”
며칠 꼬박 잠을 못 자고도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당군악과 임소병이 벼락처럼 뛰쳐나갔다.
그 속도에 맞추어 따라갈 능력이 없는 황종의는 간절한 외침으로 그들의 성공(?)을 기원했다.
“꼬, 꼭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반드시이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