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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21화 (1,522/1,567)

1521화. 생각해 보니 잘못했네. (1)

피로를 못 이긴 화산의 제자들이 모두 곯아떨어진 야심한 새벽.쪼로로록.풍영신개가 조심스레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술병을 쥔 손 모양에선 더없는 공손함과 경건함이 묻어났다.소리 나지 않게 술병을 내려놓은 풍영신개가 건너편에 앉은 이를 향해 입을 뗐다.

“검존…….”

그 말을 들은 청명이 피식 웃었다.

“뭐, 이제는 아냐.”

“그럼……?”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이전처럼 검협이라 불러도 좋고, 청명이라 불러도 되고. 흐음……. 아니다, 도장. 도장이 제일 어울리긴 하겠네.”

풍영신개의 얼굴이 조금 창백하게 질렸다.

“제가 어찌 감히…….”

“됐어.”

청명이 풍영신개가 채운 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크으.”

“…….”

“늙은 게 뭐 자랑도 아니고. 게다가 엄밀히 따지고 보면 내가 어린 게 맞거든?”

“……그렇긴 합니다만.”

“이거저거 따지지 말자고. 그냥 도장이라고 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두 사람의 대화가 잠깐 끊겼다.

사실 두 사람 사이에는 딱히 화제 삼을 만한 것이 없었다. 서로의 진정한 정체에 대해 알았을 뿐, 이렇다 할 접점이 없으니까.

그나마 상대에 대해 더 잘 아는 건 풍영신개라 그가 대화를 이어 가야 했다.

“감사합니다, 도장.”

“뭘 새삼스레.”

청명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너 좋으라고 도와준 거 아니니까 감사할 거 없어. 네가 아니라 다른 놈이 있었어도 개방은 한번 손보려던 참이었어.”

“하지만 지금 같은 방식은 아니셨겠지요.”

“흠.”

청명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손에 든 잔을 앞쪽으로 슬며시 밀었다. 풍영신개가 재빨리 그 잔에 술을 채웠다.

“날 밝는 대로 떠나실 거라고 들었습니다.”

“시간 끌어 봐야 좋을 거 없으니까.”

나름 좋게 봉합된 모양새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들이 개방과 싸웠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들이 계속 눈에 띄게 된다면 개방 내의 반감이 치솟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럴 때는 이들끼리 상황을 정리할 수 있게 빨리 자리를 비워 주는 쪽이 옳다.

풍영신개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청명의 뜻은 이해한다. 옳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왜? 더 해 줘야 할 거라도 있어?”

“사람이 염치가 있으면 어찌 이 이상을 바라겠습니까? 그저 검존께서 해 주신 모든 것에 대한 보답을 조금도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립니다.”

“보답이라면…… 이미 받았어.”

“예?”

청명의 시선이 올라갔다. 천장, 그 너머에 잠든 이를 향해.

“과한 보답이었지.”

씁쓸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풍영신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알던 이들이 모두 죽은 세상에서 홀로 살아가는 기분을.

“……스승을 대신해서도 감사드립니다.”

“거, 자꾸 쓸데없는 공치사는.”

짧게 혀를 찬 청명이 술잔을 들었다. 이번에는 급하지 않게 천천히 술을 음미하듯 흘려 넣었다.

씁쓰레하고 알싸한 주향이 입 안에 맴돌았다. 하지만 아무리 독한 술이라도 결국 주향은 한 줌 남김도 없이 사라져 간다.

“말해 두지만.”

“예.”

“놈은 분명 잘못했다.”

풍영신개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의 과오를 평하고 인정하는 건 제자로서 옳은 일이 아니겠지만, 이건 이미 그의 스승조차 인정한 일이었다.

그리고 풍영신개는 스승이 초래한 일의 결과를 이미 두 눈으로 확인했다.

검존이 하루만 늦게 당도했다면 개방은 일호신개의 손에 떨어졌을 것이고, 그들이 다시 세워야 할 개방의 의협은 심각하게 손상되었을 것이다.

그때 청명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풍영신개가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럼에도 탓하고 싶지는 않아.”

풍영신개는 채 다 이해할 수 없는 씁쓸함이 실려 있다.

“그놈도 딴에는 노력한 거겠지. 그래. 그렇게나…….”

외로웠을 텐데도.

뒷말은 차마 나오지 못하고 청명의 입 안에서 부스러졌다.

“크흠.”

괜스레 어색해진 청명은 짧게 헛기침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여하튼…… 적당한 때가 되면 양지바른 곳에 묻어 줘.”

“이전에는 저기 두시라고…….”

“그래. 그랬지.”

청명이 피식 웃었다.

“내 감정을 내가 못 이겼던 거지. 떠난 이는 미련을 남기지 않는 게 좋아.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전부 남은 사람이 짊어질 몫이니까.”

풍영신개는 그저 말없이 수긍했다. 모두 이해할 순 없다고 해도, 저 말에 선의가 담겨 있다는 것 정도는 그도 안다.

청명이 흘끗 시선을 주더니 덧붙였다.

“너도 자책하지 말고.”

풍영신개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죄를 갚을 기회가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씩씩하네.”

순간 풍영신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씩씩하네’라는 네 글자가 어린아이를 칭찬하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물론 청명이 보기에 풍영신개는 어린아이가 맞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홍 아저씨가 좀 어설픈 면이 있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예. 애초에 개방은 완벽한 곳이 아니었지요.”

풍영신개는 청명이 하고픈 말을 이미 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가 훌륭한 방주가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치세 아래에서 개방은 훌륭한 곳이 되어 가리라 생각합니다.”

“흠.”

“그게 더 옳은 길이겠지요. 좀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청명이 그거면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풍영신개가 따라 준 술을 들이켰다. 더 이상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그가 하고픈 말은 끝났다는 의미다.

그러나 풍영신개는 아직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검존.”

청명이 대답 대신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도장이 아닌 검존이다. 풍영신개가 조금 전에 나누었던 말을 그새 잊을 만큼 멍청하지는 않을 것이고.

“계속 싸우실 겁니까?”

그러니 이건 개방과 화산이라는 소속을 떠나,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청명에게 묻는 말이다.

탁.

술잔을 내려놓은 청명이 담담히 답했다.

“그럴 거야.”

“……검존께서는 아시잖습니까?”

개방이 변질한 가장 큰 이유.

그건,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 해도 결코 언젠가 밀려올 검은 격랑을 막아 낼 수 없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는 돌아올 것입니다.”

청명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이전보다…… 더 강대하게.”

아직 수습 중인 이들이 밝혀 놓은 횃불이 개봉 곳곳에 어룽어룽 번져 있었다.

불빛이란 사람이 살아간다는 증거.

그리고 ‘그’는 불빛을 먹어 치우는 자.

그가 지나간 곳마다 불빛이 사라지고, 세상은 결국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개봉을 밝힌 불빛들이 무언가에 먹히는 듯 차례차례 꺼져 가는 광경이 청명의 눈앞에 훤히 그려졌다.

안간힘을 써도,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자연재해. 그 검은 격랑에…….

“흠.”

밀려오는 무언가를 밀어 내려는 듯 청명이 짧게 숨을 뱉었다.

“그래서?”

“예?”

“돌아오는데 뭘 어쩌라고?”

풍영신개가 순간 당황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그야…….”

“뭐, 물론 그 새끼가 부활이라도 하면 오줌 싸러 나갔다가 산사태 밀려오는 꼴을 맞닥뜨린 심정이 되겠지.”

“…….”

“그런데…….”

청명이 씨익 웃었다.

“그게 꼭 나만 그럴까?”

“……예?”

“산사태를 처맞는 건 그놈도 마찬가지일걸? 뒈졌다가 겨우 살아났는데, 거기에 제 모가지 자른 놈이 또 있는 거잖아?”

풍영신개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그런 식으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고 징징댈 놈은 내가 아니라는 거지. 그 새끼가 훨씬 쫄릴걸? 목이 따끔따끔하지 않겠어?”

“하……. 하하…….”

풍영신개가 웃어 버렸다. 알 것 같다. 왜 그의 스승과 달리 이 사람은 무너지지 않았는지.

청명이 웃었다.

“그리고 원래 세상일이라는 건 되는 걸 하는 게 아니야. 어렵고 안 되는 걸 어떻게든 해내는 거지.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여기까지 온 거야.”

풍영신개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나는 천마고 나발이고, 당장 저 밑에 있는 기생오라비 생각만으로도 골치가 아파.”

“패군 말씀이시군요.”

“어. 너희들이 사람같이만 굴어 줬어도 이 꼴은 안 났을 텐데. 뭐? 어버버버. 장일소가 사천에 있습니다아아?”

청명이 비아냥대며 시늉을 했다. 그 눈이 무섭게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풍영신개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입이 열 개라도…….”

“망할 새끼들 진짜.”

청명이 쯧 혀를 찼다.

“너희더러 희생하라고는 안 해.”

“…….”

“희생이 불가피하다면, 그 가장 앞에 내가 있을 거다. 그러니 억울해하지 마.”

“명심하겠습니다, 검존. 아니…… 도장.”

그걸로 충분했다.

만일 과거에…… 천하의 주도권을 구파가 아닌 매화검존이 쥐고 있었다면, 그때의 개방 역시 희생에 피눈물 흘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가치 없는 죽음이 두려운 거니까.청

명이 술병을 들어 풍영신개의 잔을 채워 주었다. 풍영신개가 움찔하며 재빨리 잔을 받아 들었다.

“너도 마셔.”

“제가 감히…….”

“너도…….”

“예?”

청명이 크흠 헛기침하더니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도 고생 많았다.”

순간 풍영신개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청명을 보았다. 이윽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청명이 퉁명스레 톡 쐈다.

“뭐 해? 마셔!”

“예, 검존.”

이전과는 달라지겠다, 이제부터 달라진 개방을 보여 드리겠다는 등의 말은 무의미했다.

‘사부님.’

술을 들이켠 풍영신개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분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또 다른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이끄는 이가 아니다.

그래, 이 사람은…… 따르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다.

* * *

이른 새벽.

“끄으…….”

“……이 새끼 상태가 왜 이럽니까?”

“몰라. 술을 뒈지도록 처먹었다는데?”

“명색이 화산제일고수라는 새끼가! 야! 빨리 주독 안 털어내?”

“그냥 둬. 먹은 술 아깝다고 그건 죽어도 안 하잖아.”

반쯤 흐물흐물하게 시든 청명을 보며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거 어떻게 합니까?”

“별수 없지. 업어야…….”

“얘를요?”

“하기 싫으면 비키거라. 내가…….”

“우, 우웨에에에엑!”

“…….”

속에서 무언가를 쏟아내는 청명을 본 백천이 삽시간에 파랗게 질렸다. 그는 나섰던 게 언제냐는 듯 획 돌아섰다.

“……그냥 두고 가자.”

“업으시죠. 사숙.”

“연장자로서 모범을 보이셔야지!”

“다, 닥쳐!”

그때 청명이 머리를 획획 젓고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끄으으……. 아오, 죽겠다.”

그 거지 놈, 술은 더럽게 세네. 맹숭맹숭하게 생겨서는.

그때 당소소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진짜로 이렇게 갑니까?”

“그럼?”

“뭐 환송회라도…….”

“아서라. 총단 다 무너져서 곡소리 나는 데서 무슨 환송을 받겠다고.”

“맞아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죠.”

“우리 잘못은 아니잖아요?”

당소소가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항변했다. 백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개방과는 곧 다시 마주할 일이 있을 테니 그냥 조용히 가자꾸나.”

“흐음. 뭔가 평소 같지 않은데요? 그게 진심이세요, 사숙?”

당소소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빤히 보자 백천의 얼굴에 떨떠름한 표정이 스쳤다.

“솔직하게 말해도 되냐?”

“그럼요. 우리 사이에 솔직하지 못할 게 뭐가 있어요?”

“아니, 그…… 소림도 이소협도 감사의 말 한마디 안 바라고 그렇게 멋지게 가 버렸는데 우리가 여기서 환송받겠다고 뭉개면서 비비적대면 그게…….”

“당장 가죠.”

“빨리 갑시다.”

“상상만 해도 너무 추하다.”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모두의 마음이 순식간에 일치단결했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도망쳐야 한다.

“그래. 가자.”

“아니, 가는 건 좋은데 이 새끼 어떻게 하냐고요?”

“부탁한다, 걸아!”

“힘내세요, 사형!”

“어?”

맛이 가서 축 늘어진 청명을 잡은 채로 조걸은 어버버 입만 벙긋거렸다. 어느새 사형제들은 쌩하니 멀어졌다.

“저 치사한…….”

“우웨에에에엑!”

“…….”

아. 더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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