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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22화 (1,523/1,567)

1522화. 생각해 보니 잘못했네. (2)

파아아앗.

간밤에 맺힌 이슬이 아직 채 마르지도 않은 시간, 십여 명의 인원이 관도를 질주했다.

“섬서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별일 없으면, 아마 넉넉잡아 이틀이면 되겠죠.”

“이틀이라……. 가면 또 일할 거투성이겠지.”

“쯧쯧쯧. 그 와중에도 엉덩이 뺄 궁리나 하고 있고. 이러니 문제지.”

“……그래도 지금쯤이면 많이 완성되지 않았을까요?”

“자잘한 일은 끝이 없을 게다. 아무래도…….”

“그래. 사람 관리 그게 쉬운 게 아니거든. 사람은 늘어나는 것만으로 일을 만든다니까? 우리가 그래서 힘든 거야.”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일제히 한곳으로 돌아갔다. 어째 아까부터 자꾸 대화에 이물질이 끼어드는 것 같은 기분이…….

“근데요.”

“응?”

“여기 계셔도 됩니까?”

모두의 시선을 받은 홍대광이 ‘뭔 문제라도 있어?’ 하고 묻는 얼굴로 뻔뻔스레 그들을 마주 보았다.

“왜?”

“……아미타불. 지금 시주께서는 천우맹을 걱정할 게 아니라, 무너진 개방에 계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쯧쯧. 산속에서만 사시는 스님이라 영 세상 물정을 모르시는구려.”

“……예?”

홍대광이 엣헴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본래 방주라는 자리는 그런 사소한 일을 하는 자리가 아니오. 문파 간의 관계를 도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법이지.”

“…….”

“그러니 지금 내게 제일 중요한 게 뭐겠소? 바로 천우맹과의 관계! 그리고 천우맹 내에서도 핵심인 여러분과의 관계! 그 관계를 단단하게 다지는 것 아니겠소? 이게 다 일이라 이 말이지!”

“그 관계가 지금 무너지고 있는데요?”

“응? 왜?”

“어휴…….”

화산 제자들의 입에서 일제히 한숨이 새어 나왔다. 깔끔하게 잘 떠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웬 혹덩이가 들러붙었다.

그 혹은 심지어 청명을 쿡쿡 찌르며 괴롭히기 시작했다.

“야, 화산신룡. 좀 일어나 봐라. 언제까지 잘 거냐? 물론 일검분광 등판이 널찍하니 자기 좋은 건 알겠는데.”

뚱하니 앞만 보고 달리던 조걸이 백천을 향해 물었다.

“사숙. 이 아저씨 좀 때려도 됩니까?”

“……그러지 마라. 방주 되실 분이다.”

“어차피 우리도 장문인 될 사람 때리잖습니까?”

“……너 혹시 나 때렸냐?”

조걸이 아차 하고 백천의 눈을 피했다.

그때 청명이 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뒤척였다. 살짝 벌어져 있던 입에서 주르륵 무언가가 흘렀다.

“악! 축축해! 침 흘리지 마, 이 새끼야!”

“끄으……. 소리 지르지 마. 머리 울린다.”

“뭘 얼마나 퍼마신 거야!”

“우, 우욱…….”

“아, 안 돼!”

조걸은 등에 붙은 걸 냅다 집어 던져 버렸다. 그러자 청명이 허공에서 획 돌아 바닥에 착지했다.

“우웨에에에에엑!”

“……십 점.”

“어. 나도 십 점.”

“마무리에 예술성까지 추가해서 십일 점이요.”

“저건 감점 요소 아니냐?”

청명이 가슴께를 치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숙취가 그야말로 지독한 모양이었다.

“야, 화산신룡. 괜찮……. 아아아악! 남의 소매로 토한 입 닦지 마!”

“……어차피 누더긴데.”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이!”

홍대광이 진저리를 치고는 후다닥 청명에게서 달아났다. 청명은 비척거리며 투덜거렸다.

“끄으. 진짜 죽겠네. 그 양반 술이 얼마나 센 거야…….”

“아, 방주? 우리 왕거지가 원래 말술로 유명했지. 같이 술 먹은 사람이 별로 없어서 소문이 안 난 거다. 어휴, 말도 마라. 내가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아, 됐어요. 아저씨 옛일 같은 건 관심 없으니까.”

마음의 상처를 입은 홍대광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청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퀭한 얼굴로 물었다.

“그보다…… 아저씨 왜 여기 있어?”

“말했잖아. 천우맹에 갈 거라니까?”

“왜?”

“왜긴. 장문인……. 아니, 맹주님께 인사를 드려야지.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고.”

청명의 눈이 확 가늘어졌다.

“일하기 싫어서 튄 건 아니고?”

“어허! 이놈이 이 홍대광을 뭐로 보고!”

청명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진정으로 개방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여기 어디에 이 양반을 묻어 버리는 것도…….

“뭐, 그것도 그거지만 지금은 내가 거기에 있어서 좋을 게 없거든.”

“응? 그건 또 뭔 소리래요?”

청명이 되묻자 홍대광이 혀를 짧게 차더니 말했다.

“방주와 일호신개가 내게 방주 자리를 주기로 선언한 이상, 장로들이 나를 미친 듯이 찾아 댈 거라는 거지.”

“……왜?”

“그 양반들 방식이 원래 그래. 기존에 붙어 있던 곳이 힘을 잃었으니, 새로 힘을 얻은 이에게 붙으려고 하겠지. 내가 개봉에 남아 있으면 그 상황을 피할 수가 없어.”

“흐음.”

“그렇다고 또 무작정 밀어 내면 그 양반들도 위기감을 느낄 거 아니냐. 이러나저러나 제일 좋은 건 눈에 안 띄는 거지.”

청명은 영 마뜩잖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홍대광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뭔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게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니잖아요? 붙는다는 건 어쨌든 엎드리겠다는 건데.”

“나쁜 게 아니긴! 그 노괴들이 얼마나 영악한데. 분명 납작 엎드리는 척하면서 나를 마음대로 휘두르려 들 거다.”

“그건 뭐 당연한 거지만.”

홍대광이 콧김을 내뿜었다.

“그리고! 방주는 장로들의 잘못을 묻어 두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럴 생각 없어.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치러야지.”

이미 결심을 마친 듯 홍대광의 눈빛이 단호했다. 청명은 조금 새삼스러운 눈길로 홍대광을 보았다.

“엥? 뭘 어쩌려고요? 방주라고 그 양반들이 예뻐서 내버려 둔 건 아닐 건데? 안 그래도 고수 층이 약한 개방이 그 양반들을 다 쳐 내면 진짜 그냥 거지 집단 되는 거잖아요?”

“쳐 내? 말도 안 되지. 쳐 내면 어디 가서 신선놀음이나 할 텐데 그게 벌이냐? 상이지.”

“……그럼?”

“전선에 모조리 밀어 넣을 거다.”

“……응?”

청명은 일순 당황했다. 이 거지 놈이 지금 뭐라고…….

“일선의 거지들을 희생시킬 필요가 없지. 사패련 전선에 장로들을 모조리 밀어 넣고 지원을 끊어 버릴 거야. 평거지랑 똑같이 취급하는 거지. 아, 거기에 장로들이 가지고 있는 특권도 다 없애 버릴 거야.”

“……그렇게까지?”

“너는 외부 놈이니 모른다.”

홍대광이 콧김을 내뿜었다.

“방주는 뭐 방향이 어쩌고 하지만, 그거 다 개소리야. 내가 보기에 개방이 개판 난 가장 큰 이유는 장로 놈들이 거지로 살던 시절을 다 잊었기 때문이다. 다시 춥고 배고파 봐야 거지들의 고충과 힘없는 사람의 고통을 알겠지. 그러니까 나는 장로 놈들을 대차게 굴릴 거다.”

청명이 눈을 끔뻑였다.

“아, 아니. 뜻은 알겠는데…….”

“그렇지? 너도 이해가 되지?”

“아니, 근데 뒷감당은 누가 하냐고? 죽창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거 아니냐고요. 장로들이 든 죽창이면 아저씨 살가죽이 아무리 질겨도 감당 안 될 텐데.”

“하하하. 그래서 내가 지금 천우맹으로 가고 있잖느냐?”

“엥?”

“화산신룡!”

홍대광이 청명의 손을 덥석 잡았다.

“살려다오!”

“…….”

“너희까지 직접 올 건 없다. 천우맹에서 당가나 남궁세가 정예들을 좀 파견해 주면 된다. 내가 말한 것들이 안정화될 때까지 너희가 나를 지켜 주기만 하면…….”

따아아아악!“꿰엑!”

말을 하던 홍대광이 돌연 경쾌한 타작 소리와 함께 앞으로 철퍼덕 엎어졌다.

“헐? 방주님?”

홍대광이 엎어진 그 자리에는, 어느새 나타난 풍영신개가 서 있었다. 홍대광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짜증과 노기, 허탈함까지 뒤섞여 복잡하고도 묘했다.

화산의 제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주님. 저희도 그 마음은 십분 이해합니다.

풍영신개가 작게 고개를 숙였다.

“……폐를 끼쳤습니다.”

그러더니 쓰러진 홍대광의 한쪽 발을 턱 잡았다.

“일단 방주 자리에 올려놓고, 정식으로 인사 시키러 보내겠습니다.”

“그, 그러시지요.”

“그럼.”

풍영신개는 삶은 닭처럼 널브러진 홍대광을 붙잡고 환상처럼 사라졌다. 과연 무흔이라 불렸을 만한 신법이다.

“……인과응보로구나.”

“정의는 승리한다.”

“개소리도 정도껏 해야 들어 주지.”

애초에 방주 자리를 물려받아야 할 이가 자리를 비운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때 백천의 얼굴에 슬쩍 의문과 충격이 스쳤다. 이를 알아챈 윤종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사숙? 뭐 잘못되었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방주님이 알아주는 말술이라는 이야기가 맞는 것 같아서 말이다……. 청명이 놈이랑 밤새도록 대작하셨는데, 아무리 내력으로 주독을 빼낸다 해도 저리 멀쩡할 수가…….”

일순 모두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했다.

청명은 바빴다.

“우웨에에에에엑!”

“……풍영신개가 아니라 주귀(酒鬼)신개셨네.”

하늘 위에는 하늘이 있다. 그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끄응……. 드디어 도착했다.”

“갈 때는 한달음이었던 것 같은데, 올 때는 또 오래 걸리네.”

“기분만 그런 거예요. 아니면 피곤해서 그렇든가요.”

당소소의 말에 백천이 수긍했다. 격전을 치르고 제대로 된 휴식도 없이 복귀하는 길이다. 당연히 힘들 수밖에.

하지만 더 시간을 지체할 수도 없었다. 지금 화음에 일이 산더미처럼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어쨌든 도착해서 할 말은 있으니 다행이네요.”

“그렇지. 빈손으로 돌아왔으면 맞아 죽어도 할 말 없었다.”

“따지고 보면 저희가 남들 일할 때 야반도주했던 것 아닙니까? 불회곡에 거꾸로 매달아 놔도 감사해야 할 판이죠.”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일이 잘됐으니 망정이지…….

오는 길에 살아난 청명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거지.”

“언제고 한 번은 진짜 크게 다칠 거다, 너는.”

“이미 여러 번 다쳤어요, 사형. 그러고도 안 고쳐지는 게 문제지.”

“……그도 그렇네.”

백천은 어깨를 쫙 폈다. 과정이 힘들긴 했으나, 그래도 어쨌든 개방의 협조를 얻어 냈고 심지어 소림과의 미묘한 관계까지 쌓고 왔다. 들인 시간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성과다.

묘하게 개선장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거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각이네.”

“그죠? 최근에는 이렇게 신나는 마음으로 돌아온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씻고 싶어.”

“얼른 가서 씻고 쉬어요, 사고!”

“자, 어서 가자.”

백천이 보무도 당당하게 화음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몇 걸음 채 떼기도 전에 마을 입구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이가 그들을 발견했다. 그는 빠르게 화산의 제자들을 향해 달려왔다.

“어? 운검 사숙조 같은데요?”

“우리가 온다는 걸 벌써 들으셨나?”

반가움과 함께, 모두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고작 며칠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여기서 이리 마주치니 무척 반갑고 기뻤다.

운검도 그들을 환영하는 듯 양팔을……. 아니, 한 팔을 벌리며 달려왔다.

“환대해 주시네!”

“하하. 뭐 대단한 일 하고 왔다고!”

청명이 의기양양하게 배를 쭉 내밀며 앞으로 나서려는데, 백천이 그의 꽁지머리를 잡아 뒤로 당겼다.

“쯧.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아야. 치사하게!”

“비켜!”

청명을 뒤로 밀어 낸 백천이 달려오는 운검을 환한 미소로 맞으며 포권 했다.

“사숙! 무사히 일을 마치고 돌아…….”

백천의 인사는 채 다 이어지지 못했다. 벼락처럼 달려온 운검의 무릎이 백천의 이마에 고스란히 처박혔으므로.

“꿰엑!”

백천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뒤로 튕겨 나갔다.

‘어? 뭐지?’

‘내가 헛걸 봤나?’

화산의 제자들이 순간 멈칫하며 운검을 보았다.

그리고 마주하게 되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악귀와도 같은 운검의 모습을.

“사, 사숙조?”

“너희가…….”

운검의 두 눈에선 진득한 살기가 휘몰아쳤다.

“종남의 옷을 입고, 개봉에 들어가 개방 총단을 무너뜨렸다는 게 사실이냐?”

“……어?”

그…게…… 어…… 사실? 어……. 사실이긴 한데.

“자, 잠시만요. 사숙조! 일단 들어 주십시오! 그건 다 사정이……!”

“화산의 제자라는 놈들이…….”

운검은 새파란 살기를 거두기는커녕 더 흉흉하게 이를 악물었다.

“다른 곳도 아니라 종남의 의복을 몸에 걸쳐?”

아……. 총단을 무너뜨렸다가 문제인 게 아니라 종남의 옷을 입었다는 게 문제였구나. 그건 뭐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내 오늘 너희의 그 썩어 빠진 정신을 확실하게 고쳐 주마.”

“사, 사숙조!”

“아니, 일단 말을 좀 들어 보시고!”

“닥쳐라!”

숫제 아수라가 되어 버린 운검이 새파랗게 질린 오검을 향해 땅을 박차고 올랐다. 잠시 후, 처절한 곡소리가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훗날 청명은 이날을 이리 회상했다.

천마보다 무서운 게 세상에 존재했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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